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최현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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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론‘이라는 신학 분야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 하느님과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한 성찰이다. 저마다 제 길을 가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각자를 동반하는 하느님도 같은 하느님이기에,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어가는 여정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통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너나없이 초행길인 삶에서 그런 설명은 이 길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과 체험을 ‘해석‘하는 데에, 그리고 이 길을 좀 더 ‘잘‘ 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학문으로서의 은총론이 신앙인에게 봉사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일 것 같다. - P9

(...) 인간이 거부할 때 하느님의 은총은 효과를 내지 못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일까?‘ 여기에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가 있다. - P22

은총 속에서 삶의 여정을 걸어갈 때 이 여정의 분명한 주인공인 ‘나‘는 소멸되거나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그렇다면 본성과 은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P24

그러므로 은총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여정에 중요한 것은 ‘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은총을 받을만하다‘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 P41

사도행전에서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구원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은총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성경에서는 은총에 대한 개념을 내게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등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업적을 가리킨다. - P57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위타적 사랑 곧 타자를 위한 사랑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 방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P59

한편 은사는 그 사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은사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P67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은사가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은사의 종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충실히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관건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것, 그래서 그분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분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란 어떤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 P73

따라서 하느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충만함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더 성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인간을 통합적으로 성장시킨다. - P96

은총은 선행에 앞서고, 선행을 동반하며 또한 뒤따른다. 곧 선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은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선행과 은총의 관계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은 은총의 우선성이다. - P189

하느님이 주실 구원과 우리의 선행 사이에 ‘비례적‘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신학에서 항상 부정되었다. 선행을 베푼 만큼, 공덕을 쌓은 만큼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 P190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 은총 덕분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선행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 P197

이처럼 자유란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과정이며 하느님 모상의 실현이다. 자유란 인간이 본질로서의 자신을 실현하게 되는,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 안에 있다. - P204

따라서 참된 자유, 가장 높은 형태의 자유란 인간 본성의 충만한 완성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단순한 선택의 자유와는 구분되고, 자유방임적 자유하고는 더더욱 다른 것이다. - P20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인성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의 충만한 협력이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본성을 억누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 P214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당신께 이르는 길을 알게 되며(물론 이것 또한 은총이다), 그 길을 걸음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며(사랑하게 되는 것도 은총이다), 하느님은 그런 나를 보시고 더욱 은총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 역동성은 마치 하느님과 인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 P218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본성을 지녔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하느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창조하셨으며, 각자의 개인사가 다르고 각 개인의 구원사 또한 다르다. 우리는 각자 구원된 그리고 완성된 고유의 모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궁극적 구원에 이른 모습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 P219

(...) 하느님은 당신 은총으로 채우시는 ‘나의 인생 여정‘에서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 조금만 성찰하면 하느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알지만, ‘당신의 은총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기를 바라실 정도로 그토록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 은총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그 아름다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감히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나의 영적 여정에서 내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래서 은총에 대한 이야기는 ‘자비의 복음‘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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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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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팎에서 문제가 생길 때면 실수를 인정하고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기도로 덮기만 했다. 그리스도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 P6

우리는 고결한 생각의 씨앗을 심고 키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각을 삶으로 드러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느 시대건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살았다. 미움이 가득한 곳엔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핍박과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 위로하며 삶을 회복시켰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높이 들고 휘젓고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 - P8

지금 한국 교회는 당위의 전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흔들며 사는 것이 신앙과 삶의 목표가 된 듯하다. 신앙도 물감처럼 굳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라는 맥락에서 말씀을 읽어내지 않으면 경직된 시각을 갖게 된다. 이것을 예방하려면 성경을 치열하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를 읽도록 할 때 문학은 이를 돕는 좋은 도구가 된다. - P9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일상이라는 두 개의 텍스트를 주셨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일상(현실)이라는 텍스트를 잃어버린 것 같다. 이 두 텍스트를 잘 연결시킬 수 있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데, 문학은 바로 이 일상이란 텍스트를 읽는 연습이다. 즉 문학을 읽으면서 작품 속 메시지를 해석할 줄 알게 된다면 평범한 일상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살피고 계신지 깨닫게 된다. - P17

