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잠자리에 누운 내 아버지는 비행기 소리를 듣곤 했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독일 비행기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밤이면 다시 독일로 날아갔다. 런던에서 동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켄트Kent 지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는 1934년에 태어났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가 다섯 살이었다는 뜻이다. 켄트는 영국의 폭탄 골목Bomb Alley으로 불렸다. 독일 군용기들이 런던으로 향하며 지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폭격기가 표적을 놓쳤거나 남은 폭탄이 있을 경우 돌아오는 길에 아무 곳에나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길을 잃은 폭탄이 할아버지 댁 뒷마당에 떨어졌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 P7

우리가 어린 시절의 흥미와 관심을 다 잃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스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이라면 모조리 읽었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몇 년 전 어느 날 책장을 살피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전쟁을 다룬 논픽션 서적을 엄청나게 많이 모아두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역사를 다룬 유명한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특수한 역사적 문제를 연구한 책, 절판된 자서전, 학술서까지. 그 책들 대부분은 전쟁의 한 측면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일지 짐작이 가는가? ‘폭격‘이다. 스티븐 부디안스키Stephen Budiansky의 《공군력 Air Power》, 타미 데이비스 비들Tami Davis Biddle의 《항공전의 수사학과 실제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토머스 M. 코피Thomas M. Coffey의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결정Decision over Schweinfurt》 등 폭격을 다룬 역사서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권만 더 예를 들어볼까? 로버타 월스테터Roberta Wahlsteter의 《진주만: 경고와 결정Pearl Harbor: Warning and Decisio 》을 읽어보았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책을 놓친 것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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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무라) 리도는 실크해트를 벗어 거기서 비둘기 다섯 마리를 잇따라 꺼냈다. 무슨 감자라도 캐는 듯했다. 리도는 실크해트에서 꺼낸 비둘기를 담담하게 무대에 풀어놓았다.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했다.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아시겠습니까? 비둘기를 꺼낸다고 선언하고 비둘기를 꺼낸들 누구도 놀라지 않죠." (마술사) - P1011

마술은 연출이 전부다.
지금은 나도 잘 안다. 물론 기술이나 트릭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잘 살려내는지는 연출에 달려 있다. 연출을 잘하면 시판되는 마술 도구로도 사람들은 놀라고, 연출이 서툴면 고도의 기술을 써도 쇼는 망한다. ‘지금부터 공중으로 떠올라보겠습니다‘라 말하고 공중에 뜨기만 한 내 무대가 프로 마술사인 누나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공중에 띄우기 위해 필요한 연출을 해야 했다. (마술사) - P15

작가가 되고 오 년째 되는 해 가을, 십오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교토 병원에서 아버지가 말기 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사후 수속에 관해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갔다. 오 분 정도 병실에 얼굴을 비쳤다가 병원에서 나와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한 줄기 빛) - P51

아버지의 글씨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처음 산 자전거에 아버지가 내 이름을 써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유성 매직펜으로 새 자전거의 흙받기에 내 주소와 이름을 썼다. 왜 그런지 그때 아주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년 뒤 깜박 잊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는 바람에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다. 자전거의 색깔도 모양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쓴 내 이름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분명히 자전거에 ‘도카이 데이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억한다. 도카이 데이오가 우승한 아리마 기념에서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왔다. (한 줄기 빛) - P58

플로리스 컵은 1907년 마필 개량을 목적으로 미쓰비시 재벌의 고이와이 농장이 영국에서 수입한 서러브레드 20두頭 중 하나다. 청일 및 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 육군은 군마의 질이 서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일본에서 말은 주로 감상이나 의례용이었고 군사 작전에 쓸 일이 없었다. 당시 국내산 말은 키가 작고 성미가 거칠어 전쟁터에서 해가 됐다. 가령 1900년 의화단 사건에서 ‘일본은 말처럼 생긴 맹수를 탄다‘라고 열강에게 비웃음을 샀을 정도다. 그 때문에 질 좋은 말을 생산하고자 거국적으로 경마 육성에 주력했다. 플로리스 컵은 바로 그런 시기에 수입된 영국의 서러브레드였다. (한 줄기 빛) - P59

