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절 예방 교육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린 유명 배우가 학위 반납을 하겠다고 해서 화제다. 쿨하게 인정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걸 보고 언론에서는 신선한 충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배우로서 난 사람인데 학위 하나 반납했기로서니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거나 밥벌이에 지장이 있겠는가. 이리 빼고 저리 변명하는 다른 혐의자들에 비해 즉각적이고도 현명한 대처를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다고 잘못이 잘못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표절이 개인만의 잘못일까. 우리나라만큼 어릴 때부터 도덕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나라도 없다. 인사 잘해라, 어른 공경해라, 자리 양보해라, 나라에 충성해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등등 도덕 교육의 절반 이상은 예절이나 충효의 덕목에 발목 잡혀 있다. 오죽하면 이러한 우리 도덕 교육의 현주소를 빗대 김상봉 교수는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라거나 ‘노예 도덕’이라고 일갈했겠는가. 그러면서도 정작 표절에 관한 교육은 받아 본 적이 없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그들은 ‘표절은 범법 행위’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유치원부터 철저하게 가르친다. 한 문구, 한 소절을 쓰면서도 남의 것인지 아닌지 습관적으로 점검한다. 따 온 문장의 경우 ‘인용’이나 ‘각주’는 필수다. 만약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왕따를 감수해야 한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표절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왔는데, 범법자의 길을 간다니 주변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반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우리 교육의 어떤 커리큘럼 카테고리에도 표절에 관한 것은 들어 있지 않다. 이럴진대 누가 개별자에게만 표절의 혐의를 씌울 수 있을 것인가. 대학원 논문 전체를 대상으로 엄격하게 검증한다면 표절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경우는 드물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표절의 부당성에 대해 점진적으로 교육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과도한 파시즘적 교육 항목이 줄어든 자리에 표절에 관한 경종 같은 가르침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무지가 낳은 표절의 가시방석에서 온 국민이 자유로워졌으면.
2. 진정한 이력서
타당한 증거로서 효력을 가지려면 문서로서의 발자취가 있어야 한다. 학교나 회사가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중요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로만 백 번 ‘나 괜찮은 사람이니 뽑아주시오’ 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메아리가 된다. 효율성과 객관성을 증거하기엔 서류보다 나은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조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합리적인 사람 뽑기 방식이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해줄 문서 하나를 위해 온몸과 마음을 쏟는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대학원을 가고, 영어 공인 점수를 높이기 위해 학원을 드나들며, 그럴듯한 현장 스펙을 쌓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모든 것들은 문서화된 내 자료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졸업반인 딸아이도 자기소개서 준비 때문에 오는 봄이 부담스럽단다.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부쩍 기숙사에서 집으로 오는 주기가 당겨졌다. 집밥으로 충전을 하고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젊은이들의 하루를 보면서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만큼 허울 좋은 겉치레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봉사 단체에서 한 청년에게 시쳇말로 꽂혔던 적이 있다. 갓 성인의 문턱을 넘은 앳된 그는 재바른 듯 침착한데다 야무지고 상냥했다.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했다. 신문을 나르고, 차를 타고, 편지를 정리하는 단순한 봉사를 하는 것뿐인데도 무슨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처럼 성실하게 임했다. 작고 섬세한 행동으로 신선한 주의를 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력이 될 정도였다. 문서화 되지 않은 진정성으로 자기증명을 해보이는 것이었다.
자기소개서나 이력서가 한 사람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 섬세한 몸짓 하나가 훨씬 많은 이력을 보여준다. 진실로 믿을 만한 이력서는 그런 것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간과한 채 살아간다. 그 견고한 이력이 무시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풍랑 앞에서, 제 이력서를 채울 스펙을 위해 내 딸 네 딸 할 것 없이 그들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3. 프라하의 요네하라 마리
쉽게 썼는데 깊게 읽히는 작품을 만나면 잠 못 이룬다. 요네하라 마리의『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천부적 재능을 갖춘 이가 독서력을 겸비했을 때 어떤 매혹적인 글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의 좋은 예가 된다. 빼어난 유머 감각, 섬세한 관찰력, 놀라운 기억력의 조합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참신하기 그지없다.
소설체 문법을 차용한 이 논픽션은 단숨에 읽힌다. 1950년대 말 공산당 국제 교류기관의 편집자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던 소녀 마리의 추억담이 주요 내용이다. 각 나라 공산당 핵심 간부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학교는 다국적 소수정예 멤버를 자랑한다. 인민의 평등과 해방을 위해 모였다지만 특권의식, 패권주의, 계급의식 등 부모 세대가 안고 있는 모순을 어린 마리와 친구들은 깊이 통찰하게 된다.