오늘날 신앙인들은 많지만 아합의 시대처럼 다들 각개전투만 한다. 각자 섬기는 교회만을 전부로 알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트랙에서 달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함께‘ 부르신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 나라란 큰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현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분명 다르다. - P1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몸도 마음도 회복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깨어나는 기쁨에 하루를 사는 기쁨이 샘솟는다. 그런 기쁨을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문학은 이런 구원의 기쁨을 문장에 담아서 전달한다. 내가 좋은 글을 읽고 생각의 자극을 받아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면 이 세계는 변할 것이다. - P35

흔히 미래는 고민하는 힘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진짜 고민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대다수는 말만 한다.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고, 다수는 내일로 미루어 버리다가 노년이 찾아오면 포기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빌라도처럼 그 고민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옷감을 짜지만 그것의 무늬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짜기만 할 뿐이다. - P44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재능은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며 살았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다. 기득권, 경력 또는 익숙한 환경을 떠나지 못한다.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다들 뭔가를 꿈꾸면서도 실제론 머뭇거린다. 다시 말해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것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P49

사이퍼는 데마같은 사람이다. 데마의 이름은 골로새서 4장 14절과 빌레몬서 1장 24절에 나온다. 그는 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지만 거짓된 세상으로 돌아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는 게 힘겨워지면 우리 역시 거짓된 삶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에 흔들린다. 진짜 현실을 보는 눈이 없으면 보이는 것에 이끌리기 쉽다. 부자 청년과 사이퍼 그리고 데마가 걸어간 길을 지금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이 없다. - P63

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게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도, 비관할 만큼 뒤떨어지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 격차는 누가 더 올바른 질문을 던졌느냐에 따라 바뀔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문가의 개념도 달라진다. 전문가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최고의 일인자가 아니다. 전문가는 다만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답이 나올 때까지 파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일 뿐이다. - P82

우리는 늘 섬김, 낮아짐, 내려놓음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간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겠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습관적인 고백일 뿐이다.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 삶에 가뭄을 주셔서 내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보게 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92

문학은 삶의 난제를 연습시켜준다.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을 극한 상황으로 시뮬레이션 한다. 삶이 갈팡질팡할 때 문학은 내가 먹고사느라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질문을 일깨운다. - P98

다들 명문대 진학과 대기업 입사에 목숨을 건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편히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키팅 선생님은 ‘말과 생각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는 의학, 법률, 금융, 기술 등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과 사랑은 삶의 목적을 일깨운다고 강조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삶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 P101

성경은 실재이고 문학은 허구이지만 이 둘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서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다니엘의 이야기는 결코 과거에 한정되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이어진다. 즉 문학을 통해 나를 읽는 법을 알게 되면 성경 속 사건들(사르밧 과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사마리아 여인)이 내 인생과 우리가 사는 동시대에도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학은 삶을 읽어 내는 눈을 열어 주는 도구인 것이다. - P119

진정한 성공을 꿈꾼다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가장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 아닌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여정의 끝에서 ‘나다운 나‘를 만나지 못한다. 때로는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 미움 받을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주눅이 들어선 안 된다. - P141

우리가 무엇을 믿고 확신하는가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신념이 맹신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문학은 자기 검증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 사실 위험의 근원은 우리의 바깥보다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 성찰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관점이라는 세계 안에서 평생 갇혀 살게 될 것이다. - P155

각자의 삶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 P161

독서는 정적인 것 같지만 매우 역동적인 작업인데, 독자의 해석이라는 과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는 소비자를 생산자로 만드는 작업이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만 가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어느 순간 자신의 관점을 개입시키는데, 이것이 해석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순간 독자는 허구에서 현실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 P189

