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드러낼만한 취미가 없으니 그나마 책이라도 가까이 한다는데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정기구독하는 잡지를 빼고서라도 한 달에 몇 권씩 책을 사다보니 책은 쌓여만 간다. 찾던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몰라 허둥댈 때의 그 낭패감이란!   책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없는 책에게 화풀이까지 한다.

  굳은 맘먹고 '책 정리 잘 하는 법'이란 인터넷 검색을 시도한다. 가나다순 정렬법, 작가별 정리법, 장르별 분류법.... 별의별 방법이 다 있지만 내 눈에 띄는 것은 신간 위주 분류법이다. 그 경험자의 충고에 의하면 가장 최근에 산 책이 꽂히는 위치만 지정해주면 된다나. 그렇게 하면 미리 산 책은 자연스레 한 칸씩 밀려나니까 그 책을 산 계기나 시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책을 찾을 수 있을 거란다. 한데 그 방법도 썩 만족할만한 것은 못 된다. 바지런하지 못하니 금세 책장은 흐트러진다.

  책을 정리하는 가장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 책을 놓아주는 것이다. 불필요한 책 순서대로 과감하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이 쌓이는 이유는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 접속만 하면 클릭 하나만으로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할인까지 해주니 별 고민없이 책을 고른다. 발품을 팔던 시절에 비해 손쉬운 방법이다 보니 도서관에서 빌려 봐도 될 책까지 굳이 사게 된다.

  책은 왜 주인에게 머물러있는가?  읽히기 위해서다. 세로로 박힌 겉표지 제목만 사랑받기 위해서 책꽂이에 매달려있는 게 아니다. 주인이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거나, 반대로 자신 때문에 주인이 웃거나 울기를 원한다. 따뜻한 손길 한 번 안 주면서 흐뭇한 눈길만으로도 만족하라고?   책은 장식품 인형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쟁여놓는 것은 책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거창할 것도 없다. 사랑할 자신이 없는 책은 놓아주면 그 뿐이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은 진정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기꺼이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예의이다.

  책꽂이를 둘러보면 평생 손길 한 번 가지 않을 책들도 제법이다. 삶의 양식이 가득한 책꽂이를 보면 잠시 뿌듯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다시 꺼내 보게 될 책은 가진 책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사를 할 때마다 과감하게 책을 떠나보낸다. 내 품에서 홀대받던 책들은 더러는 파지로 실려나가 재생종이로 환생하거나  또 가끔은  나보다 훨씬 나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것이다. 껴안는 불편함보다는 내보내는 합리가 되려 책도 살리고 나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더러 아끼던 책을 떠나보낸 뒤, 후회한 적도 있다. 누군가가 빌려간 형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가 그랬고, 조카가 빼앗가간 김승희의 에세이 '33세의 팡세'도 그러했다. (김승희의 에세이는 절판되는 바람에 안타까웠는데 최근에 다시 나온 것을 보고 재깍 사들였다.) 그러나 이런 경운 극히 드물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구하기 어려운 책을 함부로 처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논외로 하자.)   장정일의 말처럼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순서대로 책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라는데 동의한다. 이런 책은 꼭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내게 온 책이 딱딱한 손님처럼 앉아있거나, 홀대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헐거운 마음이다보니 나는 책을 좀 더럽게 보는 편이다. 속지에는 나도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지렁이처럼 기어다니고, 밑줄과 동그라미가 갈피갈피마다 질펀한 것도 있으며, (그러고 보니 내게 사랑받는 책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책에게 미안하다!) 심지어 싸구려 커피자국으로 낙관을 찍은 것들도 있다. 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소유하려고 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관리하려들고 관리하려들면 피곤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가끔씩 십원짜리 동전이 든 돼지저금통을 보면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해 방랑하는 책이 연상될 때가 있다. 동전을 열심히 모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과감하게 이를 은행으로 가져가는 이는 드물다. 가자니 귀찮고,  남주자니 그래도 돈이라 아까워 그대로 방치한다. 꼭꼭 숨은 집안의 동전을 보면서도 새 동전 발행 비용이 수월찮게 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제 것에 대한 애착 유무와는 상관없이 발상의 전환 문제이다. 꼭 필요치 않은 것이라면 파지상에도 내놓고, 헌 책방에도 팔고, 이웃에게도 선물하며, 친구들과 교환도 하자.  이 모든 이야기는 책수집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분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책을 모아야 한다.  물론 손때 묻고, 사연 서러있고, 힘들게 모은 책들은 끝까지 사수하라.

  단순히 내 것이라는 연민 때문에, 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라면 책의 소유에서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진정한 요리사는 주방기구를 나열하지 않고, 속 깊은 화가는 붓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게 왔다고 다 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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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버리는 일, 책을 소유하는 일. 둘 다 난젭니다.
활자에 집착하는 병에 기인한거지요^^

다크아이즈 2006-10-1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맞아요. 활자에 집착하는 병... 분명 이것도 질환으로 의심해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