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페로니 전략 - 내 안에 숨어있는 20% 매운맛을 찾아라!
옌스 바이트너 지음, 배진아 옮김 / 더난출판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공격성보다는 내면의 두려움을 없애라

 

 

 이 책을 보면서 과거 직장을 다닐때 내 모습이 떠 올랐다. 그 중에서도 과장이란 위치에서 근무했던 직장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떠 올랐다. 이는 과장이란 위치가 회사에서 맡고 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아는 단계이었고, 한 과, 대략 10여 명 정도,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나에게 지시하는 부장과 임원을 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되돌아 보면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자가 말한 팀 내에서의 역할, 즉 리더, 막후 실력자, 장교, 단순가담자, 외톨이, 단짝, 심부름꾼, 희생양의 모든 단계를 한번씩은 다 거쳤던 것 같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떤 조직, 직장에 근무하게 되면, 자신이 경력사원이나 외부에서 초빙된 전문가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번쯤 은 이 단계들을 하나씩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과장으로 근무할 당시를 되돌아 볼 때면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이 있다. 그는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능력 있는, 그러면서도 부하직원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장이었다. 아마 그 사람이 이 책에 나와 있는 페페로니 지수 평가를 해 봤다면 최적의 점수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그 부장에게 한 가지 독특한 기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부서에서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된다는 낌새만 보이면,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 그 일을 자기 부서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타 부서의 일을 하나씩 가져올 때마다 그 업무에 맞춰 자기 부서의 인원이 늘어나게 되고, 또 업무에 필요한 타부서의 예산을 자기 부서로 가져오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서 예산 역시 덩덜아 함께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한 2년쯤 하고 나니 그 부장의 부서 직원은 거의 80명에 육박하는, 대개 일반적인 회사에서 가장 규모가 클 수 밖에 없는 영업부서보다도 더 큰 조직이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해 물건을 만드는 생산공장과 만들어진 물건을 판매하는 영업부서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핵심업무가 그 부장이 관리하는 부서로 이관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임원회의 때 무척 복잡하면서도 예민한 업무 하나가 안건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그 때 타부서 부서장들은 입을 모아, 당연히 그 부장에게 그 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장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A부장. 당신이 맡아야지, 당연히

 

  그리고 1년 후, 그 때 맡은 업무의 실패로 인해, 그 부장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직원들의 송별식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조용히 자기 짐을 싸 들고 어느 날 갑자기 직원들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별로 크지도 않은 중견기업에서 왜 그런 복잡한 일이 생겼는지, 임원회의 당시, A부장이 그 일을 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 졌는지, 그리고 그 회사의 최고 인재들만으로 구성된 그 부서에서 어떻게 일 처리가 잘못되어 부서장이 사표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내가 잘 아는 선배 한 분이 있는데, 그 선배는 아는 것이 워낙 많은 데가,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이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하면 거절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돌아 오는 것도 없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심부름만 해 주다 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얼마 전에 그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그 선배에게 한번 물어 봤다. . 예전에 형이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던 사람들은 지금 뭐하나요? 형이 그 사람들 덕 좀 봤나요? 이 당시 내 말의 의미는 도움을 받고 모른 척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얄밉지 않냐는 의미였다.

 

  그 때 그 선배 왈 지금 내가 대학원에서 교수로 강의하고 있잖냐. 너도 알다시피 내 학벌로 어떻게 대학원 강단에 설 수 있겠어? 하지만 10년 전에 내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에게 신세 진 그 분이 대학원장이 되자마자 나를 불러 강의하라고 하더라. 인생에서 10년 금방 아니냐? 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지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 선배에게 이 책에 나와 있는 페페로니 지수 테스트를 해 보라고 하면, 어떤 점수가 나올까?

 

  이제 우리는 예전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도 혼자의 힘으로. 그리고 이제는 내가 지금 속한 조직과 팀 역시 과거처럼 한번 들어가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조직이 아니고, 수시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이동이 불가피한 조직체가 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곧 조직 내에서의 역할과 위치 역시 수시로 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의미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얼마동안 근무할 것 같은가? 5년, 아니면 10년?