레닌에 관한 전기 영화를 보면서 마리 친구인 리차는 ‘레닌은 꽤나 잘살았나봐’라고 속삭인다.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만 부각하다 보니 부르주아였던 생활상까지는 조작하지 못한 것을 어린 소녀의 눈은 잡아낸다. 레닌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소작료를 받아 생활한 지주 출신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다. 강의록은 연습장에 썼다가 노트에다 다시 정서해야 한다. ‘한 번 쓴 글은 도끼로도 못 깎아’내는 게 그들의 철칙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연필로 쓴 것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건 그들에겐 무례한 것으로 통했다. 지울 수 있는 것, 변화되는 것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일까.
마리 여사의 경험담은 ‘다름’에 대한 수용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이국 먼 동유럽의 교육 방식과 문화는 일본의 그것과 다르며, 그들 유럽 각각의 역사나 민족의식 역시 고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것을 넘어 다른 것을 접한 뒤에야 자기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와 시대의식이 녹아 있는 그녀의 프라하 시절 추억담은 나와 타자를 둘러싼 삶의 여러 방식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자극제가 되어준다.
4. 착하다는 것
착한 사람은 사랑을 정의하기에 가장 적절한 유형이다. 왜냐면 착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넘어서는 타자라는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란 말이 성립된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수렴되지 못하는 일방적 감정은 욕망이고, 나를 향한 사랑, 즉 자기애는 한낱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분명 사랑의 대상은 타자인데, 몹쓸 사랑의 속성은 욕망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제 인격적 호의를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가 몸에 밴 경우 우리는 ‘착하다’고 한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인 친구 세 명이 시장엘 갔다 치자. 마침 늙은호박 세 덩이가 떨이로 나와 있다. 한 친구는 작은 애호박 하나가 덤으로 붙은 것을, 다른 친구는 눈썰미를 발휘해 알뜰살뜰 따진 것을, 마지막 친구는 두 친구가 고르고 난 남은 것을 선택한다. 차례대로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
애호박 덤이 붙은 호박을 산 친구는 그 속을 갈랐을 때 안이 다 썩어 있었다. 요모조모 따져가며 산 친구는 똑 소리 나는 살림꾼이긴 한데 인간미는 없다. 마지막 남은 것을 고른 이의 호박은 제일 작았겠지만 맘 만은 컸음에 틀림없다. 앞의 두 친구가 호박이라는 ‘물건’에 시선을 뒀다면 착한 친구는 타자라는 ‘관계’에 눈길을 줬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타자에게 선의의 시선이 먼저 가는 사람, 즉 착한 사람은 관계 지향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세상의 온도는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착함의 숭고함이 평가절하 되는 나날인 것을 착한 사람들조차 느끼는 것일까. 요즘엔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례일 정도로 ‘영리한 현명함’을 강요하는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닌지. 착하기보다는 현명하기를 학습시키는 사회가 바른 것인지 헛갈리기만 한다.
5. 간헐적 단식
인체의 신비는 어디까지일까. 한 방송에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간헐적 단식’이란 생소한 방식을 전해주고 있다. 그간 서구에서는 다이어트나 건강 유지 방법으로 활용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간헐적 단식이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16~24시간 정도의 배고픈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삼 시 세 때 규칙적인 식습관을 갖는 것이 건강의 척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식생활 패턴은 우리 몸의 건강을 좀 더 잘 유지시켜 줄 수 있음을 조심스레 증명하고 있다. 공복이 주는 식습관 메커니즘은 단순한 다이어트만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당뇨병, 치매, 암 등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수명까지 연장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임상에 있는 의사들을 상대로 검증한 바에 의하면 배가 고프면 장수 유전자가 활성화 되고, 손상된 세포를 치유하는 시스템도 가동되며, 노화 속도를 늦추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식문화 역사를 더듬어보면 앞의 얘기들이 일견 타당하게 와닿는다. 유구한 인간 역사에서 먹을 것이 풍부했던 시기는 최근 백 년 남짓이란다. 우리 몸은 굶주린 상태에서 견딜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과학적 근거를 현대인에게 적용한 방법이 간헐적 단식인 셈이다. 하루 두 끼도 겨우 먹던 인류가 이제 과식과 투쟁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과식이 인체에 무해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연출될 필요도 없다. 모든 현대질병의 원인 중 으뜸이 ‘너무 먹어서 탈’인 지경에 이르다 보니 이런 프로그램에까지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간헐적 단식의 과학적 실증 유무가 결론이 나기까지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참에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팔랑귀를 가진 나 같은 이는 간헐적 단식을 시도해 봐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에 초연해도 되는 대부분의 건강한 신체를 지닌 사람들까지 이런 의견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것. 우리는 그간 쏟아지는 다이어트 비법과 건강법에 너무 자주 신체를 저당 잡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