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소가 필요해
얼치기 주부로 살다보니 집안일은 뭐든지 대충이다. 지저분해진 집을 보며 남편은 지나가듯 한 말씀 해주신다! ‘우리집에 손님 올 때 안 됐나?’ 방문객이 있어야 그나마 정리정돈 된 집안을 볼 수 있다는 남편식 완곡어법이다. 해서 남편은 누군가 집에 놀러 온다고 하면 반색을 한다.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며칠은 쾌적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멀리 사는 지인들과 경주 벚꽃놀이를 하기로 했다. 내친 김에 가까운 우리집에서 커피 타임도 갖기로 했다. 사람 오는 건 좋은데 청소가 문제다. 냉장고에는 뭔가 채워져 있긴 한데 실속(먹을거리)이 없고, 거실은 허전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실은 먼지투성이다. 방이며, 화장실도 다를 바 없다. 필수품은 여기저기 널브러져있고, 제때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는 쌓여만 있다. 손 댈 엄두도 나지 않고, 치울 자신도 없다. 불쌍한 척, 힘든 척해가며 남편을 청소 현장으로 초대한다.
그렇다고 너털웃음 지으며 묵묵히 청소해줄 남편이 아니다. 청소기 손잡이를 잡는 것이 큰 시혜라도 베푸는 것인 양, 의기양양 잔소리도 많다. 제대로 바닥을 치우지 않아 청소기 미는 손맛이 안 난다나. 평소 말이 없는 남편인데, 청소할 때만큼은 말이 많아진다. 자칭 주부 점수 과락인 걸 인정하지만 좀 심한 잔소리다 싶다. 대거리할 만한 명분이 없어 귀마개를 껴 못들은 척 꾹 참는다. 듣기 싫은 노래 끝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는 부엌 청소만 열심히 한다. 마음 잠시 불편하고 몸 편한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잔소리는 됫박으로 안았지만 깨끗해진 집안을 보니 참기를 잘했다 싶다. 적어도 사흘은 이 쾌적한 상태가 유지되리라. 그 안에 못 부른 친구들을 초대해 차 한 잔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날려야겠다. 오늘의 핵심, 잔소리 듣기 싫으면 평소에 치우고 살자. 아니, 그게 아니다. 잔소리 좀 들어도 함께 하는 청소는 유용한 것. 금세 어지럽혀지더라도, 집 치우고 친구보고, 밥 안 먹고도 (잔소리로) 배부르니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고 아닌가.
*청소는 어여쁜 알라디너들을 맞기 위한 것 -
2. 데이지의 노래
봄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꽃집에 들른 일이었다. 겨우내 방치했던 빈 화분에다 물오른 아젤리아며,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 서양란을 심었다.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는 일년생 꽃인 데이지 모종을 옮겨왔다. 흰색, 연붉은색, 홍자색 등 다양한 색깔의 데이지는 볼수록 정겹고 소박하다. 빈 화분을 채운다는 건 명분일 뿐, 내가 꽃집을 찾은 진짜 이유는 이런 데이지를 맘껏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언제부턴가 내 마음의 꽃이 되었다. 잎은 낮게 깔리고, 줄기는 곧게 뻗고, 꽃받침은 둥근 꽃 아래 숨어 있다. 꽃과 주변의 경계가 뚜렷해 깨끗하게 피고 진다. 꽃과 잎과 꽃받침이 마구 뒤섞여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팬지 같은 봄꽃에 비해 깔끔하고 소담스럽다.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들고 남’의 경계가 확실하다. 잎은 잎이요, 꽃은 꽃인 채로 제 소박함을 드러내는 꽃이 데이지다.
좋아하는 꽃이다 보니 위대한 개츠비의 마음을 앗아간 못된 여주인공 이름이 데이지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리곤 했다. 꽃에 얽힌 전설 때문에 피츠 제럴드는 데이지를 주인공 이름으로 차용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숲의 님프인 유부녀 베리디스는 오매불망 그녀만을 원하던 과수원의 신과 남편 사이에서 방황했다. ‘차라리 꽃이나 되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랐는데, 소원대로 호숫가에서 데이지꽃으로 피어났다. 으뜸 미녀가 환생한 꽃이니 데이지의 꽃말이 ‘미인’인 것은 당연하겠다. 또, 전쟁미망인이 된 여자가 유복자인 아들마저 병으로 잃게 되자 소녀들이 ‘데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꽃으로 위로해줬다는 전설도 있다.