남은 것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스 캐넌의 딸뿐이었다. 딸을 보여달라‘라는 (마미야) 쇼지로의 말에 브로샤르는 당혹했다고 한다. 아비를 모른다‘라는 말은 서러브레드에게 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서러브레드는 혈통이 전부다. ‘부모가 모두 서러브레드‘여야 서러브레드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혈통 등록이 시작된 18세기 이후 모든 서러브레드는 혈통서와 함께 관리되고 있다. 그 관리에서 벗어난 말은 서러브레드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소지로는 딸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한 줄기 빛) - P62

레티시아의 첫 새끼는 580엔이라는 비싼 값에 팔렸다.
경매 시장에서 육군 장교가 첫눈에 반한 탓이었다. 메구로는 3세대 전에 아랍종의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장교는 그 사 실을 알고 더욱 만족했다.
생산한 말이 군마로 징용되는 것은 말 생산업자에게 더없는 명예로 간주되었다. 검사소로 출발하는 날, 레티시아의 새끼는 군기軍旗를 짜넣은 천을 덮고 지역 주민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았다. 농장에는 무수한 일장기가 휘날렸다. 다른 군마와 함께 만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했다.
쇼지로는 울었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군마로 징용되는 명예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일본 더비에서 우승할 말이었다. (한 줄기 빛) - P77

쇼지로는 또다시 메구로에게 가장 알맞은 상대를 찾아 씨암말을 사러 두 번째 유럽 여행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거센 전화戦火로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3년에 정부가 경마 중지를 발표했고 이 년 뒤 도쿄 경마장은 식량난 해소를 위해 고구마 밭이 됐다. 다른 몇몇 중소 목장과 마찬가지로 마미야 농장은 경영난에 처해 전쟁이 끝난 직후 폐쇄됐다.
쇼지로는 서러브레드 몇 두를 매각한 돈으로 목장을 ‘마미야 승마 클럽‘으로 개조했다. 씨수말에서 은퇴한 메구로도 숭마용 말 중 하나가 됐다. (한 줄기 빛) - P87

우리가 사는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곧 현재입니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라는 상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모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일단 저는 이 모순에 대해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모순을 해결하는지는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모순 자체가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셨다는 뜻이겠지요. 그 또한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시간의 문) - P99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점은,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늘 알기 쉬운 위치에 있다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문‘에 관한 한, 과거가 바뀐 것도, 과거를 바꾸었다는 사실도 배경이 아닙니다.
배경은 세부에 깃듭니다. 그리고 그 세부가 과거를 바꾼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거듭해서 말씀드리는 ‘대가‘입니다. (시간의 문) - P117118

장대한 효론의 전주에 트럼펫이 들어왔다. 차분하게 확장되는 곡이다. 중반에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뒤 안정되어 밑음으로 끝난다. 음높이 변화도 없이 완만한 멜로디가 두 번 반복될 뿐인 단순한 구성이었다. 도중에 조바꿈하면서 8분의 6박자로 바뀌는 부분이 작은 악센트일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예의 바른 느낌이 있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음대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고지식한 청년이 자신의 가치관을 모조리 쏟아부어 만든 것 같은 곡이었다. (무지카 문다나) - P140

모모야마는 문화를 사랑했다.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패션도, 미술도 모두 좋았다. 자신은 어째서 문화를 사랑하나. 모모야마는 ‘불필요해서 라고 생각했다. 문화가 없다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저출산 고령화 경향은 멈출 줄 모른다. 일본 경제는 쇠퇴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접함으로써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감동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런 기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문화 덕택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 P179

