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 : 전에 누가 해준 얘긴데, 예전에는 선생님께서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으셨다고요.

 

손택 : 엄청난 양을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무념무상으로 읽었죠. 전 사람들이 TV를 보듯이 책 읽기를 즐겨요. 읽다가 잠들기도 하고요.우울할 때 책을 한 권 집어 들면 기분이 좋아져요.

 

 

콧 : 에밀리 디킨슨이 쓴 글처럼 "꽃망울과 책들, 슬픔을 달래주는 이런 위안들" 이군요.

 

손택 :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손택의 말도 좋지만 에밀리 디킨슨의 말에 오옷! 해버렸다.

 

꽃망울과 책들, 슬픔을 달래주는 이런 위안들.

 

손택의 말도 좋아.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 작은 우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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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9-2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문단에서 하이드님이 떠올랐었어요. ㅎㅎ

하이드 2015-09-24 13:07   좋아요 0 | URL
ㅎ 그러게요. `꽃`과 `책`이 함께하면 눈이 번쩍 떠져요!

kitty99 2015-09-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녹음봉사하고 있어요~^^

2015-09-24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파크에서 책 사면서 약콩두유 많이 주문했어요? 어흑. 석달동안 잘 주문해서 잘 먹고 있는데, 오늘 주문하려니 '상품준비중'이다. 아직(이제) 두박스(밖에!)  (안) 남았지만, 얼른 다시 준비되어랏! 내 책구매생의 두번째쯤으로 좋은 사은품이라고!

 

꿋꿋이 사은품 없이 주문. 주문하다 생각한건데, 인터파크 기프트몰은 조건도 없어서 당황. 책 한권만 주문해도 몇 개고 주문할 수 있다. 얼마전 '사는게 뭐라고' 책베개 얻으려고 조건 맞춰서 신간 5만원 넘게 주문하느라고 식은땀.

(요즘 안티 알라딘, 인터파크 서포터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나한테 알라딘 책베개 사이즈가 딱 딱 맞다는건 알라딘 책베개가 아니면 몰랐을꺼다. 그닥 베개 따지지 않고, 심지어 베개 없어도! 잘 잘 수 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났다는듯이 좋은 베개 한번씩 사곤 했는데, 책베개 사이즈가 좋은것이 목과 어깨가 굳어있는데, 왜 그 수면할때 좋은 높이로 추천하는 타월 말아 감는것처럼 결린 부분, 목에 딱 맞게 구부려서 어깨, 목이 시원한 느낌.

근데 이번에 사기 너무 힘들었어서 나는 예쁜 천 사서 꽃베개 만들꺼다. 네모난 모양이면 돈 더 들 것 같긴한데, 그냥 이 사이즈여도 되는건지 아님 네모나야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미 많이 찌그러진 책베개 완전히 가시기 전에 10월에는 꽃베개를 만들어보겠어요.

 

여튼, 그래서, 오늘의 책주문은 ..

 

 새라 워터스 <리틀 스트레인저>

 

 2차대전 직후 서서히 몰락하는 영국 귀족 가문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소재로 한 <리틀 스트레인저> 역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기이한 스토리에 예민한 사회 관찰과 날카로운 비판을 적절히 더해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히 재현해냄으로써 세라 워터스의 역사 스릴러 거장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힘입어 공포소설로는 드물게 맨 부커 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스티븐 킹이 '2009 최고의 소설'로 선택하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새라 워터스의 신간이다. 동성애 코드가 없다고 굳이 책소개에 한문단으로 언급해주다니..

 

 

 

 

  정말 두서없는 주문.

  두유 사려고 책주문 하려고 했던건데...

  아, 단속사회 사려고 했던건데, 확률가족 사버렸네.

 

  뭐, 그런거죠. 사려던 책 까먹고, 다른 책들만 사고,

  책일상다반사입니다.

 

  너무  짜증날 것 같아서 안 읽으려고 했는데, 읽어보자꾸나.

