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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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5층짜리 아파트의 맨 위층에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말한다. 자신은 바깥 출입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항상 15층에 멈춤 표시가 있더란다.  '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오는 모양이죠?' 라고 말하는 이웃의 얼굴엔 불편한 끼가 역력하다. 당황스러웠다. 찔리는 게 없지 않았지만(논술 공부를 하러 몇몇이 드나들기는 한다.)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니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실은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9층에 살 때 이런 문제로 시비거는 이웃이 없었으니 15층인들 무에 그리 다를까 싶었던 것이다. 소심한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웃도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이중 자화상

  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웃아주머니가 기왕에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웃의 불편을 헤아려 최대한 배려를 하려 애썼을 것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길들임'에 관한 단상이 떠오른다. 저번 동네에서는 서로의 존재가 용인되고 인정되는 '길들여짐'의 단계에 있었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그들에게 나는 낯선 국외자일 뿐이다. 서로 길들인 적 없는 관계에서 서로 상냥하게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게 바쁜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맨 위층에 살면서 엘리베이이터를 남보다 자주 사용하는 새 입주자라면 터줏대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에서는 1층이나 3층은 몰라도, 타인의 아까운 시간을 축내는 15층에서 자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하면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동물도 없다. 서로 길들여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길들여진 사이는 얼마만큼의 인간적, 사회적 모순이 있어도 그 관계는 매끄럽게 유지된다. 그러한 현상을 나는 인간 본능의 이중성에서 찾는다. 그날 저녁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표현주의 화가 중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여타 작가들 못지 않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중 인간이 부딪힐 수 있는 한계상황을 포착한 이중자화상을 들여다보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경계와 호기심의 두 얼굴이 아래 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 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이중적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의 자화상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의 눈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한 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의 눈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것만 같다. 두 개의 얼굴은 이 세상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요지경 같은 곳이라 일깨워준다.  즉, 경계 없이 이완한 눈빛과 긴장하고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

 

  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그 다른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잠시 잠깐의 실수로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서운함의 정서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실레의 이중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될 수도 있으니까.  내 안에 숨 쉬는 이중 자화상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뵈는 어떤 사람이 가르쳐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산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슬그머니 빠져' 나온 산은 이제 고민하리라. 그 이웃에게 어떤 자화상을 그릴 것인가.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의 눈이 잘 조화된 그림이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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