나가노 출신인 모모야마는 내내 도쿄를 동경했다. 일 년에 한 번 친구와 함께 완행 첫차를 타고 도쿄에 갔다. 시부야,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아오야마를 돌며 용돈과 세뱃돈을 털어 옷이며 신발, 시디를 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는 모두 미인이고 남자는 모두 멋있어 보였다. 딱 한 번 익숙지도 않은 헌팅을 했다가 "도쿄 사람 아니구나?" 하고 웃음을 샀다. 창피했지만 역시 자신들은 촌티가 나는구나 하고 납득했다.
상경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해 도쿄에 있는 사립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막상 도쿄에서 살게 되니 시부야나 하라주쿠에 거의 가지 않게 됐다. 기술의 진보에 의해 옷이나 신발은 인터넷으로 살 수 있었고 음악은 클릭 한 번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점원에게 추천을 받는 일도, 시디 가게에서 몇 시간씩 청음하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게 원클릭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 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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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와 마찬가지로 포커에서도 특정 결과는 우리의 전략뿐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연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받는다. 훌륭한 포커 선수는 현명한 전략이 한 번의 경기에서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지라도 장기적으로 승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안다. - P287

7장에서 논의한 ‘딴 데 보기‘ 효과를 기억하는가? 충분히 다른 방법들과 충분히 다른 분석들로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결국 자신이 입증하고 싶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과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 결과는 실은 무작위 잡음 요동에 의한 것이다. 맹분석으로 대처하려는 위험이 바로 이런 종류다. 인간은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 분석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가설을 우연히 뒷받침하는 분석에 집중하는 핑곗거리를 임기응변식으로 찾아내는 데 매우 능하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이런저런 분석을 시도하는 것을 p해킹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심리학자 유리 사이먼슨Uri Simonsohn, 조지프 시먼스Joseph Simmons, 레이프 넬슨Leif Nelson이 지었다. - P288

호응이 커지고 있는 또 다른 전략은 학술지들이 등록 보고서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학술지에 연구를 제안하면 학술지는 이론적 근거와 제안된 방법이 전문적 동료 평가에 의해 승인되는 한 연구 수행 이전에 발표를 승인한다. 이렇게 하면 예상에 들어맞지 않는 결과를 학술지에서 실어줄 가능성이 낮아져 생기는 확증편향을 없애고, 더불어 흥미로운 가설을 입증하는 결과만 발표하고 반증하는 가설은 외면하는 학술지의 자연스러운 편향도 없앨 수 있다. - P292

맹분석에 친숙해졌으면 전문가를 고르거나 전문가 의견을 받아들일 때마다 맹분석(또는 확증편향을 줄이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을 모색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속이는지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싶은 전문가는 자신이 적절한 맹검법이나 사전 등록, 그 밖의 확증편향 방지책을 통해 결과에 도달한다는(또한 타인의 결과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더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문제를 연구하기 전에 자신이 답을 안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는 예/아니요 결과나 숫값을 결정하거나, 여러 조치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경계해야 한다. - P293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새 기법을 발명해야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명료한 생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꺾이는 것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세상과, 서로와, 현실에 대한 집단적 연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음 번에는 컴퓨터가 더 복잡한 분석을 내놓고, 프로그래밍 버그의 더 많은 여지를 만들어내어 게임 규칙을 바꾸는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 P295

앞 장들에서 논의한 많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논의를 사실적 토대가 있는 측면들과 가치, 목표, 감정에 대체로 의존하는 측면들로 분리하는 데는 현실적 유익이 있다. 이 분리의 토대가 되는 정의와 분류에 이론의 여지가 있더라도 이 방향을 추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 현실이 결정을 어떻게 제약하는지를 당사자들이 따로따로 고려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P327

(클로드) 스틸Claude Steele의 추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가치에 도전하는 정보는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회복력을 키울 수 있고 위협을 이겨내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스틸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핵심 가치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이를테면 가치 목록에 대한 설문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경직적으로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면, 새 증거를 더 기꺼이 고려하고 심지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구자들은 학교 등의 다양한 현실 상황에서 자기긍정 프로그램을 실시해 규칙적 자기긍정이 학생들의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려는 의향을 증가시켜 학업 성적을 개선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 P329

우리는 정책 결정의 요소들에 대해 명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지 모른다. 최종 결정에 이견이 있는 사람과 논쟁하는 법을 모른다. - P333

마지막 장을 앞두고 놀라운 명제와 차분한 난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명제부터 보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항구적 세계의 건설을 합리적 수준에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최초의 세대다. 이 명제는 틀림없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심지어 가능성이 희박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참일 가능성만으로도 당신은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 P335