두 전설 모두 기품과 비장미가 있으면서도 담백하고 깔끔한 데이지의 정서와 어울린다. 뚜렷한 경계가 있으면서 소박한 기품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 안에서 이상화된 그 데이지는 잠시 접어두고, 데이지의 꽃말에 ‘희망과 평화’도 있다니 그 말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이상이든 위안이든 어쨌거나 나는 봄이면 데이지를 보러 꽃집으로 달려간다.
3. 고통을 보는 자세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이 언제나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유흥거리로 전락해 이미지 조작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전쟁터의 육체적 고통이 가십거리가 되고,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음을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을 통해 경고한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우리는 타인의 시련과 고통이 담긴 피사체를 유희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본다. 왜냐면 그것들은 나와 먼, 한 편의 영화 같은 볼거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인간 고통의 대표적 현장인 전쟁의 불필요성을 강조한다.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것은 남성성의 욕망 속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손택은 보고 있다. 전쟁의 참사 현장을 찍은 어떤 사진들은 사실성을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진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마저도 소비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극적 전쟁 이미지들은 관음증적인 소비 주체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
로버트 카파 같은 유명 전쟁 종군 기자도 사진 이미지를 조작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손택은 말한다. 전쟁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특히 아군의 육체적 고통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한몫한다. 갈기갈기 찢기고, 피 흘리는 피사체가 내 편이라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지상정의 정서를 이용하는 쪽은 다름 아닌 집권자들이다. 국민들의 순수한 분노야말로 집권 이데올로기적 연대에 큰 보탬이 된다. 이런 순수한 분노야말로 무지하고 천박한 것임을 손택은 통찰한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단순 욕망이 영혼을 갉아 먹는 동안, 우리는 전쟁 참상의 심각성을 놓쳐버리게 된다. 모든 전쟁은 모든 고통을 양산할 뿐이다. 세상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소통을 모색해나가려는 시도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전쟁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불필요하다고 수잔은 낮은 목소리로 역설한다.
4. 열하일기 만나기 좋은 날
박지원의『열하일기』는 다양한 버전의 해설서로 먼저 만나는 게 이해하기가 쉽다. 맛보기 해설서로는 고미숙의『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추천할 만하다. 그린비 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된 이래 개정판을 거듭하면서 꾸준히 읽힌다. 연암의 삶과 열하일기 둘 다에 관해서 쉽게 풀어썼다. 한마디로 시대를 조롱하고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한 자유인 박지원을 재조명하는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하일기를 웃음과 역설이 그치지 않는 한 판의 마당놀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유목, 리좀, 클리나멘, 재영토화 등의 서양 철학 개념을 열하일기와 접목해 알기 쉽게 풀어놓는다. 말하자면 저자는 현대 철학이론으로 근대의 매력남이었던 박지원을 만나게 해준다. 열하일기 광팬인 저자는 연암의 빛나는 유머와 뜨거운 패러독스를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 수 있을까만 고민한 것 같다. 그 고민의 산물로 작가는 고전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저자는 연암의 사유를 경쾌하면서도 깊게 중첩시킨다. 연암의 기질과 세계관, 문체반정의 의미, 연암의 호기심, 연암의 유머 코드, 연암의 철학적 사유 등을 차례로 언급한다. 부록의 재미도 지나칠 수 없는데 연암의 일정을 지도로 간략하게 보여주고, 열하일기의 등장인물을 코믹하게 소개하는 ‘캐리커처’도 싣고 있다. 곳곳에 배치된 웃음과 역설 때문에 틀에 박힌 여행기가 아니라 통쾌한 여행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행원인 하인 장복과 창대 두 커플이 보여주는 순진한 기행, 주변 지식인들에 대한 조롱, 중국 현지인들과 나눈 우정의 필담 등을 통해 당대 주류 담론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웃음과 도전이 넘쳐나는 한 자유인의 유쾌한 행보를 상상하며 작가 고미숙은 박지원의 광팬이 되었을 것이다. 시절이 하 수상한 요즘이야말로 유쾌한 웃음과 역설이 필요한 때이다. 더디게 변하던 조선 양반 사회에서 시대를 앞서 자유롭게 살다간 한 지식인의 발자취를 안내 받고 싶으면 고미숙의 이 열하일기 입문서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