성경 속 세상은 직접 살아 봐야만 알 수 있는 외국 같은 곳이다. 즉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살던 세상을 우리가 직접 보고 느껴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배우게 된다. 환자로서의 경험을 해 본 의사가 뛰어난 임상의가 될 수 있듯 이해의 본질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오해와 분열은 한쪽의 생각만 들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두 배로 듣지만 공평하게 들으라고 주셨을 것이다. (...) 무엇보다 우리의 두 귀로 찬성과 반대, 빛과 어둠을 균형 있게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 P190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꿈꾸고 또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한계가 있다. 모두가 의미 있는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부여한 만큼만 의미를 갖는다. 가상의 선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정의한 것만 지킬 수 있다. 비록 자신의 꿈에 대해 동의했다 해도 이후로 그 동의가 잘 지켜지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연습이다. 연습은 내가 꿈만 꾸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 P193

기독교 신앙에서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체성이 없으면 대개는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패션, 맛집, 자동차, 사는 집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또 보여 주려고 한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있다면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방향 감각을 가지려면 내면이 건강해야 하고, 이를 키우기 위해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 P197

좋은 소설은 절대로 빨리 읽을 수 없다. 반면 흡입력이 뛰어나서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설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짜 좋은 소설은 다르다.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내 삶을 흔들어 놓는 문장들 때문이다. 글은 글 쓰는 사람을 닮아가기에 독자들도 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 P201

선지자들은 모두 관찰자였다. 당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던 죄된 삶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은 익숙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곧 반문한다는 의미다. 반문이란 ‘내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자신의 생각에도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 P225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창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누구든 이 땅이 타락하거나 부패하는 걸 막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꼭 시인이나 소설가로 제한되지 않는다. - P233

좋은 문장은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넘어설 뿐 아니라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즉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다양한 시선으로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생각의 프로세스를 바꾸는 훈련이기에 사지선다형 문제를 통해선 배울 수 없다. 오직 서사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P235

하나님은 신앙인의 삶과 가정뿐 아니라 그 일하는 곳에도 임재하신다. 그런 면에서 일은 직업이 아니라 미션이다. 사실 일의 본래적 의미는 돈이 아니었고, 타락 후 주어진 저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은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직업이 좁게는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은 신의 자취를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 P246

이 땅은 여전히 불완전하기에 모든 선한 일에도 그늘이 있다. 큰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그림, 보이는 앞면과 보이지 않는 뒷면, 말로 설명한 것과 마음속에 감춰 둔 메시지를 찾아내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이런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영적 은사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 P248

불신자들은 모순된 생각을 한다. 진화론을 믿으면서 세상이 공정하길 바라는 게 그것이다. 이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세상에선 속임수에 능하거나, 힘이 세거나, 적응력이 빠른 자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역사도 이것을 증명한다. 반대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사람들이 정의를 믿어야 한다. 옳은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 P251

하나님이 풍요와 결핍을 선물하시는 목적은 같다. 그것이 주어진 뜻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풍요를 축복으로만 읽고 결핍을 문제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풍요를 가지면 자만하게 되고 결핍을 채우지 못하면 자학한다. 어느 경우든 오독하면 외부의 시선과 잣대에 스스로를 가두기 십상이다. 풍요처럼 결핍도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인생이란 바둑판 위에서 의미 없는 돌이란 없다. 즉 결핍에도 그것에 주어진 의미가 있다. - P256

가면을 벗는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다윗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있는 ‘자기 보호‘란 틀을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궁창 같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덮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문학이 우리의 내면을 직시하도록 도울 것이다. - P263

아름다운 삶이란 금수저의 삶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려고 눈물짓고 아파하면서 애쓴 흔적이 있는 삶이다. - P266

신앙인은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지만 불확실한 삶이 주는 아픔도 동시에 겪는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 제목을 모두 들어주시지 않으며, 고통을 다 없애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 돈이나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괴리가 견딜 수 있는 최대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때 우리는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낙심한다. 하나님은 사소한 것은 즉답하시는데 반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 P267