 

  80 평생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짧으면 1~2년, 길어야 10년 같이 지낼 조직 속에서, 오늘 만났다 내일 헤어질 그들과 힘겨루기가 어느 정도나 의미 있는 일일지? 정말 길어봐야 10년 정도의 세월 동안 머물다 떠날 직장 속에서 구지 내 옆의 동료들과 경쟁을 해 가면서까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그들에게서, 또 직장이나 조직 내에서 저 사람은 무척 공격적인 것 같아! 또는 저 사람은 성공밖에 모르는 냉정한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그러한 사소한 평가 하나때문에 더 긴 세월동안 주위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이 맞는 건지? 

 

  물론 2차 대전 때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독일의 롬멜장군을 격파하고, 연합사령부의 명령까지 무시해 가면서 프랑스 한 복판을 진격해 올라간 패튼장군, 그처럼 승리하는 것이 나의 존재가치이며, 인생의 목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경우에는 제외하고.

 

  심리학자들은 공격성이란 두려움으로 인해 나타나는 일종의 방어행위라고 한다. 즉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대방의 의도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이 맞다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외부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지를 몰라 하루하루 고민하며 지내는 것보다, 내가 왜 저런 말에, 저런 행동에, 그리고 저런 태도에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 즉 다시 말하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가운데에서 왜 특정한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지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우리가 잠깐 머물다 떠날 조직에서 순간 순간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누가 나를 공격해 와도 그들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굳건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더욱 올바른 삶의 자세가 아닐까하고 잠시 생각해 봤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만이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물론 이런 생각은 나의 부족한 지식과 짧은 경험으로 인해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화살이 스스로 땅에 떨어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녁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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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스펜서 존슨
스펜서 존슨 지음, 안진환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행복하기를 원하면 우선 나를 소중히 여겨라

 

 

  나의 직장생활 19년을 되돌아 볼 때면, 머리 속에 떠 오르는 건 일 때문에 밤새도록 책 보고, 하루종일 고민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서를 고치고 한 것밖에는 기억 나는 게 없는 것 같다.

 

  그 당시 누군가 나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나요? 라고 물어봤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일이 나를 먹여 살려주니까, 그리고 내 미래를 보장해 주고, 나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해 주니까 라고. 그리고는 별 웃긴 놈 다 보겠네. 바빠 죽겠는데 라고 투덜거리면서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더 많은 일을, 더 빠른 시간에, 더 적은 직원들을 데리고, 더 나은 결과 물을 상관에게 갖다 주는 것이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고, 내 행복을 약속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나 역시 그 동안 자신 있게 진행해 왔던 한 사업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그로 인해 그 사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고민과 번민, 불안 속에서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더 하다가 결국엔 이런 삶 자체가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아침 9시까지 정해진 사무실로 출근하여 지정된 책상에 앉아, 내 의사와는 별 상관없이 지시 받은 일을 해야 하는 그 곳을 미련없이 떠났다. 자유로운 삶을 찾아.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직장 그만 둔 첫째 달은 직영주유소 사장한답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했고, 그 다음 달은 주유소 때려치고 집에서 뭉기럭거리다 한달이 지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물론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 먹는 일은, 신규사업을 진행하는 개인 사업자들의 사업계획서를 대신 작성해 주는 일이다.  

 

  며칠 전이었다. 그 날 따라 이상하게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노트북 속에 촘촘히 글자가 써 있는 화면을 쳐다보며 다른 사람의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주는 내 모습이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곤 얼마동안 잠잠히 지내던 내 안의 내가 또 다시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1 내가 왜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서 내 일도 아닌 남의 사업계획서를 써 주고 있는 거지?

2 "그거야 먹고 살려고 하는 거지. 그나마 넌 그래도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1 하긴..

