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그네를 탔어

 

  몽환적이며 비약적인 문체로,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얘기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헤르타 뮐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녀가 쓴『숨그네』를 읽기 전까지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끝 간 데 없는 고통과 헤어날 수 없는 허기의 순간을 저토록 낯선 말들의 조합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군가 이 책이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고, 누군가 이 책이 좋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 이 책을 소장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물론, 이라며 망설이지 않고 답하겠다. 불친절하고, 에두르고, 솟구치고, 앞서가는 문장들의 너울에 독자는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허공만큼 넓은 길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수용소에 붙들려간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취재기적 소설은 서늘한 산문시로 읽힌다. 사실적 경험담이 시적, 몽환적 기법의 옷을 빌려 입었기에 그 아우라가 제대로 발현되는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아프다고, 배고픔을 배고프다고 호소하는 건 진부하다. 아픔이 '숨그네'가 되고 허기가 ‘배고픈 천사’가 되는 메타포를 거치고서야 낯선 언어들이 펼치는 정직한 실존은 되살아난다.

 

 

  수용소 생활의 조각보 같은 일상이 구체적 이미지로 승화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난해하게 읽히는 게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작가에게만 지울 수도 없다. 극한의 생존 조건에서 굶주림과 수치심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는 온전한 형태의 문장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갇히고 길들여진 자의 통점이 확산되면 당연히 그 의식의 심연은 발작을 일으키고, 그 때의 글은 불친절한 수사나 애매한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 수사나 덫이 낳은 언어유희가 쉼없이 독자들을 끌었다 놓았다 하는 데, 묘한 그 이끌림 덕에 ‘헤르타 뮐러’ 또는 ‘숨그네’는 오래 독서계에 남는 대명사가 될 것이다.

 

 

 

    

2. 다를 뿐 잘못은 아냐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안녕하세요’라는 토크 쇼가 있다. 전국의 고민남녀들이 출연해 자신의 고충을 방청객들에게 호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때로는 코믹하게 더러는 진지하게 풀어놓는 사연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토록 공감되는 고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의 출연자 한 명은 특별했다. 전형적인 한민족 핏줄이건만 선천적으로 파란눈으로 태어나 놀림 받은 기억이 있는 젊은 엄마가 나왔다. 그녀의 어린 딸도 파란 눈동자를 가졌는데 벌써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불쾌한 경험이 있는 출연자로서는 커가는 딸이 받을 상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모녀가 뿜어내는 파란눈빛은 신비한 인형의 그것처럼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지만 특이하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예의 출연자보다 더한 신체적 ‘다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희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알비노 유전 현상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파란눈의 모녀와 마찬가지로 그건 질병도 전염병도 아니었다. 다만 남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짓궂은 애들에게 수모를 당해야만 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나와 다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은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다수가, 특수하고 특별한 소수를 홀대해도 괜찮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양인이 파란눈을 가졌으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동양인이 파란눈으로 태어났으면 무시의 대상이어도 좋을 근거는 없다. 다수라는 강압의 눈이 소수라는 연약한 눈을 제압할 이유 역시 없다. 그 무모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깨쳐주는 것은 우리 어른이 할 일이다. 모르고 해악을 끼치는 어린 영혼의 모든 잘못은 우리 기성의 책임이다.

 

 

 

  

3. 교양의 목적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된 흐름이 안나의 외도와 파국이라 할지라도 그건 작가가 설계한 미끼일 뿐, 실제 봐야할 게 너무 많아 완벽하게 읽어내기엔 벅찬 소설이다. 백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간 군상의 다양한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작가적 분신이 가장 많이 투영된 듯한 인물이 레빈인데 어떤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회적이고 자유주의자인 유부남 오블론스키와 시골풍에다 소심한 귀족 노총각인 레빈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태생적 생각이 다른 둘은 행동 양식도 다르다. 레빈의 생각은 이렇다. 부르주아들의 시간 보내기용 먹거리에 지나지 않는 굴보다는 치즈 얹은 흰 빵이 일용할 양식으로는 낫다. 시골에서는 일 하기 위해서 빨리 배를 채우려 하는데, 이곳 식당에서는 최대한 더디게 배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손톱을 기르고, 소맷부리에 접시만한 단추를 달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기만 하다. 시골 사람들에게 옷소매는 걷어 부치기 위해 있고, 손톱도 일하기 편하기 위해서는 짧게 자르는 게 낫다. 식당의 온갖 장식품도 충만한 영혼을 더럽히는 것 같고, 머리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레빈에게는 야만스럽게만 다가온다.