성숙함은 성경 지식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자신을 읽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 자신을 읽지 못하면 우리의 헌신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기 쉽다. 물론 자신을 읽지 못해도 성경의 진리를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읽을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삶도 읽을 수 있다. - P268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일이 아니다. 생활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생활에 밑줄을 그으려면 자기의 민낯을 읽어야 하고,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의 부족보다 용기의 부족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숨은 나‘를 노출하는 순간,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느끼는 순간 북쪽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한다. - P281

살다 보면 속상한 날도 많지만 그로 인해 조금씩 성숙해졌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걸, 많은 이가 사랑의 결핍으로 죽는다는 걸 종종 잊는다. 신앙인이 공감의 빈곤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문학을 모르면 하나님에게만 둔감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삶에도 둔감해진다. - P286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문학이란 선물을 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소설은 내가 본 세상, 내가 겪은 세상 혹은 내가 알고자 하는 세상을 서사로 표현한 것이기에 작가는 소설을 통해 독자의 사고를 확대시킨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사고를 확대시킨 것과 같다. - P298

문학은 매스컴이 놓친 것을 서사로 들려준다. 소설은 상상이고 현실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작가가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독자는 무지에서 깨어난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발견이고 설명이기에 작가의 시선은 늘 시대와 맞닿아 있다. - P307

삶이 불확실해지면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정치와 문학이 잘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종종 편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곤 한다. 사랑과 용서가 아닌 미움과 증오를 부추긴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닐 것이다. 종교와 언어와 피부색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를 증오한다면, 그리고 종교나 전통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 P310

소설이 가진 특권이 있다.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 받았다. 이것을 허구라고 부르는데, 비록 상상이지만 상상 이상이다. 작가는 허구를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피카소도 상상이 사실보다 진실하다고 믿었다.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최고의 장치가 분명하다. - P314

인간의 삶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큼이나 타인에게도 속해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도 알고 보면 인간이란 공통분모에 맞닿아 있다. - P319

때로는 소설을 읽는 것이 등산만큼 힘들 때가 있다. 문학이 삶의 이면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면서 산다. 혼란스런 세상이지만 이기적 유전자로 규정되는 ‘나‘라는 존재를 넘으면 세상은 살만해진다. 나를 넘어 이웃으로, 이웃을 넘어 제3세계로 건너가면 놀라운 것들이 보인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가 사는 내내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P320

사람들은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긴 했지만 삶의 지혜가 내면까지 스며들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삶을 살아온 폭이 좁거나 말씀대로 살기를 일찍 중단할수록 세상에 대한 시각은 협소하고 엉성하다. 중년이 되면 대부분은 사는 데 지쳤거나 자신의 경험을 너무 믿어 새로운 것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는다. 신념을 중단하는 순간은 모든 것을 잃는 시점이 될 수 있는데, 아주 소수만이 불확실한 현실을 탐색하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 P337

인생이란 전류는 불규칙하게 흐른다. 그 속에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반목, 미움, 욕망, 배신, 질투도 있기 때문이다. 또 너와 나 사이에는 행복도 있지만 오해와 상처도 있다. 어긋난 인생, 찢겨진 가정, 편집증적 외로움, 무뎌진 분별력, 망각, 상한 마음, 편견과 왜곡된 욕망. 이것이 소설의 질료이고 시의 자양분이다. 깨어진 영혼은 엑스레이에는 찍히지 않지만 작가의 촉수에는 잡힌다. 작가는 고단했던 삶의 질료를 찾아내어 그 인생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 P350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늘 교훈만 찾게 된다. 우리에게 영성도 필요하지만 감성도 필요하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은 감성이지, 영성이 아니다.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을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문학은 허구적 인물을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보게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와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 P360

아무리 신실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기도의 사람이라는데 깊이가 없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허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신뢰하여 우상처럼 믿곤 한다. 우리의 최애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해석하는 내 관점일 때가 많다. 그것을 에고(ego)의 집착이라고 한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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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12-06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삶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큼이나 타인에게도 속해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도 알고 보면 인간이란 공통분모에 맞닿아 있다.˝.....이 생각 저도 오늘 읽은 ‘스토너‘ 책 보면서 생각했어요......

