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코맥 매카시의 두 편의 소설을 읽은 후의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갈증"이였다. 글을 얼마나 건조하고 삭막하게 써재껴 주시는지 읽는 동안 식도와 입안이 바삭하게 마르는 느낌이 들어 버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부터 ‘로드’까지 현재와 근 미래라는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저 심연 깊숙한 바닥 속에 자리 잡은 시커먼 속내를 성능 좋은 펌프로 필터 없이 퍼 올려 지면에 흩뿌려 주시니 이런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은 아닐 것 같다.

거북하게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두 권의 그의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그의 소설을 잡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 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핏빛 자오선은 시간적으로 먼저 출간된 책을 국내에서 나중에 읽는다고 그의 소설이 먼저 출간된 책들보다 떨어지거나 평가절하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을 과거로 돌렸을 뿐 여전히 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의 분위기에 원시적 둔탁함까지 선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18세기 서부 개척사를 전후로 북아메리카 반도가 무법과 폭력으로 뒤덮였을 때의 시간적인 조건을 부여해준다. 누런 금을 찾아 개떼처럼 서부로 이주를 시작했고 그곳에 이미 자리 잡은 멕시코 정부와 그들보다 더 오래 그 땅을 지켜왔을 인디언 부족과의 무력적인 충돌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척박하고 동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십대 소년의 시선에서 그려지고 묘사된다. 소년의 환경 역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사람의 생활이 아닌 한 마리의 어린 승냥이와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인디언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사냥꾼이 되고 바로 눈앞에서 살육을 목격하기도 한다. 지저분한 교도소는 그나마 외부적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안락한 안식처로 느껴진다.

소설의 시선은 소년의 성장과 더불어 다른 인물들로 옮겨진다. 능숙한 사냥꾼 글랜턴과 정체불명이며 어쩌면 초월적인 존재인 홀든 판사가 소설의 주체자로 난입한다. 서툰 폭력이 능숙하며 보다 야만적인 폭력으로 전이된다. 목적의식도 없이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는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머릿가죽을 벗겨댄다. 그 정도가 심각해지며 결국 현상금이 걸리는 지경까지 가버린다. 폭력의 주체는 글랜턴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러한 모든 상황을 조정하고 관찰하는 입장으로 판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바탕 아수라장이 끝난 그들의 여정은 소년으로 불렸던 노쇠해버린 중년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판사의 재접촉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이 모든 폭력의 관찰자이며 입안자였던 소년 역시 최후의 희생자로 끝을 맺으면서 말이다.

핏빛 자오선을 읽으면서 어떤 등장인물들 보다 홀든 판사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다른 책에서 전에 마주쳤던 이미지의 캐릭터가 중첩되는 느낌이다. 아마도 무자비하며 철학적인 살인마 ‘안톤 시거’의 이미지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찔러서 피를 흘렸던 안톤 보다 냉혹하며 절대적 혹은 신격화까지 겸비하고 책 속의 이야기를 핏빛으로 몰아간다. 마치 이 책의 주체자이며 집필자처럼.

그의 책은 여전히 불쾌한 냄새로 진동한다. 지글지글 타는 살냄새와 화약냄새. 그리고 추악한 인간의 썩은 내까지 골라내도 어쩜 이리도 기가 막힌 선별을 했는지 극에서 극으로 치닫다가 몰입하게 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책이 결코 허구나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8세기 무법사회에 일어났던 비슷비슷한 실존자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3세기는 더 지났어도 인간이 가진 그 야만성과 폭력성은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고 다양화 되고 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인두겁을 쓰고 책 속의 홀든 판사처럼 절대적인 폭력과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들이 많이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한차례의 살육이 끝난 후 전직 신부에게 홀든 판사가 내뱉는 냉정하며 정확한 인간의 정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막고자 하셨다면 벌써 막지 않았을까?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다른 동물은 또 어떤가? 한데 인류는 여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 (p197) 

둘러보면 인이 박힐 정도로 직. 간접적으로 많이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머나 먼 중동에서나 바로 코 앞의 우리나라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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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1-1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이것도 보관함에만 있었는데 읽어야 할까요?
세상에 읽을 책이 많아서 좋다고 해야 할까요 싫다고 해야할까요?

어제도 5만원어치 질러서(그래봤자 요즘엔 몇권 안된다는;;) 읽고 싶으나 읽지 못한책이 점점 쌓여가는데 또 사면 안되잖아요? 읽지도 못하면서. 그쵸? 안되잖아요?

아직 코맥 매카시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고, 저는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Mephistopheles 2009-01-14 12:29   좋아요 0 | URL
제법 잔인해요..연대순으로 읽으신다면 핏빛자오선-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로드 순으로 읽는 것도 좋겠죠..^^

진주 2009-0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었어요!

Mephistopheles 2009-01-15 11:07   좋아요 0 | URL
근데 표현이 좀 적나라..해서요..^^ 괜찮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