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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할데 ㅣ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헤르만 헤세도 꽤 오랜만인데 역시나 재미있다. 아직까지는 독일 작가 중에선 헤세가 가장 좋다. 자기 고뇌에만 집중하는 타 작가들에 비해 이 분은 이야기에 먼저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루는 주제도 자아나 정체성에 대한 거라서 막 어렵지도 않고, 남녀노소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호불호도 거의 없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헤세는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데, 인간으로서의 헤세는 과연 어떠할까. <로스할데>를 읽고나서 헤세가 마냥 옥구슬 감성러는 아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이가 틀어져 버린 화가 부부. 남편은 로스할데 저택 별채에서, 아내는 안채에서 각자 별거하고 있다. 아들이 둘인데, 큰 애는 오래전부터 엄마 편에 가있다. 작은 애가 유일한 가족의 연결고리인 상황. 이에 화가의 절친은 자기와 인도에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고민 끝에 인도행을 결심한 순간, 그동안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부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작은 애가 뇌막염으로 숨지고 화가의 생명도 반 토막이 난다.
늘 그렇듯 이 작품도 자전 소설이다. <로스할데>는 헤세의 가장 안 알려진 작품 중 하나란다. 기존 방식처럼 상반된 두 인물의 이야기도 아니고, 해설을 읽어야만 겨우 이해할 주제였기 때문이지 싶다. 여튼 지루한 초반만 잘 이겨내면 꽤 재미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한테 가족이 꼭 필요한가‘ 하는 고찰을 던지고 있다. 본업에 진심인 화가는 가족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아내와는 한참 전에 멀어졌고 큰 애도 아빠를 싫어한다. 종종 찾아와주는 작은 애랑도 놀아주질 못한다. 말로는 작은 애가 삶의 전부라지만 딱히 애한테서 기쁨을 얻는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 친구가 보기에 얼마나 답답했겠나. 이 로스할데에 메여있다가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작은 애를 아내에게 맡기고 떠나려는 주인공. 어떻게 보면 참 무책임한 냉혈한이지만 사실 예술가의 기질이란 게 지밖에 모르는 거라서 막 비난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아빠를 싫어하는 큰 애는 피아노를 전공 중이다. 작중에는 그런 묘사가 없지만, 아들은 아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중이었지 싶다. 막연하게 예술에 뛰어든 자신과 달리 아빠는 저 나이에도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실력과 명성까지 갖춘 아빠는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였을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본인 예술 하기에 바쁜 아빠는 아들의 일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철부지 동생만 이뻐하고 있으니 많이 서운했을 터. 한 번은 아빠의 예술 철학에 대해 들으며 내심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꺼낸 얘기였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같은 예술가로써 지도와 조언을 해줬었다면, 같은 예술가로써 대우하고 인정해 줬었다면 부자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을 텐데. 남자들이란.
작은 애가 점점 아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는 것은, 점점 시들해지다 끝나버린 헤세의 결혼생활을 표상하고 있다. 아홉 살 연상의 신경질적인 아내를 못 이기고 인도로 도피했다는 헤세. 근데 한편으로는 헤세의 부족한 현실감각 때문에 아내가 화딱지 났던 걸 수도 있겠다. 헤세가 워낙 이상주의자라서 말이지. 여하튼 집안에서 자그마한 희망의 끈이 돼주었던 작은 애처럼, 헤세도 어떤 가느다란 끈을 붙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희망마저 끊어지자 슬픔과는 별개로 놀랍도록 차분해지고 평안해지는 화가였다. 가족한테 받았던 방황과 소외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작은 애를 간병하며 아내와도 사이가 좋아져서 혹시나 했는데, 화가는 예정대로 로스할데를 떠나기로 한다. 슬퍼하는 아내가 그를 강경하게 막지 못한 것은, 실패한 결혼생활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음을 남편이 인지해서였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헤세의 아내가 공격수였던 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리 멘탈 헤세도 언제까지나 수비수는 아니었다. 반격할 틈을 찾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헤세의 스타일 같지가 않다. 일단 고뇌의 결과가 현실도피로 끝난 것도 그렇고, 묵직한 주제에 비해 이야기는 다소 싱거웠고. 게다가 그 주제들도 좀 모호하게 다루고 있다. 또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예술가와 기혼자가 아니면 썩 공감되지 않을 장면들로 가득했기에. 아무튼 헤세 작품은 늘 대만족이다. 올해는 헤세의 전작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