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홈페이지나 이런 게시판에 가끔 P양이라고 부르는 등장인물이 있다.
나의 오랜 친구로 현명하면서도 어리석은 여자다.  에르노처럼...
이번 <책에 관련된 기억>은 그녀의 이야기이다.


다시는 이런 책은 없을거야. 그 어떤 작가도 이런 열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할 수는 없을거야. 그리고 이 정도 강도는 아니지만 나도 이런 때가 있었지.  뭐 이정도가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의 전부이다.
그러나 아마...P양은 다를지도 모른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녀에게 이 책을 빌려줬었다. 구판이어서 하드커버에 트레이싱지로 커버링된 책인데 그녀는 소개팅에 나가 그를 기다리며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거다. 나도 한번 같이 본 적이 있는 그 남자는 미국 MBA 출신에 품위있는 집안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닥 교양있어 보이지도, 특별한 매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기엔 이상해 보였다.

아주 짧고 열정적이었던 그녀의 감정을 보면서 마치 이 책을 다시 한번 읽는듯 했었다.
지나간 사랑은 기억에 오래 남지만 단순한 열정은 지나치자 마자 잊혀지는 듯 하다.
그녀는 두번 다시 그의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틀간 방콕에서 너무나 유쾌한 시간을 보낸 뒤 막 파타야에 도착했을 때였다.
호텔 창 밖을 바라보며 비오는수영장에 나갈까
아님 쇼핑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다투기 시작했다.


작년이었다. 하루키의 가벼움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단편 중 <방콕 서프라이즈>를 방콕에서 읽어야하지 하는 마음으로 이 단편을 가방에 챙겼었다.

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어디에서는 무얼보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어떤 경험을 했냐고 묻는다면 그 모든 여행에서 바다와 하늘을 보았고, 스튜어디스(혹은 스튜어드)와 호텔인포데스크 소년과 친절한 서퍼샵의 점원들을 만났고, 늘 잠을 자거나 저녁 느즈막히 산책을 하거나 태닝을 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여행이 그런 식이었다.

그녀와의 다툼은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고백하건데 사실 나는 굉장히 비겁한 인간이다. 상처입거나 귀찮아지거나 또는 마음이 쓰여질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구석이 있다. 그런 내가 누군가와 크게 다툰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날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할 말을 다 했는데도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고 이렇게까지 하는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와 왜 이런 쓸 데 없는 소모를 했을까하는 자괴감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주섬주섬 CDP를 챙겨 음악을 들었고 나는 침대에 돌아누워 이 책을 읽었다.

굉장히 재미있고 중간중간 피식하게 하는 이 소설을 여행지의 호텔에서 침침한 기분으로 읽었던 그 시추에이션이 아직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남아서 날 미소짓게 한다. 사실 난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너무나 기발한 문장에 감탄하며 조용히, 은밀히 웃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중국행 슬로 보트//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뉴욕 탄광의 비극 // 캥거루 통신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 흙 속의 그녀의 작은 개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하루키의 단편을 살 때면 꼭 예전에 읽은 단편이 1-2개는 섞여있곤 했었다.  (계획성없는 라이센스 정책에 아주 화가 나곤했었지.) 이 책은 그 절정판이며 벌써 오래전에 절판되어버린, 하루키 매니아들에게조차 별 소장가치가 없는 그런 B품같은 책인데 내겐 여러 기억들이 남아있어서 소중한 책이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대학시절엔 훨씬 더 단편 매니아였고 자리를 옮기며 책읽는걸 즐겼었다. 그래서 백팩엔 항상 2-개권의 책을 가지고 다녔었다. 이 책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미팅을 하고, 소개팅을 하고, 약간의 두근거림을 즐기다 처음으로 사귀게된 사람에게 받은 책이다. 이젠 미술을 전공했던 그의 얼굴도 희미하고 왜 그를 좋아했었는지,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 잊었지만 그래도 책을 받던 순간의 기분과, 며칠 걸려 조금씩 읽었던 순간들의 느낌은 생생하다.