우리의 집합적 과제(아마도 우리 시대의 유일한 대난제)는 힘을 모아 생산적으로 생각한 다음 그 결과를 활용하는 도구를 발명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밀레니엄의 들머리인 지금 이 난제를 풀 수 있다면 행성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쌓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 P337

공론조사는 민주주의의 걸림돌인 무관심과 불참 문제를 해결하는 유망한 해답인지도 모른다. (짐) 피시킨Jim Fishkin과 동료들이 진행한 공론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참가자를 무작위로 선발했는데도 경이로운 참여율을 거둘 때가 있었으며, 숙의를 시작한 인원의 95퍼센트 이상이 끝까지 동참했다. 게다가 참여한 사람들은 그 뒤에 뉴스 미디어를 더 많이 접했다. 이를테면 신문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가 매일 세 종을 읽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참여 초대를 받으면 이것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실제 의무로 받아들인다. - P343

(훠턴스쿨Wharton School의 필립 테틀록Philip Tetlock과 바브 멜러스Barb Mellers가 개발한 좋은 판단 프로젝트Good Judgment Project, GJP에서 예측의 정확도가 높은) 슈퍼 예측자가 나머지 예측자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했듯 대단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치적 소양이 풍부하고 지적 능력 검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그들은 열린 생각이라는 인지적 태도를 갖췄으며,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고, 논증에 약점이 있고,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것은 보정 점수에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평범한 예측자에 비해 덜 과신했다. - P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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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로켓과학을 발전시켰고 달까지 날아갈 수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 간단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불확실성과 관점 대립을 해소하는 법을 늘 생각해내지는 못한다. - P18

의료 문제, 사업적 판단, 사회·환경 정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 직업적, 정치적 삶에서 맞닥뜨리는 난관의 상당수는 고도로 기술적인 과학 정보를 처리하는 문제와 관계있다. 이 책은 정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영적 질문 중에서 기술적 정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답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하지만 우리가 파악하고자 씨름하는 정보나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과학적‘이든 아니든 이 책의 과학적 얼개는 유용성을 발휘한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에 등록하려고 빚을 지는 것이 합리적일까? 새 췌장암 치료법 연구에 피험자로 자원해야 할까? 우리 아이의 학습 장애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외래종 수생 잡초를 없앨 제초제 살포를 마을에서 승인해야 할까?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해 우리 학교의 시설 예산을 써야 할까? 정부에서 자율주행차랑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 P2021

함께하고 힘을 합치는 현실적이고 원칙에 입각한 방법들을 더 많이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집단적 미래에 가장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 P23

이 기법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실험을 재현하거나 과학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직한 연구인지, 우리를 진리에 가까이 데려다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선입견을 악용하는 미사여구인지 평가할 수는 있다. 즉, 전문가와 사이비 전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과학적 사고의 기법과 도구를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 P34

위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의사들은 위험이 얼마나 큰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줄 수 없다. - P35

우리가 언제 무엇을 먹고 어떤 약을 복용하고 어떤 의료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모임에 가입하고 어떤 운동을 하고 어떤 애인을 사귀어야 하는지를 전문가가 결정하는 사회는 설령 그들의 결정이 ‘옳을‘지라도 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전문가‘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릴 권리를 갖고 싶어 한다. - P38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 다방면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는 오늘날 과학 기술의 한계에 놀란다. 전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50

인터넷에서 ‘Spurious Correlations(허위상관)‘를 검색하면 나오는 웹사이트에서 수십 가지 사례를 볼 수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치즈 섭취량은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꾸준히 증가했으며 홑이불에 목이 감겨 죽는 사람의 수도 정확히 보조를 맞춰 증가했다. - P73