2 !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빨리 끝내

1 근데 지금 이 일이 내가 직장에서 하던 일하고 뭐가 다른 거지?

2 다를 게 뭐 있어. 직장에서는 정해진 월급 받으며 일한 거고, 지금은 일 시키는 사람과 흥정해서 가격을 결정하는 거지!

1 그래!

1 그래?" "그럼 내가 무엇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둔거야? 회사에서 하는 일과 똑 같은 일을 하려면 차라리 직원들에게 일이나 시킬 수 있는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게 낫지!

2 니가 회사생활이 이젠 지겹다며! 그리고 남의 일 하고 싶지 않다며! 그리고 너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잖아.

1 그랬지. 근데 이 일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사업계획서가 나를 위한 일인가?

2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과거처럼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해 니 나름대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나갈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도 돈 받을 거 다 받아 가면서.

1 그래.  최소한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일을 맡을 지 말지도 내가 결정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고

2 ! 이 일은 니가 다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너한테 일을 맡긴 것이고. 최소한 과거처럼 니가 쓴 사업계획서대로 사업이 안 됐다고 욕 먹을 일은 없잖아. 안 그래?

1 그건 그래. 과거처럼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일을 하다보면 내가 가진 전문성을 계속 키워 나갈 수도 있으니까. 또 이젠 내 개인 이름으로 일을 하는 거니까…”

2 그래 맞아. 그러니까 이젠 예전보다 더 잘해야지. 좋은 결과 하나하나가 미래의 너를 만들어 주는 발판이 되는 거니까

1 그래!!! 근데 하나만 물어볼게. 지금 나는 왜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거지?

2 “…..

 

  내가 자진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내가 왜 갑자기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알려달라는 내 질문에 열심히 내 곁에서 떠들어 대던 또 '다른 나'는 어디론 가 사라져 버렸다. 나의 미래를 위해 내 자신의 캐리어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일을 하면서, 그것도 돈을 받아 가며 당당하게 일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지 물어보자 마자 그 목소리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내 곁에서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할 말이 없어서인가?

 

  이제 혼자 남아있다고 느끼게 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창 밖을 내다보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내 자신을 위해 지금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고 물어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나의 행동은 스펜서 존슨이 쓴 [행복]에 나와 있는 한 문장이 생각났고, 그가 말한 1분이란 짧은 순간의 의미가 내 머리 속에 떠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문장은

 

  “1분 동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는 거야.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 지금,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계속된다.

 

  "1분이란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관찰하는 일이 매우 강력한 무언가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란다. 즉 자기 자신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지혜에 이르도록 한다는 말이지. (중략) 나의 행동을 관찰해 보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정지 신호에 멈춰서는 것과 같단다. 그 정지신호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대답을 얻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1분은 더 되었겠지만, 그래도 그 대답은 무척 쉽게 찾아 낼 수 있었다. 과거처럼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가지 대안을 찾고, 그 중에서 가장 최선책을 고르는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그저 단지 정말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 무얼까? 라고 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는 순간, 바로 대답이 생각난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조용한 밤에, 저녁을 먹은 후 커피 한잔을 타 놓고, 일 같은 골치 아픈 것들은 모두 다 잊어 버리고 편안하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은 채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떠 오른 생각은, 집 앞에 있는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뒷짐을 짓고 급할 것 없는 상태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도심의 소음을 피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숨이 가빠지게 될 것이고, 그 때 나무 그늘에 앉아 얼음물 한 모금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힘차게 내 뿜는 진한 공기를 마시는 것. 그리고 집으로 돌아 와 내 몸에서 땀으로 쏟아 낸 묵은 노폐물을 씻고, 개운한 마음으로 맛있게 밥을 먹는 것. 그것이 다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그 다음 날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오로지 일 생각만 했던 내가 내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자료와 정리하다 버린 낙서장들을 책상 옆으로 밀쳐 놓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2시간을 소비했고, 밤 9시면 일거리를 집어 던지고, 그 일이 오늘 당장 끝내야 할 일일지라도, 커피 한 잔을 타 놓고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은 채, 책장 속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정겨운 책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나에게 사업계획서를 써 주는 일을 해 보라고 권했던 선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 형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사업계획서 쓰는 일에서 재미를 느낄 거라고 어떻게 알고 그 일을 하라고 재촉한 거예요? 내가 그토록 지겨운 일이라고 말했는데도. 처음엔 일하기 싫어 혼났는데, 그 일을 며칠 하다 보니 저도 슬슬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스펜서 존슨의 행복 속에 나오는 한 문장, 지금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은 어느 날 갑자기 불행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그리고 그 이유를 찾지 못해 더욱 서글퍼진 나에게 행복이란 저 멀리 있는 파라다이스가 아닌, 바로 내 어께위에서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을 기다리는 파랑새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스펜서 존슨의 행복 중 잊혀지지 않은 문장 2개가 있다.

