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당시 내가 살던 곳은 고입시험이 있었다3교실은 지금의 고3교실과 유사했다. '16년 간'이란 이름의 기출문제집을 끼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옆반 담임 선생님의 연애사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었다옆반 담임선생님은 부임하신지 2년 밖에 안된 젊은 여자 수학선생님이었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예쁘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들은 선생님을 좋아했다

친구들은 선생님에게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부끄러워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데, 2학기 들어 표정이 안 좋아 졌고말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끔 혼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시기도 했는데, 잔잔하고도 슬픈 음악을 연주하였다. 우리 모두가 선생님에게 요즘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할 때 전해 듣게 된 이야기는 당시에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전교조즉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였고탈퇴를 권유했는데거절했다고 했다우리 학교에도 전교조 선생님이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학교의 문제점과 학생들의 인권을 무시한 체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시던 인기 많은 선생님이었다. 당시 전교조는 정부에서 불법단체로 규정하였고전교조 가입 교사는 해직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힌 때 였다우리 학교 선생님은 결국 탈퇴하게 되었는데, 수업시간에 탈퇴에 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그렇지만 옆반 담임 선생님의 남자친구는 계속 전교조에 남기로 결정했고집안의 반대로 해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선생님의 남자친구는 결국 다음해 해직되었다뭔가 자유로워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억압된 구조가 느껴지던 시기다.


우리의 관심은 단연 88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은 들썩였다. 올림픽 준비가 한창일 때 당시 최고의 만화 영화 '달려라,하니'를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일요일 달려라 하니가 끝나면 곧바로 독서실에 가야 했다. 하루는 독서실에 가던 중 험악한 형들이 갑자기 나타나 팔짱을 끼더니 조용히 따라오라고 했다. 골목 으슥한 곳에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면서, ‘뒤져서 나오면 100원에 백대야!’라고 겁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100대를 어떻게 때리겠어! 뻥이지하겠지만, 당시엔 주머니에 든 천원짜리 두 장을 빼앗기고 울면서 독서실에 들어갔다. 독서실 총무 형은 경찰에 신고하고 엄마에게 전화해 주었다. 엄마는 거지에게 적선한 거라 생각하고,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라며 나를 안아주셨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든든했다.


가을 추석을 전후로 '88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올림픽 개막식 티켓을 구한 우리 중학교 선생님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며, 칼루이스냐? 벤존슨이냐? 떠들었다. 올림픽 이야기를 한창 하던 때, 아직 어린 우리에겐 정치권의 문제가 무엇인지,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전혀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올림픽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문제가 보였는데, 7~8년 지난 뒤에야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당시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친척들이 건네주던 용돈이 넉넉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 친척 가운데 자기 아들이 이번에 KBS방송국에 취직했다고 자랑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사실 나는 올림픽 보다는 친척들로 부터 용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추석을 더 기다렸다. 공부 열심히 하라며 건네주던 용돈으로 만 원 짜리를 받기도 했던 1988, 나는 그 용돈으로 조립식 장난감 BB탄 권총을 2개 사고, 입에는 성냥개비를 물고, 작년 수학여행에서 산 싸구려 썬글라스를 끼고, ‘영웅본색의 주인공 주윤발 처럼 돌아다니다 엄마에게 야단도 맡던 그런 시기였다. 일명 쌍팔년도.


추석 당일 유도의 김재엽 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그가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 올랐던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후 김재엽 선수가 유도국가대표 감독이나 체대 교수를 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유도계를 떠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세상은 천재를 그리도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서로 무리지어 끼리끼리 놀고 먹었다. 지금도 변한 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구렁쇠 소년도 기억난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구렁쇠 소년의 생기넘치는 등장이 선명하다. 둥근 궁렁쇠와 하얀 반바지 체육복 그리고 하얀 모자 위로 흔들던 손....잠시의 고요함.....


성화를 들고 달리던 손기정 선생님도 기억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으로 직관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일장기가 지워진 시상식 사진은 아직도 교과서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누가 보아도 패배한 올림픽 복싱 결승 경기에서 예상밖에 들려진 자신의 손을 보며,승리한 우리나라 선수가 더 당황해 하던 표정, 그리고 말도 안되는 해설을 하며 당혹감을 못 감추면서도 국가주의에 열 올리던 방송 캐스터와 해설가가 기억난다. 아름다운 패배를 원했을 당시 금메달 리스트 박시헌 선수는 아마도 국가주의가 낳은 서울올림픽 최고의 희생양일 것이다. 국가가 그의 선수 생명을 끝장내버린 역사적 사건이다.‘왜 우리는 멋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가?’


