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고입시험이 있었다. 중3교실은 지금의 고3교실과 유사했다. '18년 간'이란 이름의 기출문제집을 끼고 있어야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은 들썩였다. 올림픽 준비가 한창일 때 당시 최고의 만화 영화 '달려라,하니'를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가을 추석을 전후로 '88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올림픽 개막식 티켓을 구한 우리 중학교 선생님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며, 칼루이스냐? 벤존슨이냐? 떠들며, 올림픽 이야기를 한창 하던 때, 아직 어린 우리에겐 정치권의 문제가 무엇인지,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전혀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당시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친척들이 건네주던 용돈이 넉넉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올림픽 보다는 친척들로 부터 용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추석을 더 기다렸다. 공부 열심히 하라며 건네주던 용돈으로 만 원 짜리를 받기도 했던 1988년, 나는 그 용돈으로 조립식 장난감 권총을 2자루 사고, 입에는 성냥개비를 물고 작년 수학여행에서 산 싸구려 썬글라스를 끼고 영웅본색의 주인공 주윤발 처럼 돌아다니다 엄마에게 야단도 맡던 그런 시기였다. 일명 쌍팔년도.
추석 당일 유도의 김재엽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 올랐던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후 김재엽 선수가 유도국가대표 감독이나 체대 교수를 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유도계를 떠나 다른 삶을 살고 계시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세상은 천재를 그리도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서로 무리지어 끼리끼리 놀고 먹었다. 지금도 변한 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올림픽 개막식 구렁쇠 소년도 기억나고,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구렁쇠 소년의 생기넘치는 등장의 모습이 선명하다. 둥근 궁렁쇠와 하얀 반바지 체육복 그리고 하얀 모자 위로 흔들던 손....잠시의 고요함.....
성화를 들고 달리던 손기정 선생님도 기억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으로 직접 본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찍힌 사진은 아직도 교과서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누가 보아도 패배한 올림픽 복싱 결승 경기에서 예상밖에 들려진 자신의 손을 보며 ,승리한 우리나라 선수가 더 당황해 하던 표정, 그리고 말도 안되는 해설을 하며 당혹감을 못 감추면서도 국가주의에 열 올리던 방송 캐스터와 해설가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의 얼굴 모두가 기억난다. 아름다운 패배를 원했을 당시 금메달 리스트 박시헌 선수는 아마도 국가주의가 낳은 서울올림픽 최고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그의 선수 생명을 끝장내버린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왜 우리는 멋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가?
88서울올림픽 최악의 장면으로 나는 성화 점화의 순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화가 점화를 위해 성화대에 옮겨질 때, 3명의 마지막 성화 봉송자가 동시에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점화가 이루어지던 그 순간 수많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통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성화 점화 전에 비둘기를 날렸으며, 왜 비둘기가 성화대 주변에 앉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역사상 최악의 성화 점화로 기억될 당시의 점화식은 84년 LA올림픽 그리고 다음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비교 되면서 최악이란 이름을 길이 간직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장애인 양궁 선수가 활시위를 당겨 성화를 점화하던 그 장면은 당시 올림픽 마라톤 황영조 선수의 몬주익 언덕을 힘차게 달리며 일본 선수를 앞지르던 장면과 함께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수 천 번도 더 연습했을 불붙은 화살로 성화를 점화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그 이전 올림픽 성화 점화와는 천당과 지옥만큼 차이가 나는 개막식 성화 점화식을 보여준 올림픽이었다. 호돌이로 상징되는 88서울올림픽이 1988년 그해에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모든 것이 국가주의에 한 조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창의적 아이디어 없이, 물량으로 또는 힘으로 밀어붙이던 쌍팔년도, 거리를 정비한다고 고단하게 살던 하층민의 주거 공간을 밀어 내던 철거 현장....태능선수촌에서 인권이란 말도 못 꺼내며 기계처럼 훈련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며 내 귀로 들어오고, 문제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그 이름도 유명한 '쌍팔년도'.... 그 유명한 쌍팔학번이 탄생하던 1988년....그해 가을.....
1988년 최고의 기억은 이런 모든 올림픽 장면을 압도하는 탈주범들의 인질극 생중계 장면이다. 올림픽을 마치고 얼마되 지 않은 어느 일요일 아침, 독서실을 가야 하는 나를 TV 앞에 멈추게 했던 사건이었다. 바로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이름의 일명, '지강헌 사건'이다. 당시 일요일 아침 방송에서는 지강헌 일당의 인질극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때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가 왜 저리도 분노에 몸부림 치는지, 경찰이 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사와서 틀었는지 등등 뭔지도 모르고 처음 보는 실제 인질극이 너무도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 TV 속 사건이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실제로도 일어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고, 내일 학교가면 친구들과 재미난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다는 기억이 난다. 나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그저 썬글라스 낀 탈주범 아저씨, 마치 영웅본색 영화 속 주윤발 처럼 실제 권총들고 또 인질을 데리고,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과 얼마 뒤 총에 맞고 경찰에 의해 실려 나오는 장면까지 모두 생중계로 똑똑하게 보았다.
사실 지강헌이나 탈주범에 대한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이렇게 까지 오래도록 나와 우리의 기억에 남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사건을 다시 바라보면, 이 사건은 큰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조각 흔적으로 남길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1987년의 민주항쟁은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1988년 노태우 정권의 시작과 함께 터져나온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운동 본부 비리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전경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다가 형이 대통령이 된 뒤 알 짜 중의 알 짜인 새마을운동본부의 수장이 되었고, 수십 억을 해드시고도 징역 7년에 그것도 3년 조금 지나 가석방되었다. 선고가 있던 날 전경환은 법정을 떠나며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어느 한 시민이 전경환의 얼굴에 날린 싸다귀로도 잘 표현되었지만, 그가 사망할 때 까지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억이 넘지 않았던거 같은데, 수 십억 횡령을 바라본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 시민에 의한 분노의 싸다구가 보여준다.
얼마 전, 당시 우리 아버지가 일하던 공사판에서 시멘트가 없어 이리저리 구하러 다닐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웃 돈을 더 주고 구한 시멘트는 지역 새마을 운동에 쓰라고 내려온 것을 몇 배의 가격으로 구한 것이었다. 당시 얼핏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는 웃 돈을 더해 주고 산 시멘트로 공사를 진행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정부 욕을 엄청 했다고 들었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는데, 나는 대통령 욕하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생각하던 철없는 아이였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바로 전두환의 국보위에서 만든 사회보호법이다. 소위 보호감호제도, 이중처벌 논란으로 지금은 사라진 제도가 지강헌과 탈주범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약 500만원 정도의 절도혐의에 대하여 지강헌의 죄값은 징역 7년이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10년의 보호감호 조치가 더해져 있었다.
지강헌 스스로가 말했다. '난 국민학교(초등학교) 밖에 못나왔지만, 나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 이 말이 실로 그에게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주었는지 반성하게 하는 말이다. 그가 홀로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름 힘들게 노력했을 당시 사회 상황을 생각해 보면, 너무도 눈물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강헌의 죽음과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탈주범 두 명의 죽음은 한낱 범죄자의 죽음에 그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했던 그들의 말,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구절에 우리가 공감했다는 점 바로 그 점에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