 

  “내가 희생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니 진짜 나를 학대하는 장본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게 되더구나. (중략) 바로 내 자신이었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사이의 틈을 잘 관찰하는 것이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지. (중략)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은 성취감을 느끼지만 가진 것을 원하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법이야.

 

  스펜서 존슨은 이 책에서 우리가 행복에 다가갈 유일한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는 행복을 갈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민하지만, 결과적으로 행복이란 것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누구나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 스스로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 같다. 

  사과가 익으면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단순하지만, 도리어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것 같기에 잊고 지내왔던 행복 속에 담겨 있는 하나의 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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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남은 아름다운 날들
베스 켑하트 지음, 윌리엄 설릿 사진, 공경희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챈티클리어를 만들어 줄 아돌프는 어디에 있는가?

 

  

  내 생에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내가 받은 축복 중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나?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기억될까?  어느 날 저자 베스 켑하트의 머리 속에 떠 오른 질문이다. 그리고 엄마이자 아내이고, 딸이자 자매, 친구인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30에이커쯤 되는 챈티클리어 정원에 왔다. 그녀가 이 곳을 찾은 때는 바로 자신의 생일, 마흔 한살이 된 그 날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는 삶에 대한 의미와 방향을 찾은 듯했다. 그녀는 정원에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을 아주 강렬하게 사로 잡은 것은 정원에서 느끼는 차분함이었다. 그곳에서는 걱정거리도 줄고 마감이나 혼란스러움에도 덜 쫓겼다. 잃은 것보다는 얻는 것과 감사함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내 나이조차 축복으로 여겨졌으며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조용히 해답을 얻었다.

 

  급하게 달려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조금 더디게 한 후, 그녀는 그 곳에서 자연의 숨결을 호흡하며 삶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여유로움을 느낀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연, 바로 그 곳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책 속에 담겨져 있는 흑백사진과 함께, 자신이 정원에서 느꼈던 자연의 평화로움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숭고함을 조용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해 주고 있다.

 

 

