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퍼온글] 히치하이커, 대추리, 에버랜드, 판교...
더글러스 애덤스의 "컬트" 코믹 SF <은하수로 가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는 주인공이 자기 집을 헐고 도로를 내겠다는 용역업체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난데없이 왜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용역업체 측에서는 벌써 몇 달 전에 통지를 했는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며 불도저를 몰고 와서 맞선다. 바로 그 순간, 공중에서 외계인이 보내는 통지가 들려온다. 다름아닌 우주에서도 일종의 도로(아마 무슨 일종의 차원이동이나 뭐 그런 통로를 뚫는다는 이야기로 기억한다)공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그 길 한가운데 지구가 있어서 걸리적거리니 이걸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수백 광년 전에 그렇게 하겠다는 통지를 보내주었으니, 이제 와서 딴 소리는 하지 않겠지, 하는 혼잣말과 함께 지구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운 좋게도 마지막 순간에 구출된 주인공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어 황당한 모험을 떠난다는 것이다. (읽은 지 하도 오래 된 책이라 세부사항이 좀 틀릴 수도...)
오늘 대추리에 용역업체와 경찰 및 군인 등의 인력이 동원되어 그곳에 버티고 있던 주민 및 미군기지 이민 반대운동가들을 모조리 끌어냈다는, 그리고 그 와중에서 적지 않은 부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히치하이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솔직히 과연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가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 문제는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이것도 그 정확한 "원인"을 파고 들어가자면 결국 "진실게임" 양상이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보상금"을 더 타기 위해 그런다고 비난을 일삼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정부의 고압적이고 무성의한 자세 때문에 이런 사태까지 왔다고 맞서고 있다. 물론 이전 부지 확정과 주민 보상 문제에 있어서도 서로 엇갈린 의견은 많고도 많을 것이다. 있는 사람, 혹은 두둑히 보상받은 사람은 이미 다 그곳을 떠버렸고, 이젠 정말 힘 없는 사람, 갈 데 없는 사람만 남아있다는 주장도 있다. 논에 모내기를 한 것을 가지고도 서로 엇갈리는 주장이 나온다. 농사를 정말 짓기 위해서라는 둥, 그걸 미끼로 돈을 더 뜯어내려는 수작이라는 둥...
솔직히 이런 문제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되고, 외면하게 되며, 양비론으로 가게 된다. 나 같은 외부인으로선 기껏해야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 양쪽의 보도내용을 합친 다음, 절반으로 뚝 잘라서 반신반의하는 정도가 최선일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나 다른 찬반세력의 주장을 보면 어떻게 명료해지지는 않고 보다 이야기가 복잡하고 극단적으로만 달려가는데, 거기에 이런저런 찌질이들의 악플까지 읽다 보면 그야말로 이 문제 자체를 외면하고 그냥 푹 잊어버리고만 싶다. 하지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가 결코 "약자에게 관대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도 늘 "당하는 사람이 또 당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일단 당하는 쪽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늘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지 당하는 사람은 더 억울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번 경우처럼 정부가 개입되는 경우에는 십중팔구 당하는 사람이 억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언젠가는 나 역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눈물을 흘릴 날이 오지 않겠는가? 하지만 억울한 건 이해해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원리원칙을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약삭빠르고 속 편하게 일찌감치 체념하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누가 감히 피해자인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길 망정, 모니터에서 눈을 돌리면 금세 잊어버리는 나 자신도 결국 방관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차라리 그냥 외면하는 게 속 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은 이처럼 간사하고 이기적인 것이다.
대추리 사태에 있어 그곳 주민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른바 "에버랜드 옆에 30년 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집이 있다"는 얼마 전의 어느 뉴스로도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강자" 옆에 붙어있는 "약자"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삼성이 지난 1970년대에 에버랜드(자연농원)를 만들면서 그 인근의 땅을 모조리 사들였는데, 유독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땅을 구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일찍이 전기를 끌어오려고 했더니 한전에서 거기 한 가구만 써야 하니 "설치비가 많이 들어 안 된다"며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버랜드에는 전기를 펑펑 쓰고 있으니 거기서 끌어오면 되지 않을까 해서 에버랜드 측에 물어보았더니, "차라리 땅을 팔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라"며 오히려 압력을 주더라는 것이다. 노부부는 선산이 거기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팔 수는 없다고 맞섰고, 결국 에버랜드 측으로부터 완전히 "찍혀"서 30년 내내 전기 없는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버랜드 측이야 "우리와는 무관하다"며 모른척 하겠지만, 그 기사가 보도된 직후에 추가로 노부부의 집으로 취재를 하러 가던 기자를 에버랜드 측에서 큰길에서부터 딱 가로막으며 접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니, 솔직히 자기들이 떳떳하면 무엇때문에 그랬을까? 참으로 가진 놈들이 더한다더니, 삼성이나 그 계열사들이 아무리 이런저런 캠페인이며 별 쌩짓거리를 하며 잘난 척을 해도, 정작 자기 바로 옆에 남이 둥지 틀고 사는 것 하나 너그러이 봐주지 못하는 무뢰한들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다. 두 노인네도 그렇지. 차라리 "치사하고 더럽다"면서 보상 적절히 받으시고 다른 곳에 가셔서 편이 사시면 될 것을, 선산도 좋지만 그렇게 불편하게 굴욕까지 당하면서 사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생각일 뿐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사는 이 아파트를 갑자기 무슨 개발지구로 삼는답시고 나보고 갑자기 여기서 나가라고 하면, 나는 순순히 "그러노마"고 나갈 수 있겠는가? 멀쩡하게 살고 있던 사람을 무작정 내쫓는 것이야말로 솔직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돈으로 보상을 해준다 하더라도, 차라리 그거 없이 그냥 하루하루 농사 지으면서 사는 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속 편할 수 있다. 오늘 뉴스를 보니 판교 아파트 분양권 추첨 결과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친구 중에 할아버지가 판교 토박이로 사시다가 일전에 판교 개발 붐이 일면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아 가족과 함께 분당 어느 아파트로 이사가셨다고 한다. 그냥 보통 금액도 아니고, 정말 그 집안의 어느 누구도 다시는 벌 수 없을 만한 거액이었다. 덕분에 소식이 뜸하던 자식들이며 일가친척들이 뻑하면 찾아와서 온갖 아양을 다 떨고 하는데, 장손이면서도 부모님과 이래저래 관계가 껄끄러웠던 그 친구로선 이런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에게 할아버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차라리 토지 보상금을 받지 말고 그냥 계속 거기서 농사를 지으시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고만 대답했다. 팔순이 다 되신 노인이 제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더라도 결국 자식들만 좋고 말지, 하긴 아파트에 혼자 들어앉으셔서 무슨 낙이 있으시겠는가.
무분별한 개발이며 부동산 투기도 문제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나라가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곳이라는 거다. 아무리 대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그때문에 무고한 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아무리 국가의 이익이 목전에 있다고 해도, 그때문에 무고한 국민들을 강제로 고향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 제아무리 보상을 해주고, 제아무리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소용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회라면,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서 주민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일까? 노무현만을 욕한다거나, 미국만을 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는 나 역시 그들처럼 "힘 없는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이처럼 "한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는 사회에 살아간다는 것이 문득 끔찍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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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존재...
하루 그렇게 저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