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쁜 것과 추한 것은 하나
연말이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 모든 자리가 내게 맞춤할 리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있고, 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은 가고 싶은 곳과 가야만 하는 곳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내 마음 한 끝에 달렸다. 굳이 구별하자면 내 마음이 그 둘의 상태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석가의 유명 제자 중에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이라고도 하는데 ‘환희,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다. 외모가 빼어나고 설법이 깊은 그를 여자들이 좋아했다. 백정의 딸인 프라크리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난이 탁발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인들의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프라크리티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자신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아난의 출중한 외모와 자비심에 반한 그녀는 매일 탁발 나오는 아난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 아난이 왜 날마다 자신을 기다리느냐고 프라크리티에게 물었다. 스님 눈이 무척 예뻐서 그렇다고 그녀가 답했다. 아난은 주저 없이 자신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그녀에게 주었다.
우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본 것의 실체는 알고 보면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아니 시신경과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난의 파헤쳐진 눈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추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는 똥의 실체 역시 똥 자체일 뿐이다. 어쩜 거름으로 거듭나 푸성귀 맛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똥의 실체일 수도 있다. 사물과 대상은 불변의 성격으로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적당한 상표를 붙이는 건 ‘내 마음’이다. 있고 없고, 예쁘고 추하고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아난다의 눈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
무엇이든 맘먹기에 달렸다. 하나인 실체를 두고 어떤 맘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게 우리가 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맘먹기의 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거듭나라고 연말연시 모임은 해마다 되풀이 되나 보다.
2. 꽃시 한 권
언제 밥 한 번 먹자. 흔히 내뱉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우리는 그런 말로 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뇌에서 걸러 낼 틈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의 대부분은 흰소리가 되고 만다. 그 속뜻은 ‘너와 밥 먹을 마음은 진심이지만 지금 당장이나 혹은 내일은 곤란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밥 먹을 그 ‘언제’가 언제인지를 재야 사회학자가 ‘언제’ 발표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겠나.
밥 한 번 먹자는 그 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분명 들어있다. 하지만 자기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성 멘트인 것도 사실이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금세 잊어도 좋을 체면치례용 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가 애매하게 내뱉은 그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불쾌해하거나 맘 상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 ‘언제’의 약속일지라도 냉랭한 무관심보다는 한결 낫기 때문이다.
‘언제’ 꽃에 관한 모음시 한 권을 주시겠다는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그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처럼 상투적 멘트로 이해했던 것이다. 우연히 시인을 만났을 때 한 권 남은 시집이라며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많이 감동했다. 시인으로선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본으로 손수 제작한 맑고 투명한 꽃시집을 오래 쓰다듬는다. 글자 하나, 레이아웃 하나 전문 편집자처럼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꽃에 관한 시를 모으셨을까, 바쁜 가운데 언제 이토록 정갈하게 갈무리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흐른 뒤 내 머리와 가슴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꽃 같은 삶, 얼마나 얕은꾀와 무신경한 말들로 타인에게 내 겸양을 구걸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내 체면과 안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보험성 멘트를 날렸던가. 공허한 그 말 대신 실천할 수 있는 말들의 꽃을 피우라고 이렇게 눈시울 적시는『꽃시』는 내게 왔도다!
*꽃시는 개인 편집본이라 시중에 없다. 최근 두 달 새 사들인 시집으로 대신^^*
3.같은 꽃을 보고서도
그녀는 예뻤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 소리를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어느 날 낯선 옷가게에 들렀다. 웬일인지 주인은 그녀더러 예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늘 들어오던 말을 못 듣게 되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지? 오늘 내 화장이 이상했나? 간만에 쓴 털모자가 안 어울리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신이 왜 옷가게에 들어갔는지조차 잊은 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하고 한심한 경험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해가 간다. 예쁜 사람들은 자신이 예쁜 줄을 안다. 해서 익숙해진 예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못 듣게 되면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나 싶어 그때부터 뒤죽박죽 엉망인 심사가 된다. 어찌 모든 이로부터 예쁘단 소리를 듣고 살겠는가. 말수가 적거나, 무심하거나, 혹은 미의 기준이 남다른 옷가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잘못 없는 그들 앞에 저 혼자 흔들린 심리상태를 보상하라고 할 수는 없다.
