



오츠 이치의 신간 [실종 홀리데이] 조금 긴 단편이라고 할까, 짧은 중편이라고 할까, 애매한 길이의 중단편 소설 두개가 합쳐져 있는 책이다. 애매한 길이의 중단편 두개다보니, 분량도 적다. 하드커버다. 양이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내용마저 가볍다. 아니, 가볍다.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츠 이치의 책을 이때까지 다섯권 읽었는데,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른 내용, 다른 스타일이다.
오츠란 놈이랑 이치란 놈이랑... 응?
<고쓰>와 <주>에서의 오츠 이치와 <쓸쓸함의 주파수>, <어둠속의 기다림>, <실종 홀리데이>에서의 오츠 이치는 무척 다르다. 내용이나 어조뿐만이 아니라 세계관마저 바뀌어 버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다름은 나름 각각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까지 해서 헷갈린다. 아니, 오히려 덜 헷갈리게 되는 건가.
<쓸쓸함의 주파수>, <어둠속의 목소리> <실종 홀리데이>
좋게 봐주면 , 휴머니즘이 묻어나지만, 나쁘게 보면 신파다. 거기다 어설프게(?) 혹은 쌩뚱맞게(?) 추리가 끼어져 있어서 때론 불편하다.
이전의 두 착한 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실종 홀리데이>의 '행복은 새끼고양이의 모습'과 같은 단편을 보면 좀 불편해진다. <고쓰>와 <주>도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는 면이 있는데, <쓸쓸함의 주파수>류는 정말 좀 아닌듯. 분노까지는 아니라도, 딱 시간 아깝고, 돈 아깝고, 남는 것 없다 싶다.



내가 읽은 김갑수의 책들.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는 음악이나 오디오의 조예와는 거리가 먼 나에게도 무척 재미있게 읽혔다. 홀딱 반해서, <나의 레종데트르>와 <나는 왜 나여야만할까?>(표지도, 제목도 맘에 안 듬) 를 샀는데, <나의 레종데트르>는 아마도 책에 대한 얘기. 실망스러웠는데, 왜 실망스러웠는지 까먹을만큼 임팩트도 없었고, <나는 왜 나...>는 간간히 공감은 갔지만, 끊임없는 투정이 좀 짜증스러웠던 것 같다. 두권의 책을 연달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나온 <지구 위의 작업실> ( 다이앤 애커먼의 <미친별 아래 집>이 자꾸 입가에 맴돈다;) 을 서점까지 가서 사게 된건... 표지 때문일까? 아님 재미없었다는건 까먹고, 재미있었던 기억만 남아 있어서일까? (확실히 기억은 때로는 편리하지만, 때로는 무척 비실용적) 아, 생각났다. '작업실'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작업실'의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타인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것은 타인의 독서일기를 훔쳐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이 김갑수의 작업실인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지.
어제 자기 전에 읽기 시작했던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읽고 있는데, 침대 위의 실비아 플라스를 베고 자는 고양님 때문에, 차마 책을 빼서 내가 읽어야겠소- 할 수 없었다. 마침 손에 닿는 곳에 있던 김갑수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책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읽다가, 어떤 사진에서 M군이 생각나 아침부터 초갈라진 목소리로 통화해 그부분을 이야기해주고 (오늘 맞.선. 잘보게, M군) 전화를 끊은 후 다시 읽다가 덮고 나와 군만두 ... 응?
이전 책들에 비해 지루했다가 (이건 내가 읽는 그의 네번째 책이어서 그럴지도), 쏠쏠히 재미있었다가, 나도 해봐야지 했다가, 뭐 이런걸 책으로까지 내나 했다가, 웃기는 놈이군, 실없는 놈이군 했다가, 이런점은 나랑 꼭 같군 했다가 하면서 읽고 있다 .
결론은?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맘에 안 드는건 아마도 ... 김갑수와 김갑수의 책과 안 어울리는 잊을만하면 나오는 중간중간의 일러스트들? 사진은 꽤 멋지다. 좋은 친구들 많으니 .. 그 중에 그나마 아는 이가 윤광준밖에 없으니, 혹시 윤광준이 찍어 준 사진일까? 상상해본다.
지하의 조용하고 어두운 작업실 vs.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제집드나들듯 나들이 하는 작업실.
나의 로망은 후자에 가깝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