  몇 주전인가. 대학교 선배와 함께 전주시에 있는 신문사에 일에 있어 그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신문사 사장님과의 시간 약속이 지체되어 시내 도로변 구석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전통차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 찻집은 우리가 평소에 잘 가는 커피숍과는 다른, 옛 한옥집 그대로를 찻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와지붕이 있고 툇마루가 있고 안방과 사랑채가 아담한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마당에는 화사하게 핀 꽃들과 조화를 이룬 잡초들이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었고, 그 구석에는 돌로 만든 절구와 돌상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디에선가 은은히 퍼져 나오는 목탁소리와 풍경소리는 그런 고용함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전주 시내 한 복판임을 잊어 버린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찻집은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 가끔 보았던 대청마루와 사랑채가 있는 단순한 한옥집이었을 뿐이었지만, 그 날 내가 느낀 감정은 어릴 때 받았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그런 느낌이었고, 산 속에 있는 절이나 등산을 하다 만나게 되는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은 점차 편안해져 갔고, 곧 이어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달콤한 졸음이 내 어깨를 넘어 눈가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 곳이 그 동안 내가 보았던 자연과는 다른, 우리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보존되어 온 자연공원이나 산 속의 절간이 아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그래서 내 인생의 구석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선배와 나는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느끼는 여유로움과 평안함은 바로 여기가 우리들의 유전자 속에 담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 자식들에게도 물려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삶이 아무리 진화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미래는 SF 영화에 나오는 첨단 과학으로 이루어 진 삭막한 철제사회는 아닌 것 같다. 도리어 우리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그리고 수 천년동안 우리들 유전자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것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미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래된 미래'를 구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삶의 모습을 우리 인생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우리 세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가를 없애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고, 단층 기와집을 허물어 버리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고창한 거목을 잘라내고 그 곳에 시멘트 건물을 짓는 것이 현대화이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맑디 맑던 개천이 화학약품으로 범벅이 되는 것 쯤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아 온 지금의 4050 세대들. 인생의 성공이란 좀 더 나은 경제력을 얻는 것이었고, 사회적인 지위 상승은 서구의 합리주의를 배우는 것으로 얻어 질 수 있다고 확신했던 50년, 60년대 생들.

 

  이와 같은 우리의 발걸음으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 남긴 것은 유기물에 오염된 고기와 중금속으로 범벅된 야채들, 그리고 이유 모를 여러가지 질환과 항생에 내성이 강해진 세균들 뿐.혹시 한 조각의 음식과 순간의 심리적인 만족을 위해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현대화라는 미물에게 팔아 넘긴 것은 아닌지?

 

  내가 예전에 더러운 곳이고 미개한 삶이라고 버린 이 곳이 지금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나에게 웃음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자식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논, 밭을 팔아 학비를 대준 후,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따돌림을 당한 늙은 노부부의 모습이 떠 올랐다. 나를 키우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그들이지만 대화가 안 통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손주 한번 제대로 안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우리의 부모님들.

 

  그녀는 챈티클리어를 만든 아돌프 로젠가르텐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초 이 곳은 아름답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사유지가 되었다. 챈티클리어라는 이 정원은 아돌프 로젠가르텐 주니어의 선물이다, 성공한 사업가인 그의 부친은 1913년에 이 부지를 조성했다. 아돌프 로젠가르텐 주니어는 챈티클리어 언덕에서 성장했다. (중략)이 땅에 대한 아돌프의 사랑은 실질적이며 시적이었다. 그는 나무를 사랑했고, 연못을 사랑했고, 풍경을 사랑했고, 고요함을 사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인근이 교외 주거단지로 변해도 그는 이 부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돌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언덕을 불도저로 밀고 똑 같은 모양의 집들을 세우는 것을 참지 못한 덕분에 챈티클리어는 오늘 날 존재한다.

 

  우리의 아돌프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돌아 갈 곳을 지켜줄, 아니 나는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다 치더라도, 내 자식과 그 자식들이 돌아갈 우리의 챈티클리어를 보존해 줄 그는 누구일까?

 

  베스 겝하트는 이 책을 통해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었고, 그리고 물 속에 잠긴 돌상을 바라보며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해 주었다. 엄청난 인생 철학이 아닌 20분이면 돌아 볼 수 있는 한 정원 속에서의 일기를 가지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돌아 갈 곳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 곳 챈티클리어가 바로 그 곳이예요. 이제 당신도 자신의 챈티클리어를 준비해야 되요. 지금 시작해서 혹시라고 내가 갈 수 없다면, 내 자식과 그 자식들이라도 인간 본연의 호흡을 느끼고 자신 속에 담긴 자연의 유전자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죠. 이제는 챈티클리어를 상상만 하지 말고 실제로 만들어 보세요. 언젠가는 우리가 돌아 가야 할 유일한 삶의 고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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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는 기억이라는 깊은 호수 속에 잠겨 있다. 이것들은 눈으로는 볼 수는 있지만, 손으로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파일럿 피쉬가 되어 준 그 누구이다.’  [파일럿 피쉬]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 [파일럿 피쉬]는 우리들이 살아 오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온, 그렇기에 일상적으로 항상 부딪치면서도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은 책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소재 자체가 소설의 주요 테마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 왔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책 자체의 이야기 전개와는 상관없이,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건이나 서로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독자 자신의 지나간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내 모습을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과거에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전화를 한다면 나는 뭐라고 반응할까?