‘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인정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번민한다. 요즘 인기 있는 법륜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대개 이런 문제들로 고민한다. 인정받지 못해 내면과 갈등하는 소시민에게 스님은 이런 요지로 답한다. ‘내 존재를 제대로 알면 칭찬에 우쭐댈 일도 없고 비난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 상대의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걸 알면 내가 그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꽃 보고도 서로 다른 표현을 하는데 각자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하는 말에 내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이런 명답을 새기다보면 예쁘단 말 듣지 않아도,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눈총 받아도 의연해질 수 있다. 내 심지 곧고 굳은 게 상대 감정보다 우선이다.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내면을 갉아먹는 것도 없다.
4. 삶의 본질은 부조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는 게 더 많다. 내 의지대로 될 수만 있다면 살맛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위험한 발상도 없다. 천하가 제 것인 줄 알고 휘두르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저 높은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상사 잘잘한 것에서도 내 뜻보다 상황에 휘둘리는 사안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나라의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된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선왕이 제후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이웃한 노나라와 조나라는 술을 바치는 게 관례였다. 노나라 술은 매우 묽었고, 조나라 술은 무척 진했다. 조나라가 좋은 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에게는 선물꾸러미 하나 주지 않자 초나라의 담당 관리는 앙심을 품었다. 노나라의 묽은 술을 조나라의 것이라고 바꿔서 선왕에게 바쳤다. 노여움이 폭발한 선왕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공격했다.
노나라로서는 당황스럽고, 조나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초나라 선왕을 향해 외쳤다. 쑥대밭이 된 조나라 백성의 자존심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초나라 술 관리는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양심 상 상처 받은 한단 사람들을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꿔 애초에 묽은 술을 제조한 노나라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구경꾼 놀이가 없어질까 심심하던 초나라 사람들은 술 관리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현자가 나타났다. ‘세상일은 노나라나 조나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노라. 막강대국 초나라 뜻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 세상일은 되는 대로 되는 것이노라.’ - 이 부분은 내 맘대로 각색했도다!!
이 고사를 현대 철학용어로 빗대면 ‘부조리’ 쯤이 될 것이다. 길 가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을 수도 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의해 ‘들었다 놨다’ 요동질을 당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희망의 향연은 내 의지지만 상황의 심술은 신의 장난이다. 신이 즐기는 부조리라는 개그콘서트 덕에 인간은 그나마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5. 버드나무껍질 반지
『주석달린 월든』(현대문학, 2011)을 산 건 행운이다. (다 오렌님 덕분이다.) 별다른 해설 없는 숱한『월든』중의 한 권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읽어야한다는 강박이 먼저 작용했던 그때는 그 깊이나 가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과 벗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때 경이로웠던 기록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결해야할 숙제처럼 대하느라 그 진가를 미처 몰라봤다.
소로처럼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자급자족할 맘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고 내면을 살찌우는 기록물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가 ‘문학적 성과’로 출렁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촘촘한 일상을 풍부한 관찰력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구체적이고 섬세해 목이 멘다.
‘집에 돌아오면 방문객이 들렀다 남긴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관, 혹은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써놓은 이름이다. 좀처럼 숲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들을 취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반지를 만들어 내 탁자에 올려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189쪽)’
청년 소로는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 년여의 자급생활을 하면서 기록물을 남겼다. 숲으로 가, 온전히 제 뜻에 살며 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소중한 삶, 제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독자로서는 거창해 뵈는 그 소명의식보다 기록물이 주는 잔잔한 감동 덕에 소로가 위대해 보인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그는 유유자적의 ‘팔자 좋음’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굽은 잔가지’나 ‘짓눌린 잔디’, ‘한 움큼 뽑힌 풀’이나 ‘은은히 남은 시가 담배향’으로 짐작하는 서정적 붓대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시 보일 수밖에.
삶과 사색을 실천하는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빛나기란 쉽지 않다. 구구절절 마음 끄는 문장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군들 오두막 지으러 제 마음의 숲으로 떠나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