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과 몽골제국 - 정복과 관용의 두 얼굴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4
장폴 루 지음, 김소라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품절


근대에는 몽골제국만큼 방대한 식민 제국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도 몽골제국처럼 서로 인접한 한 덩어리의 땅은 아니었다. 구세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평양에서 발트 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땅이 같은 통치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북쪽의 경계가 불분명함에도, 몽골제국은 프랑스의 50배, 미국의 3배가 넘는 3,000만 제곱km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인접한 수많은 지역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통치를 실시했고, 인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그곳의 왕들로 하여금 제국의 권력을 인정하게 했다. 1260년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이 네 개의 나라(울루스)로 나뉨으로써 정치적 단일성은 유명무실해졌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문화가 오랫동안 이 나라들의 근간을 이루었다.-41쪽

처음에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통일된 유목 국가를 세웠을 때 몽골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만 명을 넘지 않았다. 이후 몽골을 통일하고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옹구트족 등 온갖 민족을 흡수했을 때도 인구는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였다. 몽골제국 군대의 실제 인원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지 칭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병력이 12만 9천명 정도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물론 중국에서 전투 중이던 군대는 합치지 않은 것이지만, 그들도 기껏해야 수만 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는 미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것이었다. 제국의 인구 열 명 중 한 명이 군인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이 정도 비율의 군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된 경우는 드물었다. 군대의 중핵을 이루는 이 수에다, 원정에 계속되면서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징병된 군인들이 더해졌다. 이들은 헤아릴 수 없는 무리를 형성했다. 그 수는 아마도 몇 십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60쪽

칭기즈칸은 점령한 지역에서 열 명 중 세 명의 남자를 징집했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탈영하거나 도주하거나 반항했을 법한 이 신병들이 아주 드문 예외를 빼고는 늘 충성스러웠다는 사실이다. 나약함이나 배신의 대가로 가해질 형벌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위대한 군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에서 비롯된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60쪽

스텝의 말인 조랑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작았지만 등허리가 단단하고 힘이 넘쳤으며 강인하고 빨랐다. 아무것이나 먹었고 쌓인 눈 아래서도 풀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염소처럼 바위 위로도 뛰어다녔다. 잘 먹고 잘 쉬면 하루에 100km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말이 여름풀을 먹어 상태가 좋은 겨울에 원정을 나서는 것을 더 좋아했다. 전장에 나가는 남자들은 언제든 갈아 탈 새 말이 있어야 했으므로 적어도 세 마리의 말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대여섯 배의 말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몽골족은 말과 한 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탄 그들은 말에서 먹고 자는 데도 익숙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들은 최고의 기병이었다. -62쪽

몽골군은 큰 전투는 피하고,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자주 썼다. 너무 강한 군대를 만나면, 도망치는 척해서 전투에 적합한 장소로 그들이 쫓아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적은 대오가 흐트러지고 쉽게 함정에 빠졌다. 적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몽골군은 뒤로 돌았다. 특히 기병들은 몸을 돌리면서 어깨 위로 활을 쏘았는데, 이 자세를 '스키타이식 또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라고 한다. -64쪽

1220~21년 칭기즈칸은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의 오지에 길을 냈다.
오고타이는 몽골과 다른 지역들 사이에 역참망을 확립했다. 또한 천천히 이동하는 대상들을 위한 우물을 파라고 관리들에게 지시했으며, 교역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폐지했다. 다만 사치품은 예외로 해 상품 가격의 1/30을 세금으로 책정했다.
중국에서는 오래된 길들을 보수하고 가로수를 심고 숙박 시설을 갖추었으며,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전히 재정비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의 상업 및 금융 활동은 대단히 활발해졌고, 문화융성의 원동력인 富가 제국에 집중되었다. 이는 전쟁의 재앙을 겪은 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실로 모든 것이 재건의 대상이었다. -67쪽

1260년 쿠빌라이는 나이 든 지식인과 고아, 병자들을 돕는 조치를 취했다. 1271년에는 구빈원의 설치를 명했다. 모든 도시에 빈민을 위한 식량 배급 시설이 세워졌다. 마르코 폴로는 매일 3만 명의 극빈자에게 음식을 제공했다고 썼다.
몽골제국은 관용의 나라였다.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위해 수많은 칙령이 공포되었고, 왕들은 종교 간 토론을 열었다. 유교와 도교의 나라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나라에 수많은 탑과 교회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몽골의 종교적 관용을 증명한다.
몽골제국에서는 모든 인종이 평등했다. 특정 인종을 찬미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찬미한 것은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몽골족은 다른 인종을 몽골화하기는켜녕 황금 오르도나 차가타이한국에서는 오히려 투르크화되었다. 또한 그들은 어디에서도 라틴족이나 아랍인, 투르크족, 영국인들처럼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았다.-69쪽