올려놓은 신 발췌문 다시 보니...또 좋네요 ^^

라파엘 2021-12-06 18:03   좋아요 1 | URL
한님 덕분에 저도 좋은 책을 접하고 많이 배우게 되네요. 읽으려고 계획한 책들을 읽고 나서, 스토너도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
 
인간이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이철민 옮김 / 복있는사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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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자리 잡고 있는 동시에 관계적이고, 수용적인 동시에 창조적이고 내러티브적이며, 말하는 동시에 말해지는 것,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것과 관련이 있고, 상징을 만들어 낸다는 입장은, 종교인 전체가 당연시하는 우주 모델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조화로운 동반 관계에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창조세계 자체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우주 속에 유한한 일련의 체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은 이유는, 모든 것이 근본적 지능이나 정보의 소통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수용력과 협력, 한계 혹은 불완전에 관한 감각, 상징과 상징의 투명성은 인간의 담론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신성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P42

우리가 사람들이나 개인에게 인격적 존엄이나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관계를 맺는 가운데 다른 사람의 실존 안에서 현존하거나 의미를 갖는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계의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소위 ‘인격‘이라는 추상적 요소를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타자의 경험과 열망, 자아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은 인격이라는 실재에 관한 이 심오한 신비가 지닌 함의의 일부입니다. - P55

인격이란 흥미롭게 또한 불가피하게 혼성적인 실재라는 이해입니다. 물질세계에 뿌리내려 있고, 시간의 경과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면에서 물질적이지만, 동시에 신비롭게 자신의 환경에 반응하여 다른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정해진 의제를 뛰어넘어 주변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받고 주는 데, 의존적인 동시에 독립적이 되는 데 몰두하는 데, 그것이 바로 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계도 아니고 자족적인 영혼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게 말하고 주목하기 때문에 나는 한 인격이고, 누군가가 내게 말하고 주목하고 나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현실의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질문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내가 볼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는 저 편만하고 신비롭고 영속적인 인식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합니다. - P68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 온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몸이 습관을 익힐 때 너무 많은 사물과 부딪치지 않고 환경 속을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관점에서 우리의 수많은 습관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느끼고 감지하고 참여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은 지적 성장의 핵심입니다. 그와는 별도로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 몸 자체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몸을 지닌 채 마음에 대해 배운다고 한다면, 몸이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마음에 관한 요소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 다시 말해, 우리의 앎이란 육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협력적이고 상상적입니다. - P84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어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우리의 발견은 습관이나 숙련으로 바뀔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시간을 덜 들일수록, 우리는 더 쉽게 해결하고 정리하고 이해하게 되지만, 그것의 가치와 의미는 떨어질 것입니다. - P92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기원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아 창조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또 존재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인정의 차원이 있습니다. - P103

핵심은 이것입니다. 진단이 있고, 교육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인식할 가능성, 그리고 그 반응을 지적으로 재형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P107

시간은 단지 순환적인 것도 아니고 선형적인 것도 아닙니다. 시간은 움직이고, 여러분은 변합니다. 그와 함께 시간의 경과 속에서 습득한 이해를 재발견하고 확장하기 위해 여러분은 무언가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더해져, 습득의 궤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강하게 압박해야 하는 한정 상품이 시간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시간은 복합적이고 풍요로운 선물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성장하고 전진할 뿐만 아니라, 건설적으로 되돌아가 우리 자신에게 재공급해주는-말 그대로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매개체입니다. - P108

무기력하지 않은 의존, 자기비판에 일조하는 자유, 제의에서의 인내심과 해석력, 그리고 죽음 앞에서 불안의 제거,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혹은 전부가 부재할 때, 인간 공동체 안의 역기능과 개인 안의 역기능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형태의 의존에 맞서 반항하는 사람들, 자신에 대한 의문 혹은 자기비판 개념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 시간을 채워져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대하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 P112