88서울올림픽 최악의 장면으로 나는 성화 점화의 순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화가 점화를 위해 성화대에 옮겨질 때, 3명의 마지막 성화 봉송자가 동시에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점화가 이루어지던 그 순간 수많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통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성화 점화 전에 비둘기를 날렸으며, 왜 비둘기가 성화대 주변에 앉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역사상 최악의 성화 점화로 기억될 당시의 점화식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성화 점화식과 비교 되면서 최악이란 이름을 역사에 간직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장애인 양궁 선수가 활시위를 당겨 성화를 점화하던 그 장면은 당시 올림픽 마라톤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언덕을 힘차게 달리며 일본 선수를 앞지르던 장면과 함께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수 천 번도 더 연습했을 불붙은 화살로 성화를 점화한 선수, 그리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그 이전 올림픽 성화 점화와는 천당과 지옥만큼 차이가 나는 개막식 성화 점화식을 보여주었다.


호돌이로 상징되는 88서울올림픽이 1988년 그해에 있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그해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김성령 배우가 카퍼레이드를 호돌이와 함께 하던 장면도 기억난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88 올림픽 역시 국가주의에 한 조각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중학교 3학년인 나에겐 처음 경험해보는 흥미진진한 이벤트일 뿐이었다.

창의적 아이디어 보다는, 힘으로, 물량으로 또는 군인 정신으로 밀어붙이던 쌍팔년도, 거리를 정비한다고 고단하게 살던 하층민의 주거 공간을 밀어 내던 철거 현장....태능선수촌에서 인권이란 말도 못 꺼내며 기계처럼 훈련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며 내 귀로 들어오고, 문제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그 이름도 유명한 쌍팔년도’.... 그 유명한 쌍팔학번이 탄생하던 1988....그해 가을..... 1988년 최고의 기억은 이런 모든 올림픽 장면을 압도하는 탈주범들의 인질극 생중계 장면이다.


올림픽을 마치고 얼마되 지 않은 어느 일요일 아침, 독서실을 가야 하는 나를 TV 앞에 멈추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이름의 소위, ‘지강헌 사건이다. 일요일 아침 방송에서는 지강헌 일당의 인질극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때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가 왜 저리도 분노에 몸부림 치는지, 경찰이 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사와서 틀었는지 등등 뭔지도 모르고 처음 보는 실제 인질극이 너무도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 TV 속 사건이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학교가면 친구들과 재미난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다는 철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그저 썬글라스 낀 탈주범 아저씨, 마치 영웅본색 영화 속 주윤발 처럼 실제 권총들고 또 인질을 데리고,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과 얼마 뒤 총에 맞고 경찰에 의해 실려 나오는 장면까지 모두 생중계로 똑똑하게 보았다.


지강헌이나 탈주범에 대한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이렇게 까지 오래도록 나와 우리의 기억에 남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사건을 다시 바라보면, 이 사건은 큰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조각 흔적으로 남길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1987년의 민주항쟁은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1988년 노태우 정권의 시작과 함께 터져나온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운동 본부 비리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전경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다가 형이 대통령이 된 뒤 알짜 중의 알짜인 새마을운동본부의 수장이 되었고, 수십 억을 해드시고도 징역 7년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3년 조금 지나 가석방되었다. 선고가 있던 날 전경환은 법정을 떠나며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어느 한 시민이 전경환의 얼굴에 날린 싸다귀로도 잘 표현되었지만, 그가 사망할 때 까지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억이 넘지 않았던거 같은데, 수 십억 횡령을 바라본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한 시민에 의한 분노의 싸다귀가 국민감정을 대신한 것이었다.

지강헌 사건이 있기 얼마전, 당시 우리 아버지가 일하던 공사판에서 시멘트가 없어 이리저리 구하러 다닐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웃 돈을 더 주고 구한 시멘트는 지역 새마을 운동에 쓰라고 내려온 것을 몇 배의 가격으로 구한 것이었다. 당시 얼핏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는 웃 돈을 더해 주고 산 시멘트로 공사를 진행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정부 욕을 엄청 했다고 들었다. 그때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는데, 나는 대통령 욕하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던 철없는 아이였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바로 전두환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만든 사회보호법이다. 소위 보호감호제도, 이중처벌 논란으로 지금은 사라진 제도가 지강헌과 탈주범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500만원 정도의 절도혐의에 대하여 지강헌의 죄값은 징역 7년이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10년의 보호감호 조치가 더해져 있었다. 지강헌 스스로가 말했다. ‘난 국민학교(초등학교) 밖에 못나왔지만, 나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 그의 절규는 실로 그에게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주었는지 반성하게 한다


그가 홀로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름 힘들게 노력했을 당시 사회 상황을 생각해 보면, 너무도 눈물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강헌의 죽음과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탈주범 두 명의 죽음은 한낱 범죄자의 죽음에 그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했던 그들의 말,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구절에 우리가 공감했다는 점, 바로 그 점에서 지강헌 사건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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