서민층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몽골족인 민중 예술, 특히 금과 송나라에서는 매우 천시되던 연극을 좋아한 덕에, 연극은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74쪽

몽골제국은 전례없는 민족의 혼합을 유도했다. 제국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접촉케 했다. 아마 투르크족, 몽골족, 이란인,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갔을 것이다. 이주자들 혹은 망명자들은 고국의 문화도 함께 들여갔다.

아시아로 간 유럽인들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보고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이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점은 동방정교회와도 달라 '우상숭배'의 집단으로 보였다. 유럽인들은 또한 이슬람교도들처럼 단순한 이단자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불교도들과도 논쟁을 벌였다.-89쪽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임을 부정하는) 네스토리우스교의 교리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아시아로 전파되어 셀레우키아와 바그다드에 정착한 총대주교의 권한 아래 새로운 독립 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군데샤푸르 의학교와 더불어 이슬람 과학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종교는 소그디아나, 세린디아,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원은 '페르시아' 수도원으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몽골 시대에 번성했다.-91쪽

이집트나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의 항구들까지 바닷길로 가려면 적어도 8개월을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2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발두치 페골로티는 크리미아에서 중국의 대운하까지 육로로 265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경우 공적인 여행자들(황제의 행렬이 아닌)이 아시아를 횡단하는 데 5~7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상인이나 평범한 개인들은 이보다 더 걸렸다. -92쪽

1182년 출생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교황이 몽골로 보내는 최초의 선교사절단 중 하나를 지휘하는 임무를 자진해서 맡았다. 그는 1245년 4월 리옹을 떠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볼가 강을 지나서 1246년 7월 몽골에 도착해 구유크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한겨울에 귀로에 올라 1247년 5월에 키예프에 다다랐다. 그는 자진해서 아시아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92쪽

1368년 몽골족이 중국에서 쫓겨나면서 유럽인들의 몽골 모험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모험은 문학을 통해 이어졌다. 상인들은 거의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절단은 많은 글을 썼다.-95쪽

이리하여 사실상 1260년 이후 몽골제국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울루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두 국가는 짧게 존속했지만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세 번째 국가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 왕조가 탄생했다. 황금 오르도라 불린 네번째 국가 킵차크한국은 250년간 러시아를 지배했으며, 그 마지막 후손들은 20세기 초에도 군림했다.-97쪽

일한국(이란)에서는 이미 1300년대 초에 몽골족이 배제되었다. 훌라구(1265년 사망)와 아바카(1265~1282재위), 아르군(1284~91재위)의 통치 이후, 가이하투(1291~95재위)와 가잔(1295~1304재위)의 집권 아래 이슬람의 영향력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마침내 올제이투 시대(1304~16)에는 이슬람 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 이르러, 이란은 과거를 되찾고 몽골족의 나라가 아닌 이슬람 국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317년 네스토리우스교 총대주교인 옹구트족 마르 야발라하 3세가 불행하게 사망함으로써, 몽골 역사의 중요한 인물뿐 아니라 몽골의 한 시대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개종한 유대인으로 훌륭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역사가였으며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재상 라시드 앗 딘이 불행하게도 1년 후(1318) 처형된 사건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 무력한 왕 아부 사이드의 시대(1317~36)에 사회와 국가는 붕괴되었고, 이 일한국의 칸이 지계 후손 없이 사망하자 아무도 그의 뒤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한국은 완전한 무질서 속에 해체되었다.-98쪽

국경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던 차가타이한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족인 쉽게 융합하지 못했다. 북부에는 칭기즈 칸의 법인 '야사'에 충실하고 토착신앙을 믿는 가난한 유목민이 살았고, 남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에 뿌리를 둔 부유한 이슬람 정주민이 살았다. 그 까닭에 나라는 이해 관계와 문화, 사상의 대립 및 서로에 대한 멸시로 인해 분열되었다. -100쪽

티무르(1336~1405)는 몽골제국을 완벽하게 재건하고자 했던 인물로, 유럽인들에게는 칭기즈칸보다 더 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복한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통치하는 데는 실패했다.-100쪽

