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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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팎에서 문제가 생길 때면 실수를 인정하고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기도로 덮기만 했다. 그리스도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 P6

우리는 고결한 생각의 씨앗을 심고 키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각을 삶으로 드러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느 시대건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살았다. 미움이 가득한 곳엔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핍박과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 위로하며 삶을 회복시켰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높이 들고 휘젓고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 - P8

지금 한국 교회는 당위의 전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흔들며 사는 것이 신앙과 삶의 목표가 된 듯하다. 신앙도 물감처럼 굳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라는 맥락에서 말씀을 읽어내지 않으면 경직된 시각을 갖게 된다. 이것을 예방하려면 성경을 치열하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를 읽도록 할 때 문학은 이를 돕는 좋은 도구가 된다. - P9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일상이라는 두 개의 텍스트를 주셨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일상(현실)이라는 텍스트를 잃어버린 것 같다. 이 두 텍스트를 잘 연결시킬 수 있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데, 문학은 바로 이 일상이란 텍스트를 읽는 연습이다. 즉 문학을 읽으면서 작품 속 메시지를 해석할 줄 알게 된다면 평범한 일상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살피고 계신지 깨닫게 된다. - P17

오늘날 신앙인들은 많지만 아합의 시대처럼 다들 각개전투만 한다. 각자 섬기는 교회만을 전부로 알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트랙에서 달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함께‘ 부르신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 나라란 큰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현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분명 다르다. - P1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몸도 마음도 회복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깨어나는 기쁨에 하루를 사는 기쁨이 샘솟는다. 그런 기쁨을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문학은 이런 구원의 기쁨을 문장에 담아서 전달한다. 내가 좋은 글을 읽고 생각의 자극을 받아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면 이 세계는 변할 것이다. - P35

흔히 미래는 고민하는 힘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진짜 고민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대다수는 말만 한다.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고, 다수는 내일로 미루어 버리다가 노년이 찾아오면 포기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빌라도처럼 그 고민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옷감을 짜지만 그것의 무늬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짜기만 할 뿐이다. - P44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재능은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며 살았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다. 기득권, 경력 또는 익숙한 환경을 떠나지 못한다.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다들 뭔가를 꿈꾸면서도 실제론 머뭇거린다. 다시 말해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것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P49

사이퍼는 데마같은 사람이다. 데마의 이름은 골로새서 4장 14절과 빌레몬서 1장 24절에 나온다. 그는 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지만 거짓된 세상으로 돌아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는 게 힘겨워지면 우리 역시 거짓된 삶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에 흔들린다. 진짜 현실을 보는 눈이 없으면 보이는 것에 이끌리기 쉽다. 부자 청년과 사이퍼 그리고 데마가 걸어간 길을 지금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이 없다. - P63

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게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도, 비관할 만큼 뒤떨어지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 격차는 누가 더 올바른 질문을 던졌느냐에 따라 바뀔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문가의 개념도 달라진다. 전문가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최고의 일인자가 아니다. 전문가는 다만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답이 나올 때까지 파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일 뿐이다. - P82

우리는 늘 섬김, 낮아짐, 내려놓음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간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겠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습관적인 고백일 뿐이다.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 삶에 가뭄을 주셔서 내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보게 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92

문학은 삶의 난제를 연습시켜준다.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을 극한 상황으로 시뮬레이션 한다. 삶이 갈팡질팡할 때 문학은 내가 먹고사느라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질문을 일깨운다. - P98

다들 명문대 진학과 대기업 입사에 목숨을 건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편히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키팅 선생님은 ‘말과 생각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는 의학, 법률, 금융, 기술 등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과 사랑은 삶의 목적을 일깨운다고 강조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삶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 P101

성경은 실재이고 문학은 허구이지만 이 둘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서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다니엘의 이야기는 결코 과거에 한정되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이어진다. 즉 문학을 통해 나를 읽는 법을 알게 되면 성경 속 사건들(사르밧 과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사마리아 여인)이 내 인생과 우리가 사는 동시대에도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학은 삶을 읽어 내는 눈을 열어 주는 도구인 것이다. - P119

진정한 성공을 꿈꾼다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가장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 아닌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여정의 끝에서 ‘나다운 나‘를 만나지 못한다. 때로는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 미움 받을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주눅이 들어선 안 된다. - P141

우리가 무엇을 믿고 확신하는가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신념이 맹신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문학은 자기 검증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 사실 위험의 근원은 우리의 바깥보다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 성찰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관점이라는 세계 안에서 평생 갇혀 살게 될 것이다. - P155