잔디를 깎던 소년의 여자친구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그가 그녀와 헤어진 후 인상이 좋아보인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았었는데....나 역시 단언하건데 그때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나이들어 간다는 것, 현명해져 간다는 것, 사람을 통해 배운다는 것의 그 아름다운 매직!

이런 소설 속 상상만큼 현실이 아름다운건 아니어서 이 나이에 다시 만나진다든가 하는 우연은 절대 사양하고 싶지만 이 책만은 지난 시간만큼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8-2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8-2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저도 잠깐 오래 전 다니던 대학 잔디밭에 잠시
궁둥이를 걸쳐봤습니다.^^

michelle 2004-08-2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세심함에 감사!!! 다정함에 다시 한번 감사!!
 

스탠다드 재즈곡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단편으로 이루어진 하나하나의 내용보다 전체적인 사랑에 대한 실패, 기억들에 대한 느낌이 전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전체가 다른 여자, 다른 사랑에 대한 기억들인데 하나의 같은 장소가 등장하곤 했다.
바로 우리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그 "스노브한 재즈바"였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 장소를 확실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 재즈바, 그 비밀스런 곳에 관한 이야기이다. 긴자의 뒷골목이라는 말도 있고, 록폰기의 종합빌딩 지하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 있다는 소문도 있다. 보스턴 대학 구내에 그 재즈바 간판이 조용하게 걸려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 

아마 류가 심하게 취했을때 만나곤 했던 술주정뱅이들의 파라다이스였겠지만, 우울하게 찾아간 어느날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그 재즈바, 다시 찾으려고 하면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그곳을 책에서 읽고 마치 신기루나, 유니콘의 존재처럼 막연히 찾아야 한다. 여기에 있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와 내 친구는 그당시 술과 음악을 사랑하던 인간들이어서 서울 유흥가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어딘가에 있을 스노브한 재즈바를 그리며....우리 꼭 가봐야할텐데라고 노래를 불렀다. --;; (결국 술주정이었지)

하여간, 결국 그 전설대로 그녀가 한번, 내가 한번 그 재즈바를 발견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만난 그녀가 흥분하며 홍대 근처에서 그 재즈바를 봤다는거다. 허름한 단층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그 재즈바가 분명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당장 학교수업을 재끼고...홍대로 출발했다. 주차장 골목 건너편이었는데 그당시엔 개발이 좀 덜 된 곳이었고 한참을 찾아도 결국 그 재즈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만취했던지 혹은 정말 그 재즈바가 맞았을거다) 두번째 발견한 곳은 이태원의 클럽이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즈음이었는데 회사가 이태원 근처에 있어 회사가 끝나면 주로 선배들과 자주 들르던 골목에 그 재즈바가 있었다. 술에 취해 이곳저곳을 헤매이다 몇몇이 사라지기도 하고 또 나타나기도 하던 그 마법의 골목에서 난 혼자 그 재즈바를 찾았다.

왜 혼자 재즈바에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일행과 헤어졌는지 혹은 누군가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날 공연 스케줄에 Quartet에 있는 걸 보고 말설임없이 들어갔던것 같다. 그 당시 라이브피를 내는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던 그들의 공연이 평일에 잡혀있는걸 보고 놀랐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몇잔을 마시고 공연을 보고  굉장한 편안함을 느끼며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두번다시 그곳을 찾아갈 수 없었다.

아직도 익숙한 거리에서 갑자기 낯선 재즈바 간판을 볼 때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새로 생겼을까? 아님 저곳이 그곳일까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여사 2004-10-1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태씨는 죽었을까?-,. -;

michelle 2004-10-1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테리어스하지? 오랜시간을 만나온 사람이 한번에 인생에서 없어지는 일이란...잘 지내고 있겠지. 곰탱이라 부르던 리트리버도 깁스 풀었겠구나. 예전에 --;;
 

워낙 카드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주변인들은 내가 정성들여 산 (거의 내용은 없고 서명만 적힌) 카드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거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늘 2-30장의 카드를 구입하고 그 카드가 다 떨어질 때 즈음이면 여행을 다시 떠나는 패턴을 반복하곤 했다.