차가타이한국과 마찬가지로, 킵차크한국(황금 오로도)을 이끈 몽골족도 급속히 투르크화했다. 이란의 일한국에서처럼 몽골족은 일찌감치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베르케의 치세(1257~66)에 일시적이었던 이슬람교의 영향이 우즈베크의 통치시대(1312~40)에 킵차크한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멀리서, 그러나 강경하게 다스렸다.-102쪽

1348년에는 페스트가 엄습하여 서아시아 전체를 집어 삼켰다. 페스트는 크리미아 반도에 상관을 세운 이탈리아인들을 통해 서유럽으로 퍼졌다. 게다가 황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1360년에서 1380년까지 14명의 칸이 왕좌에 올랐을 정도로 칸들은 권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 혼란을 틈타 러시아인들은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102쪽

칭기즈칸의 마지막 후손들은 볼셰비키 혁명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지배를 계속했다. 망기트 왕조의 지배는 1920년에 끝났다. 칭기즈칸이 정복자로 부하라에 입성한지 정확히 700년 후의 일이었다. -104쪽

한국들은 서로 반목했다. 황금 오르도와 차가타이한국은 호라즘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둘 다 일한국과 싸움을 벌였다. 복잡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한국과 아르메니아, 십자군, 유럽의 왕들이 동맹을 맺었고, 황금 오르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동맹을 형성했다. 후자는 맘루크 주민의 많은 수가 킵차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299년, 일한국이 시리아 재정복에 실패한 것도 호아금 오르도의 공격 때문이었다. 1290년부터 1304년까지 차가타이한국이 인도 정복에 계속 실패한 것 역시 황금 오르도의 공격이 원인이었다. 또한 오고타이 일족은 1260년부터 1306년경까지 원나라와 반목을 거듭했다.-104쪽

그러나 몽골제국은 세계 도처에 강렬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란과 중국에서 단명했건 킵차크에서 장수했건, 몽골제국은 크고 작은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북쪽으로 중심이 이동하여 북경이 시안과 난징을 대체했다. 또 아직 편입되지 않았던 윈난이 한족의 세계에 통합되었다. 몽골과 만주, 티베트, 신장, 인도차이나도 원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하나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예술과 사상도 혁신되고 풍부해졌다. 몽골족은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마니교, 불교 같은 외래 종교를 보호했다. 몽골인은 박해받고 내몰렸던 이 종교들 중 적어도 두 종교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105쪽

도시화와 기초적인 산업화를 이루고 곡물과 콩재배를 장려하며 근대화를 추구하고 유목 새오할에 적대적인 정권아래서 몽골족은 여전히 조상 전래의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몽골족은 숨겨온 바람을 이루고 과거를 되살릴 수 있었다. 불교와 칭기즈칸주의, 유목생활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전통과 관습이 부활했다. 고립된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남녀 공통 전통 의상 '델'이 도시의 전 계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명절에 군인들은 13세기 전사 차림을 했다. 1992년에는 야크나 말의 꼬리로 만든 중세 깃발 '투그'가 다시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사가 다시 열렸고, 전통적인 종교적 관용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불러들였다. 유목민들은 다시 여러 가축을 키우고, 스텝에는 생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유르트 마을들이 조성되었다.-109쪽

근동에서는 몽골에 예속되어 모욕받고 그리스도교에 의해 저울질 당하고 존재 자체가 위협받아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슬람교가 눈부신 설욕을 이루었다. 그리고 협력자로 여겨지던, 또한 실제로도 그랬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의심을 받았으며 아랍 정복 이후 누리던 상대적인 평화를 잃어버렸다. 한창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미 초기의 십자군에 의해 약화된 투르크족은 서진을 제지당했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힘의 균형은 유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일하게 전장에서 몽골족을 무찌르고 이후에도 의기양양하게 그들에게 대적하여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맘루크 왕조는 거의 고대 이집트에 비견할 만큼 이집트를 눈부시게 부흥시켰다.
유럽에서는 강대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헝가리가 쇠퇴했다. 인구가 감소한 슐레지엔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의 예속 상태는 한없이 계속되어, 몽골족이 남긴 많은 흔적이 소비에트 체제에서까지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제국은 극동으로 향하는 닫혀 있던 길을 다시 열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내겠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낳은 것은 바로 몽골이었다.-110쪽