 

 

  그때 도회 남자 오블론스키가 나선다. 모든 교양의 목적은 쾌락에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쾌락적 충만의 실용성을 충고하는 오블론스키에게 레빈은 조금 마음이 열린다. 레빈이 모스크바에 온 목적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양심적 쾌락, 즉 충분한 교양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온갖 자기혐오와 자기경멸을 넘어선 체험이어야 하지 고지식함이나 고상함에 머무는 망설임이어서는 안 된다. 레빈이 그 쾌락적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를 상상하며 읽는 것도 협의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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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3-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빼어난 글을 쓰시다니... 기죽고 갑니다.(정말로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0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 말을 믿고 싶지만 전 지금 그로키 상태예요^^*
글쓰기의 괴로움이 이다진데 왜 써야 하는지요?
즐겁지 않은 일은 하기 싫은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답 없는 이 짓을 해야만합니다. 페크 언닌 봄빛이 곱기만을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3-03-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오랜만의 글 반가워요. 저도 뜸했었지요. 이제 봄기운 제대로 느껴지네요. 레빈이 사랑의 궁극적 목표인 쾌락을 어떻게 넘고넘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는 일ᆢ재미있으면서도 작가가 던진 무엇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퍼뜩 드네요. 독서수업으로 벌써 다 읽으신 거에요? 소설 독법이 역시 다르다 느끼며 다시 한번 감탄과 윙크 보내요~~~ 숨그네는 찜만 해두고 미룬 책인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드는 지름 페이퍼야요ㅎㅎ 봄날 해피하게 보내고 계신 거죠^^

다크아이즈 2013-03-22 18:08   좋아요 0 | URL
프레님, 벌써 다 읽었을 리가? 페이퍼 내용 대로 1권만 읽은 것 중 단상이에요. 어제 개봉했잖아요. 조조로 가서 봤어요. 우리 독서팀 외에는 별로 사람이 없더라는... 길어야 일주일 예정으로 상영한대요. 프레님도 안 보셨으면 얼른 보시어요. 거긴 대도시니 좀 더 오래 갈 수도 있겠네요.^^*
프레님 이쁜 모습 눈에 아른거리는데 제 맘은 여전히 겨울... 징징거려도 이해해주세요.^^*

프레이야 2013-03-26 08:02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개봉일에 가서 봤지요.
징징대면서 서로 토닥토닥해요^^

그렇게혜윰 2013-03-1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그네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10   좋아요 0 | URL
책만님 반갑습니다.
밑줄 긋고 싶은 말들 때문에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 글쓰기 방식은 저랑 코드가 안 맞아서 닮고 싶지는 않았다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저도 님께 놀러 갈게요.^^*

Shining 2013-03-2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숨그네ㅠ 전 정말 어려웠어요 이 책, 그리고 헤르타 뮐러. 쉽게 읽히지도 즐겁지도 쉬이 좋지도 않았지만, 전 그녀처럼 글을 쓸 수 없고 사실 쓰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웃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탄하고 감사했던, 그런 책이었어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13   좋아요 0 | URL
앗, 고매한 샤이닝님이시다. 에헤라 디여~~ 로또 당첨 된 것만큼일리야(!)는 아니지만 귀한 나들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처럼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부분부분 밑줄 긋기 좋은 책이었고,
제 문법 스타일과는 안 맞아서 괜찮은 책인지는 의문이 든다는 페이퍼를 쓴 거지요.
닮고 싶진 않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글쓰기라고 할까요^^*

2013-03-20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2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