 

  줌파 라이히 소설은 이번에 마음 산책에서 반짝반짝 강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정말 너무 예뻐서 계속 맘에 남아 있다. 참 별 이유로 다 사게 되는군. 그렇지 않더라도 줌파 라이히 소설 그간 다 읽었으니 언젠가는 사게 되었겠지만. 여튼, 신간 살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단 말이다. 미스테리, 미스테리 신간을 팍팍 내주길 바랍니다. 라고 읽으려고 매일 세권씩 쌓아두는 책더미 속에서 투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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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종일 알라딘 서재에 들어올 수  없었다. 컴퓨터를 껐다 켜도, 크롬을 써도 익스를 써도, 백신 프로그램을 돌려도 안 되고, 처음에는 한 다섯번 누르면 한번쯤 화면이 뜨더니, 나중에는 열번에 한 번. 밤 즈음에는 포기하고 다른 블로그를 찾아봐야지 생각했다. 글을 못 쓰는 것도 답답하지만, 여기 내가 나에게만 의미있는 지난 십여년간의 글조각들이 잔뜩 있는걸. 슬슬 글들을 지우고 다시 끌어내고 정리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갑갑했던건 알라딘 '나의 서재' 의 각 글만 못 들어갔다는거. 그 외 모든 내가 매일같이 쓰는 사이트들은 다 들어가졌다. 왜지? 왜? 이석원 책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지워졌는데, 초반에 마구 깠던게 지워졌고, 다 읽고 덜 싫어졌다고 쓴 것도 공평하게 지워졌다. 여튼 깠다는 이야기만 썼으니깐 마무리 하긴 해야 하는데 결국 다른 서점에 리뷰를 쓰고, 나중에 페이퍼로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어제 읽은 책은 장석주의 <일요일의 인문학>이었다. 그래, 일요일 되니깐 생각나더라. 지난주 일요일 읽으려고 방에 들여놨다가 (신간들 방에도 못 들어오고 거실 박스 안에...) 일주일 지난 일요일에 또 생각나서 꺼내어 책상옆으로 올려놓았다.

 

장석주의 글이 정말 맘에 든다. 호불호 갈린다고 했는데, 내가 이 저자의 글을 왜 싫어해던걸까 싶을 정도다. 근데, '불면의 등불..'과 같이 나왔던 신간은 별로였으니깐, 어쨌든 내게 장석주 책의 호불호는 갈린다.

 

지난번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가 정말 좋았다고 했는데, 읽고 있는 중이지만 '일요일의 인문학'은 더 좋다. 제목에 '인문학' 들어간거 빼고. '일요일' 들어간건 좋다. '일요일'은 좋은거니깐.

 

서너장 정도의 짧은 챕터인데, 한문장 한문장 필사해두고 싶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오전에 어울리는 글을 옮겨둔다.

 

나는 산책자다. 날마다 걸으며 눈길 안으로 들어오는 거리, 도시, 풍경들을 보고,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며 포식한다. 그것은정신의 나태에 따른 비만을 예방하는 건강한 포식이다. 나는 목적이나 쓸모를따지지 않고 걷는 걸 좋아한다. 야외에서 햇빛과 바람 받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식물이 아니므로 굳이 광합성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걸음에 집중하며 내면으로 흐르는 여러 생각에 골똘해진다. 나는 이것을 '내면의 광합성'이라고 부른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다리가 흔들어 주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느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걷는다. 길에서 얻는 것은감 각의 환대, 느낌들의 풍요이다. 실내에서 야외로 나와 걷는 일은 분명 생각에 예기치 않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저기 걷는 자의 씩씩한 걸음걸이를 보라! 걸음걸이는 삶의 환희와 약동을 표현한다. 걷는 자가 가장 느리고 공해가 없는 에너지를 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걷기가 속도와 기계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자 전통과 느림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다리가 흔들어 주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몽테유의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일단 걷자.길을 걸으면, 다리를 움직이면, 무언가 떠오를 것이다.

 

어제 적었을 때는 어제에 어울렸지만, 월요일에 적으니 또 그건 그거대로  '기다림'에 어울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과 의자와 햇빛 그리고      일요일

 

 

 이번주는 힘든주가 될 것 같다.

 꽃구독은 지난주로 마무리 되었고, 오늘은 오피스 데코와 새 직장에 보내는 베이스 어레인지가 준비되어 나가고, 지난주에 판단착오로 못나간 티라이트 나무홀더세트와 진짜진짜 오래 미루었던( 이렇게까지 뭔가를 미루어 본 적 없어 진짜진짜 죄송한) 책 택배가 나간다

 

다행히.. 어떤 상황에서도 시작하는 아침에만은 기운차다.