"현재 지구촌 시장의 관행은 어떤 종류의 인간을 전제하고, 또 어떤 종류의 인간을 양성하는가?" 덧붙여, "그는 우리가 객차에서 함께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나 습관, 체제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는가? 이 상황에서, 이 언어를 통해, 어떤 종류의 인간성이 교육되고 양성되고 개발되고 있는가? - P115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묵이 우리에게 엄습하는 그 순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리는 그 순간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 P128

우리는 침묵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거기 있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호흡을 이용하고, 우리의 자세를 이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더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갑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특별한 경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인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으면 온갖 기쁨과 성취가 가능해집니다. - P142

그분의 말씀은 성령의 은사 적분에 우리가 새로운 부류의 존재가 될 뿐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보고 다르게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순절 바람과 불로 우리를 덮으실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정말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예수의 능력에 버금가는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까다롭고 비루한 인간 세계의 조각들, 유익하지 않은 조각들을 걸러내지 않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눈과 우리의 귀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인간다움의 총체적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거친 진리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어떤 존재가 되는 대신, 저 방대한 인간 경험에 더 많이 열리고 더 많이 개방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이 아픔을 그리스도 안으로 또한 성부의 심장 속으로 가져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아픔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변화될 수 있습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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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된다는 것 -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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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 세움받은 목적은 지식을 받아 적고는 돌아가서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자로 사는 사람은 변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 결과 전체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게 됩니다. - P28

예수꼐서 계신 곳에 있다는 말은 예수께서 찾으시고 지키시는 사람들의 무리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소외된 사람, 멸시당하는 사람, 불행한 사람,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의 무리를 선택하시며, 그래서 여러분도 그 무리에 들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께서 계신 곳에 있기를 원하고 또 간헐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제자도를 실천한다면, 당연히 여러분은 그분이 계신 그 인간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또 제자도가 우리의 무리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의 무리를 선택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다시 깨우쳐 줍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무리를 위해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37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무리 안에 속하고, 평정과 집중력과 기대감을 배우며, 예수께서 가시는 곳으로 가서 그분이 품어 주신 사람들의 무리 안에 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또 행위가 발생하고 관계가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행위가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듯이 그리스도의 행위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 P44

만일 여러분이 ‘행동 없는 관상‘이나 ‘관상 없는 행동‘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에 실로 열매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삶을 파괴할 만한 선언문을 작성하는 셈이라는 점입니다. 관상과 행동을 묶어야 합니다. 관상은 변혁적 행동의 진정한 근거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그래야 둘이 서로 대립하는 교착 상태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기도와 행동을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이 둘을 아주 탁월하게 하나로 묶었습니다. - P45

이제 한 가지 도전 앞에 섭니다 어둔 밤이 지성을 휘감은 시대에 우리는 신앙을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는 면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런 관계를 세상에서 구체화하고 나누도록 부름받았습니다. - P57

소망은 단지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망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고, 그 결과 하늘에 계신 증인 곧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기억의 혼란-우리는 누구였고 나는 누구였나? 지금 우리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이 견딜 만하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이 사실에서 교회에게는 엄청난 인내라는 특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혼돈과 불확실성에 휩쓸려 있는 현실 인간에 대한 인내,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환경 속에서의 인내,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인정하는 인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온전히 자라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소망과 인내는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인내를 배운 교회만이 효과적으로 소망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 P61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신뢰할 만한 존재, 우리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시고 한결같은 눈길로 응시하시는 존재, 우리가 누구인지를 영원토록 흔들림 없이 증언하시는 분, 그 존재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헤아리고 이해하고 붙잡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면, 교회의 근본적 실체가 무엇이고 교회가 구현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 교회는 시공간 속에 자리 잡아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 자리가 되고, 그 어떤 것도 문밖으로 내침받지 않는 곳이 되며, 또 시종일관 많은 일을 요구하는 세상, 곧 주고 거래하고 베풀며 그 자리에서 변화를 이루라고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자리가 됩니다. - P65

용서는 서로 간에 생명의 양식과 진리의 양식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인간성에 해를 끼치고 그 존엄성을 부정했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 양식을 먹여 주고 상대방의 존엄성을 키워 주는 관계로 회복되게 해주는 길입니다.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권력인 양 생각하는 것은 용서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 P76