페이퍼뮤지엄이라는 이 깜찍한 샵은 여행지 곳곳에서 만나곤 했다. 사실은 카드류와 깜찍한 소품을 파는 문구점에 불과한데 이름이 주는 느낌이 마치 미술관을 한바퀴 도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대부분 크리스마스카드나 생일카드로 보내버리고 이제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웹으로 보내기 위해 스캔해둔 몇가지 카드들을 소개!

  






친한 친구 teenypop의 결혼카드로 준 듯...

 

 

 

 


용도가 불분명해서 아직까지 사용못하고 있음.

 

 

 

 

 


겉이 아니라 안쪽에 그림이 그려져있는 카드


 

 

 

 

 

 




몬로버전과 엘비스 버전을 갖고 있었는데 엘비스는 누구한테 보냈더라?


 

 








태국에서 사온 Christmas in Thailand 시리즈였는데 슬리퍼신은 산타를 너무너무 사랑했었다.
  

 

 

 

 

 

 

 



친구 결혼카드로 그녀의 홈에 올렸음.  참고로 그녀가 얻은 남자와는 현실적 거리가 있음.


 

 

 

 

 

 



Edward Gorey 작품. 이 쿨한 카드 세트는 정말 음침해서 보낼데가 없다.

 

 

 














어버이날 아빠에게 드리려고 사왔으나....왠지 민망해서 시집갈 때 드리려고 놔두고 있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werpoll 2004-08-1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시집갈때!.. 죄송 ㅠㅠ; 저는 님이 남잔줄 알았다는;;

michelle 2004-08-1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왜일까를 생각해봤는데...그럴만하더군요. 글과 생활이 무쟈게 삭막하긴 하죠. 뭐 미안할것까지야...

starrysky 2004-08-1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드, 엽서, 편지지 등의 문구류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한때는 맘에 드는 건 닥치는 대로 사들였거든요. 근데 michelle님처럼 그걸 제 용도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쌓아두기만 하다 보니 아이들이 너무 숨막혀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날인가 마음을 비우고 주변에 다 날려보냈답니다. 음.. 내용은 없이 빈 종이로 마음만 담아서요. 흐흐.
그리고 이제는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위의 카드들을 보니 또 다시 스물스물 예전의 욕심들이.. 저 꽃그림 카드랑 태국 산타, You've Got Male이 특히 죽이네요. 아아, 하지만 안돼안돼. 이제 사모으는 건 그만~~ ㅠㅠ

michelle 2004-08-1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처럼 쓸데없는 쇼핑을 즐기는 부류신가보군요.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에 돈쓰는 재미가 쏠쏠하죠. 저 태국 크리스마스 카드 예쁘죠? 슬리퍼신은 산타 시리즈인데 아주 예뻐요. 아...여행가고픈데 빨리 스케줄이 안잡히는군요. 여행가면 님의 서재에 카드한장 보내드릴께요.

ownidefix 2004-09-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혼시절 종이광이었답니다.
지금은..^^;;;
그래도 아직 예쁜 포장지나 봉투를 보면 버리질 못한다는..나름의 지조를 지키고 있답니다.
아..왜 그렇게 종이봉투가 좋은건지..하여간 저도 종이 사는데 수억 날렸죠.
그런데..저도 남자라는 오해를 많이 받는데..동지입니다요..방가방가..

michelle 2004-09-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미혼시절? 아마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계신듯...종이광이란 말 멋지네요. ownidefix님 서재에는 '개와 남편이 자고있다' 이런 페이퍼까지 있는데 왜 오해를 할까요? 하여간 오랜만!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