월요일이고, 다음주는 추석이고, 가을옷 입은 10월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걷자. 다리를 움직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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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9-2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록하기 누를때마다 글 날아갈까봐 스릴만점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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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TV 방송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이런 본질적인, 그래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종종 듣는다.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최근에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왠지 줄거리만 보아도 엄청 슬플 것 같고, 보고 나면 그만큼 우울할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안 봤었다. 이런 영화가 나온다. 이런 드라마를 했다 라는 소식들만 듣고 한번도 보지 않았다. 에세이라고 해서 가볍게 집었는데, 표지의 톤도 한몫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경계가 흐트러져 공기처럼 가벼워 보인다.

 

공기처럼 가벼운건 맞다. 내가 무겁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여백과 디테일이 있어서 가볍고, 무겁다.

책 제목처럼 '걷는 듯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다큐작업을 했었고, 방송인으로 커리어를 시작해서 영화를 찍게 되었다. 그 모든 작업들을 하게 되는 직업적 고민과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엄청 무거운 이야기들인줄 알았는데, 희망도 절망도 아닌, 기쁨도 슬픔도 아닌, 기대도 좌절도 아닌, 복합적인 감정을 관객, 혹은 시청자에게 넘기는 작가구나 싶다.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등장인물과 관객의 슬픔을 부추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죽음으 편에서 더없이 소중한 삶을 그리려했고,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초대한 그 과정과 슬픔은 떼어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훗날>도 돌아온 죽은 아이와 부모가 다시 헤어지는 과정을 그렸지만, 주제는 물론 슬픔이 아니다. 반대로 죽은 아이와 함께 할때만 이 부부는 '삶'을 회복하고 즐거워한다.

 

줄거리는 내가 영화소개에서 보는 그 줄거리가 맞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챕터를 통째로 옮기고 싶은 부분들이 많다. 영화나 티비는 사람들이 좋아할법한, 혹은 사람들을 자극할만한, 혹은 예전부터 해왔던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해', 긍정과 인정의 미덕. 해피앤딩...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간의 결핍을 애정하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려고 하고, 그런 노력을 영화에서 미덕으로 그리고, 현실에서도 미덕으로 칭송하는데, 그러나, 과연.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극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묻는다. 해낸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일일까?' 묻는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원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이부분을 처음 읽을때는 약해. 나약해. 하는 마음이었는데, 세번쯤 반복해서 읽고 나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소소한 행복을 찾아라. 뭐 그런 이야기랑은 달라. 현실은 구질구질해. 그런 이야기도 아니야.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는데, 어려움에 타인에 쉽게 의지하고, 구원을 찾는데, 그건 전적인 의존과는 또 다르고, 그건 '나약함' 이라고 불리지만, 우리가 반복해서 반복해서 학습되어온것처럼 '나약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혼자의 힘으로 극복' 하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일'인지도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기 전에 감독의 최근 영화를 하나 봤다. 후쿠야마 마사히로가 나오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라는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고, 영화를 떠올리며 책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지하지만, 의존은아니고, 혼자만의 힘으로 이를 악물고 노력하려다가 놓치는 것들, 결국 부러지게 되는 것. 다시 붙이고 구부러지게 만드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이다.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이지만,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다.딱 한 편 본 영화에서도 그렇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외할머니로 나오는 기키 기린씨와의 일화에서 기키 기린이 크랭크인 전날 감독을 데리고 초밥을 먹으러 간다. 각본을 펼치고 말한다.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조금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그리고 그 한마디로 감독은 연출방향과 자세를 정한다.

 

지금까지의 리뷰가 지루했다면, 그건 그냥 내탓이고, 글은 상당히 재미있다. 어떤 글을 써도 재미있게 쓰는 저자 부류에 넣어도 좋을만큼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위의 일화는 '배우'편에 나온다. 감독이 접해왔던 배우들에 대한 에피소드들만 묶어 놓았는데, 오다기리 조나 아베 히로시 정도를 빼고는 아마도 낯익은 할머니역 배우,할아버지역 배우, 혹은 이름 모를 아이들 이야기일테지만, 잠깐 나오던, 주인공으로 계속 나오던간에 그들 각각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도 와닿는다.

 

'품성보다는 분노,라는 박력'에서는 참석했던 칸느 영화제 이야기를 하는데, 글의 전개와 결론이 너무나 훌륭하다. 글을 보는 내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글을 못 봤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저자의 성격상 직설적인 '분노'와 그에 직접적인 야유와 비웃음으로 반응하는 관객이 거북하다. ,<아무도 모른다> 를 찍고  "당신은 영화의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이를버린 어머니도 단죄하지  않는다."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받는다고 한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라고 대답하는 저자인 것이다.