거룩함이란 예외적이고 특별난 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나 선한지를 따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세상을 확장하고 그 세상 속에 참여하는 일과 관계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어려운 과제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그런 문제들 한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물과 사람들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참 간단하면서도 극히 어려운 일로 정리가 됩니다. 즉 거룩한 사람은 아무리 자신을 성취하는 일에 몰두한다고 해도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그들을 보지 말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 P92

우리는 거룩함의 길로 나설 때 아주 간단한 두 가지 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간단하다‘는 말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는 바라보기 곧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라보며 복음을 바라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탐구하기 곧 인간이 사는 곳이 어떤 곳이고 그들이 처한 곤경이 무엇이며 그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일은 무엇이고 그들이 좀 더 인간답게 살도록 우리가 도울 일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사는 세상을 탐구하는 이 두 가지는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토대로 삼을 만한 유일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97

무엇을 도덕적 사회의 기초로 제시해야 할까요? 여기서 나는 그러한 기초를 다지는 데 필요한 것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제자도의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모두 하나님께 동등한 가치가 있으며, 또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참된 정의와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지켜 내려고 할 때, 이 두 가지 원리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 P107

우리 앞에 있는 것, 곧 세상을 이루는 인간과 물적 자원들은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그러한 마음으로 교류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기본 태도를 표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형편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희망을 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과 물질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세워 가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이타적 견해이며, 또 다른 사람의 삶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성숙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 견해입니다. - P113

이렇게 진정한 공동체의 형식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공적 영역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관점, 곧 사리를 추구하는 집단으로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국가와 법의 대화 상대자가 되며 이른바 ‘비판적 지지자‘의 역할을 합니다. 또 국가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의 근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일반적 사회 도덕의 천박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국가를 향해 자신이 대변하는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를 본받아 변화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정치를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그릇된 주장을 펴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세워 가는 공동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좀 더 구체화하고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 P118

자기인식과 평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정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을 더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지으셨고 지금도 매 순간 우리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에 연결됩니다. - P130

우리로 하여금 흔들림 없이 제자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인식과 평정, 성장, 기쁨입니다. 이 네 가지는 제자도의 삶을 받쳐 주는 기본 요소들로, 교회와 세상과 우리 내부에서 우리를 압박해 영적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모든 문제에 맞서 싸우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기를 원할까요? 우리가 평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차분하면서도 힘차게 계속 달려 나갈 각오가 되었습니까? 또 그 결과로 충만해지고 넘쳐나는 기쁨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어떻게든 우리 스스로 이런 물음들을 계속 물을 수만 있다면, 성공을 보장하는 비결을 손에 쥐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 거하시도록 문을 열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끄시는 곳이 어디든 그분과 함께하려는 열망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제자가 된다는 것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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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세례, 성경, 성찬례, 기도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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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란 예수와 함께 "심연"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간이 겪는 곤경이라는 심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심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심연에서 성령은 인간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창조하고 새롭게 합니다. - P27

우리는 주고받음의 거대한 관계망에 속한 셈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이루는 연대, 고난을 끌어안는 연대는 또 서로와 하나 되는 연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좀 어려운 용어로 "상호내재(co-inherence)"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결속되며", 우리의 삶은 서로 얽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퍼지며,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개개인에게도 이릅니다. - P34

세례받은 삶이란, 우리에게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제공해 주는 삶입니다. 또 화해를 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삶입니다. 세례받은 삶은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요, 그 자유로 인간 사회의 삶을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일하는 삶입니다. - P40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여러분을 에워싼 심연을 고의로 모르는 체하고, 또 곤경에 처한 세상의 현실을 덮어버리며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장막들을 다시 거둬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회개의 기도에 힘쓸 때, 세례를 통해 열리는 그 심연이 다시 여러분의 내면과 주위에서 솟구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P42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비유 덩어리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말을 듣고 나를 이해하고 내게 응답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것은 내가 그들에게 준 선물이다. 이것은 그들이 보인 응답이다. 이 이야기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 - P54

