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입니다 - 곧은나무 인물그림책
김향이 지음, 김재홍 그림 / 삼성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몇달 전에 벼르고 벼른 책이었는데 이제사 읽게 되었다.  표지 그림은 석양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는 손자를 잡아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제목과 표지만 보면 그렇게 평범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책을 좀 더 읽어보면 이 책이 보통 책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그림 얘기부터 먼저 하자면, 마치 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사진을 옮겨놓은 듯 실사에 가까운 그림이 현실감을 더 불러준다.  이 책의 이야기만큼이나.

초반에는 인자한 할아버지, 다정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일상이 묘사된다.  운동회에서 열심히 달리는 손자에게 "네 앞에 가는 사람은 너만큼 힘들고 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너보다 더 힘들다."라는 말을 전해준다.  한번 쯤 더 곱씹어 볼 이야기다.

어느날, 골목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동네 형으로부터 손기정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 인상적이었던 그 이야기를 저녁 식사 시간에 했더니 식구들이 모두 웃는다.  그 손기정 선수가, 바로 소년의 할아버지였으니까.

그제야 소년은 벽에 걸린 사진 한장을 눈여겨 본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있지만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슬픈 사진.  소년은 할아버지로부터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의 사연을 듣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사건,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 등등의 이야기가 소년의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56년 뒤, 할아버지의 후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건이 서술된다.  바로 황영조 선수의 이야기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이름들이, 이 동화책 속에 역사가 되어 들어가 있다.

제목은 "우리 할아버지입니다"였는데, 마지막에 마무리 할 때는 "우리 할아버지는 손기정입니다."로 끝맺는다.

그 짧은 문장이 얼마나 많은 여운과 슬픔과 감동을 주는 지, 노년의 손기정 달리기 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페이지에서 뒷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뒤는 '손기정이 달려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1912-2002년까지의 여정을 짧게 서술해 주었다.

그가 우승 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라는 한 마디가 적혀 있었고, 그에게 예비되었으나 받지 못했던 기원전 600년의 그리스 청동 투구 반환 사건도 짤막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1950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그가 키운 후배들이 1.2.3위를 차지한 눈부신 순간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 책은 실제 손기정 선수와 그의 외손자의 이야기를 작가가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구성한 책이다.  따스한 동화이지만 그 자체로 이미 역사적 얘기가 되어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교육적이고도 감동을 함께 전하는 아주 멋진 책이라고 거듭 강조하겠다.

책의 질감도 고급스럽고 색감도 안정된 갈색톤으로 깊고 고요한 향이 나는 듯하다.  책 말미에 실린 심훈의 시를 옮기며 마치겠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 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 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 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의 성화를 켜 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 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