 

예로 들어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순간은 후련하다고 해도 제작자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 문제이고, 그 병소를 공

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렇게 단순한 악인이 아니고, 개인과 단체와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이 엮여서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악'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쉬운 길, 눈에 보이는 길을 택해 '고름'을 비판하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전작인 <볼링 포 컬럼바인>에 비해 깊이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이 작품의 제작도, 세계의 현상황도, 그에게는 긴급사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순수하게 작품으로서 뛰어난가? 과연 다큐멘터리인가? 그런건 아마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적어도 그에게는!) 무엇보다 거기에 표명된 그의 분노의 절실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 덧붙여 자신만의 해석을 해내는데, 그의 가치관과 시대에 대한 그의 일에 대한 고민과 철학과 공부가 읽혀서 대단하다 싶었다.

 

영화제가 올림픽이 아닐진대, '일본', '일본' 하면서 취재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영화제의 다섯가지 평가방식 이야기, 영화의국적 이야기도 재미있다.

 

후쿠시마 원전, 동일본 대지진 이야기는 근래 내가 읽는 일본 저자 에세이에 빠지지 않고, 여기에도 나온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원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마지막에 나온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책에서 또 좋았던 부분은 '애도'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가 인연을 맺어왔던 영화계,방송계 사람들을 애도하는 글들을 모아 놓았는데, 책 쓴다고 다시 썼을리는 없고, 그 때 그 때 어딘가 발표했건, 어딘가 적어두었던, 애도 이야기들이 꽤 많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나라에서 부고에 이런 애도글들을 본 적이 있었던가.

 

다시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돌아가서.

 

개인으로서는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진 지금의 내가 있다. 그런 내게 "잊지 마"라고 오늘 지진이 경고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일상 같은건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아"라고 말이다. 재해지의 부흥은 고사하고 복굳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사기꾼 같은 방식으로 원전을 재가동하려는 무리가 이미  등장했다. 원전 내구성 진단은 간이 검사로 때운다? 그런 발언은 그 지진을 경험하기 이전의 인간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지진으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해 곤란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역 구내에서 몰아낸 철도 회사에 욕을 퍼붓던 도지사는, 그에 대한 대책이나 자신의 책임을 말하기보다 도쿄 올림픽으로 힘을 보여주자고 말한다. 그의 아들은,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불안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상황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빨리 잊자." 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4개월 전에 경험한 것은, 일본 어느 곳에 사는지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잊은 척하며 내달려온 문명을 근본부터 되묻는 사건이었다. 그 풍경을 앞에 두고,'미래'나 '안전'보다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경멸스럽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눈을 흐리는 큰 원인 중하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벌써 망각 쪽으로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도 역시 기득권층의 이익 안에서 눈이 흐려져버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길었지만, 남의 나라 이야기같지 않아서 길게 옮겨 보았다.

 

재미있었는데, 무거운 이야기만 옮긴 것 같기도 하다. 어릴때부터 고레에다 집안은  바깥에서 사진 찍을때면 꼭 남의 집 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던가 하는 이야기. 바닷가에서 죽은 게를 지키며 덤비던 게 이야기 같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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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09-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레에다 감독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그의 글에서도 그의 영화애서 보여지던 그가 느껴지더군요. 이 사람 정말 진솔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하이드 2015-09-20 12:38   좋아요 0 | URL
에세이는 유독 그 사람이 드러나지요? 사람이 매력적이니 글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어요. 덕분에 의식적으로 피했던 그의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보는 중인데, 한 번 보고, 또 봐야지하는 마음 들게 하네요. 아마 억지로라도 영화나 드라마 먼저 접했다면 그러지 않았을꺼에요. 그러고보면 저는 영상인간보다는 활자인간인가봐요. ㅎㅎ

 
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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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는 글래스가 일곱명 중 여섯째와 일곱째이다. 프래니와 주이는 앞쪽에 '프래니'파트 짧게, 그리고 '주이' 파트에 주이와 프래니 이야기가 길게 나와 있다.

 

샐린저가 애착을 느끼고 이야기하기 좋아한 글래스가 이야기는 '프래니와 주이' 이외에도 다른 단편집들에서 두 편 더 볼 수 있다고 하니, 아마 이미 읽었겠지만, 음..

