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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1. 약국 - 간단 줄거리
헨리 키터리지는 마을 약사. 일을 도와주던 그레인지 부인이 자다가 급사하자 새 여직원 데니즈를 고용한다. 그녀 남편 이름도 공교롭게도 헨리다. 젊은 부인 데니즈를 위해 남편 헨리는 약국까지 태워준다. 약사 헨리 키터리지는 그들과도 사이가 좋고 맘 속 깊이 데니즈를 챙기고 연민한다. 부인 올리브 키터리지는 30여 년 이상 수학 선생을 하고 있다. 냉담하고 부정적이며 데면데면한 성격이다. 그들 사이엔 크리스란 아들이 있다.
의약품 배달을 하는 소년 제리 매카시는 데니즈의 충고를 받아들여 방송대학 공부를 성실히 한다. 헨리 키터리지는 한결 같다. 데니즈에 대한 환한 시선을 버리지 않는다. 데니즈 남편의 불알친구 토니 쿠지오가 데니즈의 남편 헨리 시보도를 사슴으로 오인해서 사냥총으로 죽이고 만다. 젊은 과부가 된 데니즈를 헨리는 여전히 연민하고 사랑한다. 부인 올리브 키터리지는 성격대로 ‘과부 위로꾼’이라며 헨리를 향해 비아냥댄다.
제리 매카시의 청혼을 받아들여 데니즈는 약국을 떠난다. 세월이 흘러 약국 자리엔 대형 마트가 생긴다. 헨리는 옛날을 추억한다. 가끔씩 데니즈에게서 엽서가 오는데 처음엔 아무 수식어 없이 데니즈, 란 사인만 들어 있다가, 오랜 만에 온 데니즈로부터 온 카드엔 ‘사랑을 담아’라는 말이 적혀 있다. 아프리카꽃 옆에 놓인 그 카드를 올리브는 턱선으로 남편 헨리에게 가리킨다.
늙은 올리브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교회 앞마당에서 만나는 데이지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헨리에게 자랑한다. 헨리는 문득 생각한다. 오래토록 데니즈를 생각하는 동안 올리브도 동료 선생이었던 짐을 사랑하지 않았을까,하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이해하게 된 헨리는 올리브에 대한 죄책감으로 말을 건네본다. 당신 날 떠나지 않을 거지? 올리브다운 답이 돌아온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는 핀잔만 돌아온다. 헨리는 남친이 생긴 데이지를 초대해야겠다는 말을 남긴다.
아프리카제비꽃
식탁 위엔 아프리카제비꽃이 놓여 있겠지. 그 옆의 카드 한 장, 아내 올리브가 턱짓으로 가리키네. 남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펜으로 봉투를 뜯네. 돋보기가 필요한 건 당연하겠지. 남편이 운영하던 약국에서 일을 돕던 데니즈에게서 온 엽서야. 약국을 떠난 지 이십 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애는 생일마다 남편에게 안부 엽서를 보내곤 하지. 남편을 그 정도로 예우할 만큼의 교양과 사랑스러움은 지닌 여자지. 하지만 아내 올리브에겐 패션 감각조차 없는 맹추로 기억되는 여자지.
그애가 남편을 남자로 깊이 사랑한 건 아냐. 아, 사실이 아니구나. 그애도 남편을 사랑했어. 다만 섣불리 그 감정을 드러낼 애가 아니었지. 그애는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강심장을 가진 애는 아냐. 남편은 그애를 몹시 사랑했지. 사랑이 뭐 별거겠어? 쉬는 시간에 약품 매뉴얼을 무릎에 놓고 들여다보는 그애의 안경 낀 모습이 귀엽게 보이고, 붉은 벙어리장갑을 떨어뜨린 그애를 위해 허리 숙여 장갑을 줍고, 입구를 벌려 그애 작은 손이 쏙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 뭐 그런 게 사랑인 게지.
그애는 불의의 총기 사고로 너무 빨리 남편을 잃어버렸어. 그 애가 몹시 아파 간호를 해주고 돌아오던 날, 차창을 짓누르는 어둠 속에서 남편은 생각하지. 먼 북쪽으로 가 작은 집에서 그애와 살고 싶다고. 약사이니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 터이고, 그애와 예쁜 딸을 낳고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약품 배달원이던 남자와 결혼을 한 뒤 그애는 약국을 떠나지. 남편 생일 때마다 의례적인 카드가 날아들지. 단 한 번도 편지 끝에 ‘사랑을 담아’라고 쓰지 않지. 하지만 마지막 안부가 될지도 모를 아프리카제비꽃 옆 장면에서는 이렇게 카드의 끝을 맺지. ‘사랑을 담아 데니즈’. 몹시 애잔하지. 사랑을 담아,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데니즈의 사랑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 누구나 사랑에 빠졌을 땐 섣불리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지. 사랑을 놓아주고서야 우리는 쉽게 사랑이라 쓸 수 있지.
목도리를 짜는 상태의 마음과 다른 목도리를 짜기 위해 그 짰던 목도리를 풀 때의 감정은 다르지. 두레박 물을 기다릴 때의 심정이랑, 갈증을 해소하고 난 뒤의 물맛은 다르지. 사랑의 본질은 같더라도 그 감응은 다를 수 있는 거야. 절절하고, 터질 것 같고, 아프고, 벼랑 끝일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지. 하지만 담담하고, 터진 뒤이고, 덜 아프고, 다만 담벼락 정도일 뿐일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쓸 수 있지. 그러니 어떻게 올리브의 남편과 데니즈가 이루어질 수 있겠어?
이런 얘기가 다는 아냐. 아내 올리브가 있잖아. 올리브를 주목해야 돼. 매사에 빈정대고, 퉁명스런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우유부단한 남편더러 이렇게 말하겠지. 과부 위로꾼아,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아,『올리브 키터리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야. 시작인「약국」편에서 주변인물로 나오는 올리브는 전형적인 주부상은 아냐. 독선과 상처의 심연 끝에 어떤 꽃이 피어날지 벌써 가슴이 따끔거려. 식탁 위 아프리카제비꽃, 그 청보라 꽃잎이 아직은 위태로워 보여. 자의식 강한 한 여자의 맵찬 삶이 저렇게 꽃잎 속에서 떨고 있어.
님은 어쩌자고 이런 좋은 책을 선물로 주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