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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의 연구는 역사가나 교육학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문제점의 논의와 연구물의 누적 속에서도 학생들은 새로운 역사를 접했는가 의문이다. 문제들의 해결책이 명확하게 제시되었는지 의문이다.

이에 나는 학생의 입장에서 역사교육을 바라보려고 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누적되어 기존 패러다임의 문제해결능력에 대한 의혹이 학자들 간에 광범위하게 파급되면 이런 광범위한 위기에 대한 공동인식은 기존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과학철학자 토마스쿤의 지적이다. <교과교육현상의 질적연구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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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교육 현장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이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하나의 보고서이다. 현장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학생들의 관점에서 새롭게 역사교육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의 과정 가운데 하나로 보아주길 바란다.

나는 교육현장에서도 대화와 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며, 학생 역시 역사교육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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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은 재위 13년에 부친(사도세자)의 새 園寢을 화성(수원)에 쓰면서 석상을 설치하여 극히 아름답게 꾸몄다. 이때 정조는 “천하를 위하여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聖人의교훈이니, 나도 어버이 喪에 온 정성을 다하는 도리를 다하여 이 일에 극진함을 다하는 정성을 쏟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民力을 괴롭게 하고 경비를 많이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극진히 아름답게 하여 나의 영원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려고 한다.”고 하여 백성들을 마구 동원하지도 않고 경비를 낭비하지도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조의 이 말은 맹자의 본뜻(사람이라면 법령에 抵觸되지 않고 재물이 許容하는 범위 안에서 부모의 喪事를 극진히 치러 슬픔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려고 하는 것이 常情임을 일깨운 것이다.)을 잘 체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경호 한자이야기 1247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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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은 漢나라 光武帝의 日復一日(하루 또 하루)이란 말을 좋아했다. 광무제가 남방을 巡狩할 때 남돈현의 父老들이 ‘10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해 주소서’하자, 광무제는 “천하의 重器(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를 늘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하루 또 하루를 지내는데 어떻게 감히 10년을 기약하겠는가”라고 했다. 정조는 부자나 귀인이 榮名과 利祿을 영구히 유지하려고 안달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즉위 뒤 한 번의 생각이라도 혹 해이하게 가진 적이 없었고 한 가지의 일이라도 태만하게 한 적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현대의 지도자들도 日復一日의 마음을 지녀야 하리라. 심경호 동아일보 한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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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은 1883년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를 개항하면서 청나라 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본다. 청 군대가 들어올 때 제물포와 가까운 산둥성 출신의 중국 노무자들이 하역 일꾼으로 따라 들어와 중국 된장인 춘장을 야채, 고기와 함께 볶아 국수에 비벼 먹었던 음식이 짜장면이다. 항만 노동자들이 먹던 음식이 우리나라 전역에 퍼진 것은 당시에는 고급 음식점이었던 청요릿집에서 짜장면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해 팔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처음 짜장면을 만들어 판 집은 1905년 제물포에서 문을 연 공화춘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 짜장면은 가장 서민적인 음식 중 하나가 됐지만 1960년대만 해도 짜장면은 초등학교 졸업식 때 먹는 선망의 음식이었다.  

한국 짜장면의 역사는 이렇지만 중국 짜장면의 정체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짜장면이 원래 상둥 지방 음식이었는데 한국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베이징 짜장면이 더 유명하다. 실제 중국에 가면 ‘옛날식 베이징 짜장면(老北京 炸醬麵)’이라는 간판의 분식집을 자주 볼 수 있다. 옛날 짜장면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유혹할 정도로 베이징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는 음식이다. 이처럼 짜장면은 베이징을 포함해 주로 중국 북방에서 먹었던 국수다. 허베이, 산둥, 산시와 동북 3성 농민들이 많이 먹었다. 이 때문에 북방을 대표하는 국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북방의 대표국수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즐겨 먹었다면서 문헌에는 짜장면이라는 명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이전은 물론이고 明淸 때의 요리책과 문집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음식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근대 문학가인 루쉰(魯迅)의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식탁에 야식을 내왔는데 한편에는 큰 국수 그릇을 놓고 다른 한편에는 오리고기를 놓고 볶은 된장인 자장그릇을 놓았다”고 묘사한 장면이 보인다. 자장이라고 하니까 우리나라와 같은 중국식 소스를 연상하겠지만 실제로는 날된장에 가깝다. 지금 중국에서 파는 옛날식 베이징 짜장면이 이렇다. 된장에 채썬 오이와 거의 익히지 않은 숙주나물 등을 넣고 비벼 먹는다. 삶은 국수에 된장을 넣고 비벼먹는 것이니 특별한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문헌에도 막국수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그 실체는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짜장면 역시 가난한 농민들이 국수를 된장에 비벼 먹었던 막국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랬던 짜장면이 베이징 중산층에 유행한 것은 1860년 서구 열강의 베이징 침입으로 피란길에 나선 서태후가 짜장면을 맛있게 먹은 이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짜장면은 중국 북방에서도 산둥사람들이 먹었던 짜장면이다. 

윤덕노의 음식이야기.. 동아일보 201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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