우리는 전체 이야기에서 별것 아닌 작은 부분을 뽑아 그것을 우리 행동을 인도하는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런 잘못된 길로 빠졌으며 그 모양이 썩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을 예수에 관한 비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여러분 자신을 새롭고 좀 더 바르게 보게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초청이요, 선물이자 도전입니다. - P56

성경 읽기는 그 시대와 현대 사이의 유사점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또 성경 읽기가 성숙하고 발전할 때면, 하나님께 신실한 응답과 그렇지 못한 응답이 어떤 것인지 예수께 비추어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성경 읽기의 중심이자 초점으로 삼을 때 일어납니다. - P65

이렇게 우리는 함께 읽고 함께 듣습니다. 성경을 방에 홀로 앉아 나만 펼쳐 읽는 책이라고 보는 그림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은 이렇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회중 앞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이어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에게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우리의 모습을 알 수 있을까? 이 성경 읽기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함께 새로워질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이는 표징일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시작되는 원천이 됩니다. - P68

이렇게 서로 환영하고 환영받는 일은 복음서들에서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핵심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꼐서 지녔던 산뜻하고 인격적인 기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그분의 주된 사역에 곁들여진 장식품, 곧 여분으로 보기 좋게 곁들인 요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용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 예수께서 사역하면서 사람들과 함께했던 식사는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는 방법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도록 기초를 다지는 방법이었습니다. - P76

예수를 가까이 따르는 일은 예수께서 지닌 초청하는 자유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자유롭게 내어놓아 연대와 교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을 기꺼이 환영하는 자리로 만듭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함께 나눔으로써, 지금도 계속되는 예수의 다리 놓는 사역에 참여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두려워하는 습성에서 생겨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렁에다 다리를 놓는 크고 중요한 과업을 이루셨으며, 또 그 과업에 비추어서 동일한 능력으로 인간들 사이의 구렁에다 다리를 놓고 그들을 함께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 P79

우리는 모든 순간과 물질의 안과 배후와 그 심연에 은혜로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태도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 대부분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표층에서 살며, 우리 마음에 드는 것과 우리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봅니다. 사물들은 고유한 깊이와 온전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우리가 착취하고 남용할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찬례의 떡과 포도주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전체 세상을 귀하게 여기고, 또 매 순간마다 그 이면에서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영광이 약동하고 있음을 긍정하는 태도가 생겨납니다. - P83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보면서 "아, 저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일이야"라고 말하고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않은 채 눈감아 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고난과 공포에 휩쓸린 상황들을 보면서 "저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감사한다는 말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꿰뚫어 보면서 거기 어딘가에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더욱 많은 은혜를 주셔서 새 일을 행하시고 변혁을 이루실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또 나 자신을 바꾸고 내 주위 사람과 나를 에워싼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씨름할 때, 내가 찾고 또 나 자신을 던져 맞서는 그것이 다름 아닌 숨어 있는 실재, 곧 결코 지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P93

기도란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서 기도하시도록 맡기는 것이요,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상과 희망을 점차 그분의 영원한 사역에 일치시켜 가는 길고도 때로는 힘겨운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살아생전에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밤 고통과 고뇌가 극에 달했던 그 순간에도 자신의 인간적인 두려움과 희망, 열망, 감정들을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감당하고 아버지와의 영원한 관계 안에 품었던 예수를 본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 P99

기도는 사사롭고 편협한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에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과 인류라는 가족에 소속됨을 주제로 다룹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제대로 간파한다면, 이 세상이 변하게 됩니다. 또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 점차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일치될 때, 하나님의 권능은 여러분 가운데 임하고 여러분을 통해 이러한 관계의 치유를 이루게 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거나 그 결과로 화해와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진정 여러분 안에 계실 때, 여러분 주위로 점차 정의와 화해가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 P111

의로운 삶이란 이기심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런 까닭에 화해와 자비, 하나님의 사랑과 환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값없이 베푸는 일 같은 인간됨의 특정 방식들과 기도가 철저하게 결합된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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