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피아니스트
나는 잠이 많다. 이제껏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너무 많은 잠' 때문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릴 정도로. 그래도 가끔씩 새벽녘이면 선잠 때문에 뒤척일 때가 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어둠 속, 눈 멀뚱거리며 천장의 야광별 찾기 게임을 하는 것도 머쓱한 시간. 그럴 때 다시 잠들기용 수면제로 활용하는 것이 영화채널이다. 펼쳐지는 영상이 내 취향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대개 삼십분 정도가 지나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수면제가 어디 있겠는가.
프랑스 영화 <라 피아니스트>도 처음엔 수면용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헐리웃 영화 '피아니스트'와 제목은 같지만 전혀 별개의 영화이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은 새벽 수면제로 활용하려 했던 내 의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원하지 않아도 절로 주인공 에리카에게 빨려들고 만다.
겉으로 드러나는 에리카는 건조하고 냉정한 피아노 선생이다. 하지만 숨겨진 그녀의 욕망은 변태적이고, 대담하며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뭇 남성들의 시선에 무심한듯한 그녀 내면은 정작 욕망으로 끓어넘친다. 성인 영화관을 전전하는 포르노 광에다가, 연인들의 카섹스를 훔쳐보는 관음증이 있으며, 자신의 신체를 칼로 자해하는 파괴적 성향까지 있다.
그녀의 이러한 뒤틀린 성적 판타지는 평범하지 않은 모녀 관계에서 출발한다. 엄마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딸 에리카의 삶을 쥐락펴락한다. 딸의 일상을 체크하고, 옷차림을 간섭하며, 심지어 같은 침대를 사용하기를 강요한다. 엄마에게 딸은 신이자 악마이다. 에리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엄마표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녀에게 집은 엄마라는 스토커와 동거해야 하는 성가시고 불편한 암흑일 뿐이다.
불편부당한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에리카에게 출구는 있는가. 젊고, 잘 생기고, 진중한 제자 클래머의 등장으로 관객은 한시름 놓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정석대로라면 클래머의 역할은 에리카의 상처와 혼돈을 감싸 안는 것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영화는 보기좋게 순진한 관객의 희망을 묵살한다. 평범한 연인들의 낭만적인 행보를 기대한 클래머에게 자기 파괴적인 고립자인 에리카는 너무 벅찬 상대이다. 외적으로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위압적이며, 고고한 그녀에게 클래머는 서서히 지쳐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는 에리카를 감당하기엔 클래머의 영혼은 너무 젊고 설익었다.
'사슬에 묶으라구, 내 몸을 쓰러뜨려.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라구!' 억압된 그녀 내면의 반어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연인 클래머는 혐오감과 모멸감에 치를 떤다. 그녀에게 벗어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새디스트가 된다. 슬픔으로 어룽진 폭행을 하며 클래머는 절규한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클래머는 결코 그녀만의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밝음 보다는 어두움, 친근 보다는 혐오, 편함 보다는 불편함이 앞서는 이 영화에 '잠'을 헌납하고서라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노벨문학상을 탄 소설을 영화한 것이라서? 영화로 나온 것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보다는 훨씬 먼저니까 그런 선입견과는 무관하다. 아마 에리카로 상징되는, 사회적 여성성의 욕망이 어떻게 이지러지고, 왜곡되고, 분출될 수밖에 없는가를 명배우 이자벨 위뻬르가 잘 대변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망스럽게도 에리카의 종착역은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엄마와 클래머와 세상과 불화하던 에리카가 선택한 것은 소극적 자해라는 파국이었다. 억압의 본질인 세상을 향해 칼을 들이대도 시원찮을 판에 연약한 자신의 어깨를 선택한 것이다. 물살 세던 그녀 내면의 욕망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선택이다.
연주회를 마친 뒤 칼로 찌른 어깨를 감싸 쥐고, 에리카는 꼿꼿하게 거리를 나선다. 어디로? 그렇게도 벗어나고자 했던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암울하고 심연 같은 집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에리카를 그리면서 미카엘 하네케 감독과 작가 옐리네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까? 어찌할 수 없고, 모호하고 실망스러운 선택이야말로 결핍된 한살이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라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는 새벽이면 통증처럼 따라붙는 불면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 사진 위에서 차례로 배우 이자벨 위뻬르, 책 피아노 치는 여자, 라 피아니스트 포스터, 감독 미카엘 하네케, 원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