나와 헤어진 그 사람은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 같으면 한 직장에 19년을 다닐 수 있을까? 그것도 남들에게 내 세우기 불편한 일을 하는 직장에서 등등.

 

그리고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들이 색 바랜 영화필름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갈 것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들에 대한 회상과 후회, 그리고 고마움의 감정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마음이 복잡해 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나 인간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습과 같은 거창한 이정표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단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깨닫지 못한, 내 안에 잠겨있는 깊은 호수 속을 한번 들여 다 볼 수 있게 나를 그 곳으로 이끌어 주기만을 바랬다. 오랜 시간 돌보지 않아 물이끼로 탁해진 호수의 수면을 걷어내고, 그 안에 고요히 잠겨 있는 과거의 아련한 추억들을 하나씩 수면 위로 끄집어 내 깨끗이 닦아 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기만을 바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느꼈기에. 그리고 저자 오사키 요시오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나를 그 곳으로 이끌고 간다.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한, 그리고 무척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덧붙여 보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파일럿 피쉬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의 파일럿 피쉬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내가 나의 파일럿 피쉬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렇기에 함께 모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 간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도, 사랑과 증오도, 그리고 고통의 거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는 또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고, 내가 누군가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면 그 역시 또 다른 누군가를 울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라는 작은 잎사귀 하나가 호수에 떨어져 일으킨 잔잔한 파문은 호수 전체로 서서히 번져 갔을 것이고, 그러한 파장의 물결은 결국엔 나에게 다시 다가와 내 잎사귀의 갈라진 틈새 하나를 건들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파일럿 피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파일럿 피쉬로 삼고 살아 왔을 것이고, 나 역시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가 되어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일럿 피쉬들의 연결 속에서 내가 보낸 하나의 메시지가 결국 나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사람은 항상 받기만 하거나, 또 반대로 주기만 하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린채 항상 다른 누군가 만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기에.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조차 가난한 자, 그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심적인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너무 무리한 정의일까?

 

파일럿 피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역할을 고통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삶 자체가 자신의 삶이라고 알고 있기에. 그리고 자신 역시 자신을 위한 파일럿 피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파일럿 피쉬를 보며 불쌍하다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 가는 이 세상에서 습득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 버린 자와 버림을 받은 자의 이분 법적인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판단이 아닐까 하는.

 

과거 언젠가 나를 위해 살았다고 기억되는, 나의 파일럿 피쉬였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그 순간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그 순간들을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순간을 되돌아보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는 불쌍한 사람인가?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뿐이다.

 

나는 우리들이 파일럿 피쉬의 삶을 불쌍하게 바라보기 이전에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파일럿 피쉬의 삶을 사랑하고, 그런 행동을 기리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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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지금의 이해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서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때문에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2년 동안을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친구 한 명과 헤어지게 된 사건이다. 그것의 발단은 성모 마리아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다. 아버지쪽 집안도, 어머니쪽 집안도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태어나자 마자,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물론 물어 봐도 아무 말 못했겠지만, 차디 찬 성수로 세례를 받았고, 지금의 이름도 그 때 받은 세례명을 그냥 호적에 올려버린 것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유아세례를 시작으로, 국민학교 때 영세, 고등학교 때 견진 성사, 대학원 마치고 혼인성사, 이제 죽어가면서 종부 성사만 받으면 천주교 신자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다 받는 것이다.

 

태생교우란 천주교 내력을 가진 나에게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도전을 한 것이다.