 

신경증적인 프래니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쉽지 않고, 이어지는 주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특히 그들 남매의 엄마인 배시와 주이의 욕실 대화에서는 주이에 엄청 감정 이입해서, 나가라고! 나가라고! 짜증 잔뜩 내면서 읽었다 .

 

이 이야기 먼저 해야지. '프래니와 주이' 하면 나는 주이 드샤넬이란 배우가 먼저 떠오른다. '프래니와 주이'를 좋아한 부모가 주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근데 왜 여자인 프래니가 아니라 남자인 주이 이름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주이인데, 주이 드샤넬 혼자만 자기 조이라고 불러달라고, 자기 이름은 조이라고 읽는거라고 한다고 했던 거. 자존감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우기는데, 그게 본인 이름이니깐 또 뭐라고 하기도 그런 애매하지만, 왠지 주이 드샤넬 멋짐 포인트.

 

사실 엄청 마르고 왜소한 느낌의 엄청 잘생긴 주이의 첫 묘사에서부터 계속 벤 휘쇼를 떠올렸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벤 휘쇼와 주이 드샤넬이 자연스레 주이와 프래니로 상상되며 독서.

 

미리 알려드리자면, 주이에게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콤플렉스, 중첩,분열이며, 그러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신상 보고서 형식의 단락이 적어도 두 개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자그마한 젊은이로 몸이극도로 여위었다. 뒤에서 보면 - 특히 척추뼈가 드러난 부위를 보면 - 그는 거의,살을 찌우고 햇볕을 쪼라고 매년 여름 재단 주최 캠프들에 보내지는 도시 지역 저소득층 아동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클로즈업을 해서 보면, 정면이든 측면이든 그의 얼굴은 빼어나게, 심지어 굉장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그의 큰누나는(겸손하게도 그녀는 여기에서는 그저 터커호의가정주부로 불리길 원한다) 내게 그를 "몬테카를로의 룰렛 테이블에서 당신 품에 안겨 죽은 푸른 눈의 유태계 아일랜드인 모히칸 척후병"처럼 생겼다고 묘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연기자인 주이, 대학생인 프래니.

주이는 욕실에서 이미 몇 번이나 읽었던 형인 '버디'의 편지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읽는다.

이들 남매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둘은 시모어와 버드인데 시모어는 자살, 버드는 월든의 소로우처럼 은둔.

버디의 편지에서 버디가 주이에게 말한다.

 

이쯤 하자. 연기를 해라. 재커리 마틴 글래스, 언제든 어디서든 네가 원하는 대로. 넌 네가 그일을꼭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전력을 다해서 해라. 네가 무대에서 뭔가 아름다운 것을 한다면, 이름 없는 무엇이나 기쁨을 만드는 일을한다면, 연극적 재간의 요청을 뛰어넘는 무엇을 한다면, S와 나,우리 둘은 턱시도와 인조 보석이 달린 모자를 빌리고 금어초 꽃다발을 들고서 엄숙하게 극장 뒷문으로 갈 것이다. 아무튼, 도움이 거의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의 애정과 지원을 믿어주기 바란다.

 

이들 형제자매들을 이루는 이미지가 또 있다. '지혜로운 아이들'이라는 유명한 쇼가 있었는데, 그 쇼에 이들 형제자매가 다 출연하는 기록. 이십여년동안 그들 중 하나가 안 나온 쇼가 없었다는 기록. 외부의 주목을 받은 잘생기고 예쁘며 영재처럼 똑똑한 형제자매들인 것이다.

 

 

프래니와 주이는 자신들이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들도 불행해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고뇌한다.

 

"그애는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한 어린아이다. 게다가 넌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곤 하지."

 

"넌 마음에 들어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하나다. 마음에 들면 혼자 계속 얘기를 하고그러면 아무도 단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 마치 죽음 그자체처럼 앉아서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게 하지."

 

"너는 늘 그런 식이다."

"너도 그렇고 버디도 그렇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르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가 맞겠구나."

 

주이는 글래스 부인에게, 그리고 언젠가 프래니에게 말한다.

 

"우린 괴물이에요. 우리 둘, 프래니와 나."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스물다섯 살 괴물이고 프래니는 스무 살 괴물. 그리고 이건 그 두 인간 책임이에요."

 

프래니와 레인

 

주이와 배시

주이와 프래니

프래니와 버디(주이)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예술과 종교와 타인과 에고에 대한 남매의 고민.에 쉽게 공감되지는 않지만, 그 것이 어떤 장면일지는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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