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최승자. 『쓸쓰랳서 머나먼』(372)에서
-44쪽

나는 나를 묻는다 / 이영유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言語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大地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힐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이영유, 『나는 나를 묻는다』(330)에서
-47쪽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 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느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358)

-54쪽

퀵 서비스/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빗소리에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를 담장위에
덤으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의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장경린, 『토종닭 연구소』(310)
-57쪽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친척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 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 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붙기도 했지요
-75쪽

2

지게질을 할 만 하자/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에 계실 때/ 맏손자를 안은 아내와 내가 당신의 머리맡에 서서/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게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 서울역에 왔을 때/ 환자복에 슬리퍼를 끌고 어느새 따라 오셨나요/ 거기 장항선 개찰구에 당신이 서 계셨지요/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 들고/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발가락으로 서울역에 와 계셨지요/ 식구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가장 차갑다고 이십 년도 넘게 식식거렸는데/ 얇은 환자복 밖으로 당신의 손발이 파랗게 얼어있었죠/ 그 얼어붙은 손발,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그 다음 주에 와서/ , / 그, /그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안절부절이란 절에 요양오신 몇 달 뒤/ 아, 새벽 전화는 무서워요/ 서둘러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자/ 누군가 삼베옷으로 꽁꽁 여며놓은 뒤! 였지요
-76쪽

3

이제 내가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벌써 하느님이 되신 추운 밤길들
알아요 이마와 정수리 시린 나날들이
남은 내 삶의 길이란 것을 말이에요
쓸쓸하다는 것은 내 머리맡에서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한 거죠 그래요
진리는 내 머리 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내 후년에 제 손길이 갈 거예요
전화 한 번 넣을게요 소포가 갈 거예요 택배로 갈 거예요
울먹이다가 링거 줄을 만나겠지요
금식 팻말이 나붙겠지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도소리가
내 머리맡에서 들려오겠지요 끝내는
머리맡 혼자 남아 제 온기만으로 서성거리다가
가랑비 만난 짚불처럼 잦아들겠지요
검은 무릎을 진창에 접겠지요

-이정록, 『의자』(313)에서
-77쪽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120쪽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121쪽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397)에서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122쪽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렇게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335)에서
-129쪽

주저흔 /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 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서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 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져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서로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기담』(354)에서
-171쪽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2-05-02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쪽에는 html태그가 찍혀 있다. 설마 일부러 써놓은 것은 아니겠지? 정체가 궁금하다.
시집 제목 옆의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시 궁금하다.

2012-05-02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2-05-0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퀵서비스로 상품권 받아야 겠습니다.

마노아 2012-05-03 16:25   좋아요 0 | URL
저는 입맛을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