 

! 너희 천주교 신자들은 왜 사람을 믿냐?

사람을 믿어? 예수님 말하는 거야?

아니 예수님말고, 마리아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예수님 엄마 말이야!

! 너 성모 마리아님에게 감히 예수님 엄마가 뭐냐? 넌 느그 할머니한테도 할망구라고 부르냐!

 

이렇게 말로 옥신각신하다 그 다음엔 몸싸움으로, 그리곤 주먹 싸움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발이 상대방의 얼굴로 가슴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엔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 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언제인지 날자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주일미사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리고 성당 제단 앞에 놓여 있는 성모 마리아상으로 눈길이 갔다. 그 때 그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친구가 그립죠! 누구의 잘못이든지 간에. 난 이미 축복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고, 하늘에 올라 성스러운 자리에 있어요. 세상의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버림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헐뜯는다고 해서 나의 성스러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죠. 나는 이미 성스러움 그 자체로 있어요. 마치 하느님(하나님)의 존재와 성스러움이 인간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를 위해서 화 내지 말고 사소한 일로 친구와 헤어진 자신을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바로 자신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함이니까요.'

 

홀로 성스럽고 홀로 존재하는 신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 종교란 이쁘다고 해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다니는 패션의 한 방법이거나,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명상과 같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그 사람의 근본적인 신념체계이자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종교의 이름으로 어떤 시대엔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였고, 어떤 시절엔 자신의 종교를 강제로 전파하고자 조용히 살고 있는 나라를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한 종교성을 이용해서 한 민족의 말살정책을 거리낌없이 선포하고 실행했으며, 또 언젠가는 신의 이름으로 대도시 한 복판에 있는 대형빌딩을 스스럼없이 비행기로 폭파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 유다복음을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면, 세계의 3대 종교 중 2개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이단적인 악음(Demon Words)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도 못한 새로운 종교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다복음의 내용은 이 책을 감수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신화를 그대로 이어 받은 듯한, 그래서 그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바로 진리라고 말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구약성서에서의 야훼, 신약성서에서의 하느님/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모두를 하급 신으로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신은 하급 신이며 그 위의 더 높은 천상에는 다양한 영계가 있고, 이러한 영계들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영이 아닌 혼을 가진 사람은 셋의 자손일 뿐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닌 지식이 필요하며, 이 세상의 모든 중계자들은 모두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있다. 등등

 

그러나 긍정적으로 이 유다복음의 내용을 바라본다면, 이 복음은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필요한 지식을, 필요한 만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고마운 복음이라고도 규정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의식혁명]을 쓴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인간의 정신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진화단계는 아주 낮은 단계, 즉 미움과 질투, 공포를 느끼는 수준에서부터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랑의 단계, 그리고 그 위에 예수와 같은 수준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는 점진적인 진화가 아닌, 계단식의 진화로 발전되어 나가는 데, 이러한 진화는 인간 스스로가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디에 선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려 받음으로써 이루어 진다고 한다. 불의 사용, 농경시대의 시작, 그릇과 무기 사용, 그리고 수많은 이론과 발명 등등.

 

그리고 [아직도 가야 할 길]로 유명해 진 심리학자 M. 스캇 펙박사는 이러한 정신적인 진화를 통해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의 목적지는 바로 우리가 태어난 곳,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호킨스 박사나 스캇 펙 박사의 논리가 맞다면 우리들이 어떤 사물이나 이론, 그리고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거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이미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정신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본다.

 

띠라서 유다복음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이 감내할 수 없는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어쩔 수 없이 오랜 세월 잠자고 있다가, 우리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라도 해석한다면 너무 허무맹랑한 논리일까?

 

유다복음은 분명히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하는 것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지 간에. 그러나 나의 지적 수준이 부족하기에 , 그래서 유다복음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지 지금 내가 가진 지적 수준으로는 알 수 없기에, 이 책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는 것과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정의 내려진 것이구나 하는 두 가지만을 이해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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