각자의 삶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 P161

독서는 정적인 것 같지만 매우 역동적인 작업인데, 독자의 해석이라는 과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는 소비자를 생산자로 만드는 작업이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만 가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어느 순간 자신의 관점을 개입시키는데, 이것이 해석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순간 독자는 허구에서 현실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 P189

성경 속 세상은 직접 살아 봐야만 알 수 있는 외국 같은 곳이다. 즉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살던 세상을 우리가 직접 보고 느껴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배우게 된다. 환자로서의 경험을 해 본 의사가 뛰어난 임상의가 될 수 있듯 이해의 본질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오해와 분열은 한쪽의 생각만 들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두 배로 듣지만 공평하게 들으라고 주셨을 것이다. (...) 무엇보다 우리의 두 귀로 찬성과 반대, 빛과 어둠을 균형 있게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 P190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꿈꾸고 또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한계가 있다. 모두가 의미 있는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부여한 만큼만 의미를 갖는다. 가상의 선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정의한 것만 지킬 수 있다. 비록 자신의 꿈에 대해 동의했다 해도 이후로 그 동의가 잘 지켜지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연습이다. 연습은 내가 꿈만 꾸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 P193

기독교 신앙에서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체성이 없으면 대개는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패션, 맛집, 자동차, 사는 집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또 보여 주려고 한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있다면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방향 감각을 가지려면 내면이 건강해야 하고, 이를 키우기 위해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 P197

좋은 소설은 절대로 빨리 읽을 수 없다. 반면 흡입력이 뛰어나서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설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짜 좋은 소설은 다르다.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내 삶을 흔들어 놓는 문장들 때문이다. 글은 글 쓰는 사람을 닮아가기에 독자들도 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 P201

선지자들은 모두 관찰자였다. 당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던 죄된 삶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은 익숙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곧 반문한다는 의미다. 반문이란 ‘내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자신의 생각에도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 P225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창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누구든 이 땅이 타락하거나 부패하는 걸 막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꼭 시인이나 소설가로 제한되지 않는다. - P233

좋은 문장은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넘어설 뿐 아니라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즉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다양한 시선으로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생각의 프로세스를 바꾸는 훈련이기에 사지선다형 문제를 통해선 배울 수 없다. 오직 서사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P235

하나님은 신앙인의 삶과 가정뿐 아니라 그 일하는 곳에도 임재하신다. 그런 면에서 일은 직업이 아니라 미션이다. 사실 일의 본래적 의미는 돈이 아니었고, 타락 후 주어진 저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은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직업이 좁게는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은 신의 자취를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 P246

이 땅은 여전히 불완전하기에 모든 선한 일에도 그늘이 있다. 큰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그림, 보이는 앞면과 보이지 않는 뒷면, 말로 설명한 것과 마음속에 감춰 둔 메시지를 찾아내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이런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영적 은사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 P248

불신자들은 모순된 생각을 한다. 진화론을 믿으면서 세상이 공정하길 바라는 게 그것이다. 이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세상에선 속임수에 능하거나, 힘이 세거나, 적응력이 빠른 자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역사도 이것을 증명한다. 반대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사람들이 정의를 믿어야 한다. 옳은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 P251

하나님이 풍요와 결핍을 선물하시는 목적은 같다. 그것이 주어진 뜻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풍요를 축복으로만 읽고 결핍을 문제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풍요를 가지면 자만하게 되고 결핍을 채우지 못하면 자학한다. 어느 경우든 오독하면 외부의 시선과 잣대에 스스로를 가두기 십상이다. 풍요처럼 결핍도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인생이란 바둑판 위에서 의미 없는 돌이란 없다. 즉 결핍에도 그것에 주어진 의미가 있다. - P256

가면을 벗는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다윗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있는 ‘자기 보호‘란 틀을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궁창 같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덮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문학이 우리의 내면을 직시하도록 도울 것이다. - P263

아름다운 삶이란 금수저의 삶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려고 눈물짓고 아파하면서 애쓴 흔적이 있는 삶이다. - P266

신앙인은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지만 불확실한 삶이 주는 아픔도 동시에 겪는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 제목을 모두 들어주시지 않으며, 고통을 다 없애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 돈이나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괴리가 견딜 수 있는 최대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때 우리는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낙심한다. 하나님은 사소한 것은 즉답하시는데 반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 P267