몽골족은 16세기에 제국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이제 유목민들은 열외자였고 말이나 활로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몽골제국의 재현에 성공했다. 티무르(1370~1405재위)와 그의 뒤를 이은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인도 땅에 '몽골'의 이름을 간직한 무굴제국을 세운 것이다. 이 제국은 나중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계승했다. 그리고 만주족은 중국을 정ㅂ고하여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를 창건하기 전, 몽골족에게 와서 칭기즈칸의 정통 왕위 계승자임을 승인받았다(1634). 세계 정복자의 자손들은 이 기회에 만주족을 통해 위대한 과거를 재현하길 바라며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몽골족을 예속하여 거의 소멸 상태로 몰아가고 말았다.-111쪽

몽골 군대는 그 누구보다 흔쾌하고 용감하게 전쟁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해 떠난다. 그들은 기꺼이 고된 일을 하며, 필요하다면 암말의 젖이나 활로 잡은 짐승의 고기만 먹고도 너끈히 한 달 동안 전진하거나 버틴다. 게다가 말은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아무 풀이나 먹으므로, 귀리나 건초, 짚을 가져갈 필요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일하지만 피로를 견디며, 가장 적게 소비하고 소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마르코 폴로, L.앙비 번역, <동방견문록>, 클랭크시크 출판사, 파리, 1955년-116쪽

여성들의 지위 : 스텝 유목민들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당히 자유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전형적ㅇ니 보수주의 이슬람교도였던 모로코 여행자 이븐 바투타(1304~77)는 이를 보고 분개했다. -116쪽

몽골족 대침입 시기에 생겨난 공포로 인해 몽골 사람과 그 나라에 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몽골족을 직접 본 사람들과 이야기만 들은 사람들 모두 공포에 휩싸였다. 유달리 극적인 서양의 연대기들은 마치 훈족 침략기에 쓰인 연대기들을 베껴놓은 것 같다. -125쪽

몽골족의 문명 단계는 아직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들은 정착 농경 문명을 전혀 몰랐으며,(당시에)아는 것이라곤 파괴뿐이었다.(...)그러나 이처럼 한정된 여건 속에서도 칭기즈칸은 완벽한 인간이자 공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그의 우정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싸운 적에게 관용을 베풀줄 알았고, 충성심을 소중히 여겨 배신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의 출현으로 몽골사회는 혼란과 해체의 단계를 통과했다. 그는 몽골 사회에 질서와 가정의 미덕, 도덕, 규율을 정착시켰다. 이 야만족 사람은 몽골족을 문명의 길로 이끌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문명화된 여러 투르크 몽골 민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중국 문화를 흡수한 거란족과 투르판의 위구르 투르크족, 그리고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의 지식인들을 등용한 카라샤르와 쿠처의 도움이 컸다. 위구르 문자는 몽골의 외교 문자가 되었다. 오래전에 아시아 내륙의 투르크족 사이에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칭기즈칸 가문 내에서 특혜를 누렸으며, 거란족의 불교와 더불어 몽골족의 풍속을 빠르게 순화하는데 기여-르네 그루세<아시아의 역사>1950-132쪽

칭기즈칸이 추구한 권력의 길은 외적인 상황과 표면적인 힘의 균형만을 고려한다면 이유있는 허세나 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모든 계획은 가능성을 고려하여 수립하고 실행했다. 초기에 그는 권력과 배경이 거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부유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기존의 군대나 국가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무에서 창조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분명 역사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이며, 어쩌면 그 중 가장 위대할지 모른다. 그가 역사를 창조했기에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었다.(...)그는 전통을 부정한 찬탈자가 아니었다. 역사가 그의 안에 살고 있었기에, 그 자신보다 큰 뿌리가 그의 힘을 기러주었다. 전통과 꿈은 그의 뛰어난 정책의 수단이었고,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몽골족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섯 세대에 걸쳐, 그들은 역사의 연단을 차지했다. 한 세기 반동안 세계의 운명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은 지구 반 바퀴에 걸친 파란만장한 모험을 마치고, 영광만을 짊어진 채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펠트 천막에 살게 되었다.-133쪽

(윗글과 이어서) 사람들은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경이를 잃어버렸는지 이야기한다. 위대한 과거는 곧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몽골족은 다시 가난한 유목민이 되었다.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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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바르크하우젠, <칭기즈칸의 황색 제국>, 파이요 출판사, 파리, 1935년-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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