성숙함은 성경 지식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자신을 읽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 자신을 읽지 못하면 우리의 헌신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기 쉽다. 물론 자신을 읽지 못해도 성경의 진리를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읽을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삶도 읽을 수 있다. - P268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일이 아니다. 생활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생활에 밑줄을 그으려면 자기의 민낯을 읽어야 하고,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의 부족보다 용기의 부족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숨은 나‘를 노출하는 순간,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느끼는 순간 북쪽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한다. - P281

살다 보면 속상한 날도 많지만 그로 인해 조금씩 성숙해졌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걸, 많은 이가 사랑의 결핍으로 죽는다는 걸 종종 잊는다. 신앙인이 공감의 빈곤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문학을 모르면 하나님에게만 둔감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삶에도 둔감해진다. - P286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문학이란 선물을 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소설은 내가 본 세상, 내가 겪은 세상 혹은 내가 알고자 하는 세상을 서사로 표현한 것이기에 작가는 소설을 통해 독자의 사고를 확대시킨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사고를 확대시킨 것과 같다. - P298

문학은 매스컴이 놓친 것을 서사로 들려준다. 소설은 상상이고 현실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작가가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독자는 무지에서 깨어난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발견이고 설명이기에 작가의 시선은 늘 시대와 맞닿아 있다. - P307

삶이 불확실해지면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정치와 문학이 잘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종종 편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곤 한다. 사랑과 용서가 아닌 미움과 증오를 부추긴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닐 것이다. 종교와 언어와 피부색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를 증오한다면, 그리고 종교나 전통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 P310

소설이 가진 특권이 있다.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 받았다. 이것을 허구라고 부르는데, 비록 상상이지만 상상 이상이다. 작가는 허구를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피카소도 상상이 사실보다 진실하다고 믿었다.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최고의 장치가 분명하다. - P314

인간의 삶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큼이나 타인에게도 속해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도 알고 보면 인간이란 공통분모에 맞닿아 있다. - P319

때로는 소설을 읽는 것이 등산만큼 힘들 때가 있다. 문학이 삶의 이면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면서 산다. 혼란스런 세상이지만 이기적 유전자로 규정되는 ‘나‘라는 존재를 넘으면 세상은 살만해진다. 나를 넘어 이웃으로, 이웃을 넘어 제3세계로 건너가면 놀라운 것들이 보인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가 사는 내내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P320

사람들은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긴 했지만 삶의 지혜가 내면까지 스며들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삶을 살아온 폭이 좁거나 말씀대로 살기를 일찍 중단할수록 세상에 대한 시각은 협소하고 엉성하다. 중년이 되면 대부분은 사는 데 지쳤거나 자신의 경험을 너무 믿어 새로운 것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는다. 신념을 중단하는 순간은 모든 것을 잃는 시점이 될 수 있는데, 아주 소수만이 불확실한 현실을 탐색하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 P337

인생이란 전류는 불규칙하게 흐른다. 그 속에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반목, 미움, 욕망, 배신, 질투도 있기 때문이다. 또 너와 나 사이에는 행복도 있지만 오해와 상처도 있다. 어긋난 인생, 찢겨진 가정, 편집증적 외로움, 무뎌진 분별력, 망각, 상한 마음, 편견과 왜곡된 욕망. 이것이 소설의 질료이고 시의 자양분이다. 깨어진 영혼은 엑스레이에는 찍히지 않지만 작가의 촉수에는 잡힌다. 작가는 고단했던 삶의 질료를 찾아내어 그 인생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 P350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늘 교훈만 찾게 된다. 우리에게 영성도 필요하지만 감성도 필요하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은 감성이지, 영성이 아니다.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을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문학은 허구적 인물을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보게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와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 P360

아무리 신실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기도의 사람이라는데 깊이가 없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허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신뢰하여 우상처럼 믿곤 한다. 우리의 최애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해석하는 내 관점일 때가 많다. 그것을 에고(ego)의 집착이라고 한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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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12-06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삶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큼이나 타인에게도 속해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도 알고 보면 인간이란 공통분모에 맞닿아 있다.˝.....이 생각 저도 오늘 읽은 ‘스토너‘ 책 보면서 생각했어요......

올려놓은 신 발췌문 다시 보니...또 좋네요 ^^

라파엘 2021-12-06 18:03   좋아요 1 | URL
한님 덕분에 저도 좋은 책을 접하고 많이 배우게 되네요. 읽으려고 계획한 책들을 읽고 나서, 스토너도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