무엇이 무엇의 원인인지 알아내기란 힘든 일이지만, 우리 삶에서 달갑잖은 결과를 줄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늘리고 싶다면 꼭 알아내야 한다. 바이러스가 지역사회에 퍼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 현상을 지배하는 과학 법칙이 무엇이고, 지금까지의 감염률이 얼마인데 1년 뒤 감염률이 열 배로 증가하리라는 것 등을 아는 일은 근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낱 구경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마스크를 쓰면 감염률이 달라질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이러스의 인체 내 작용에 영향을 미칠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이러스의 사람 간 전파를 예방하는 데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이것들은 전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물음이다. - P7475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과학자들(특히 통계학자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은 우리가 아는 변인뿐 아니라 모든 무관한 변인을 통제하는 해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해법이란 사람들을 두 집단에 무작위 배정하는 것이었다.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00명 중 누구를 처리군에 넣고 누구를 대조군에 넣을지를 동전 던지기로 정하면, 한 집단의 여성 수와 16세 참가자 수는 다른 집단과 대략 같다. 근사하게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인을 이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 표준화할 엄두를 결코 내지 못했을 변인도 문제없다. 두 집단은 테일러 스위프트 팬, 생일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사람, 골프 애호가, 아침을 굶은 학생 등의 수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작위 배정 실험은 황금 표준(최적 표준)‘으로 간주된다. - P77

인과는 우리가 체계에 개입할 때 관찰하는 상관관계의 문제에 불과하다. - P79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의 이런 차이는 왜 중요할까? 둘 다 인과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확정하는 것이 주어진 목적에 맞는지 헷갈리기 쉽다. 우리는 위험한 제품(담배라고 하자)의 특정 쓰임새가 특정 결과(암이라고 하자)의 원인임을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제조사에 결과의 책임을 물려서는 안 된다는 논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단일 인과 주장을 정확히 이해했지만 일반 인과 주장에 대해서는 올바르지 않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른 인과 주장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 생각하는 일은 흥미롭다. 전형적으로 우리는 일반 인과를 통해 해로운 결과를 낳은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조명 기구에 설계 결함이 있으면 많은 구매자가 부상을 입을 수 있다)에 대해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규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단일 인과에 의해 해로운 결과로 이어진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날림으로 설치한 조명이 누군가의 머리에 떨어진 경우)에 대해서는 소송을 제기(하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 둘 다 이를 다루는 폭넓은 법적 메커니즘이 있다. - P8788

조금은 알지만 전부는 알지 못하는 현실과의 연결을 궁리하는 태도에 대해 과학은 극단적으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만 다룰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확신의 정도가 다양한 것을 다룰 수 있으면 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로 전환하게 해준다. 게다가 확신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기만 해도 세상에서 명확한 답을 얻으려 할 때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우리가 원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9394

잠정적 태도를 가지면 자신이 그 순간 품은 믿음에 지나친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진술이 매번 옳다는 것에 모든 자존감을 걸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진 과학자이면서도 "이 이론이 현상을 포착하고 있다고 상당히 확신합니다"라는 말이 이따금 틀릴 여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스키에 비유하자면 각각의 명제에 무게를 다르게 싣는 셈이다. 즉, 옳을 확률을 다르게 부여한다.) 사실 목표는 매번 옳음(불가능하다)에 자신의 정체성을 거는 게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지 얼추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 P95

과학자는 무언가가 참임을 아주아주 확신하더라도, 즉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면 "예, 100퍼센트 옳습니다.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확신이 (이를테면) 99퍼센트 수준이라고, 심지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확신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는 말은 "이것이 참이라는 데 목숨을 걸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같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격이기도 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절대적 진술에서 한발 물러서는 능력은 확률론적 사고 초능력을 얻는 첫 번째 열쇠다. - P96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의 확신 범위는 누구나 세상을 다룰 때 쓸 수 있는 과학 도구 중 하나다. - P97

확률론적 사고의 이점 중에서 과학자들이 자신이 틀렸을 때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미묘하지만 강력하다. 틀리더라도 신용이 깎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 그가 말한 거의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다. - P9899

진술의 구체성과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확신도 사이에서도 반비례 관계가 관찰된다. 상세한 데이터 집합이 없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진술의 진실성보다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진술의 진실성을 더 확신할 수 있다(진실의 한 가지 버전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 P102

솔은 유쾌한 사례도 하나 떠올렸다. 사흘간 열리는 우주학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과학자들은 확실한 정량적 추정값이 없는 경우에 다양한 결과의 확신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확신도를 묘사하는 표현은 "여기에 목숨을 걸겠다."와 "여기에 집을 걸겠다"부터 "여기에 내 황무지쥐(미국에서 인기 있는 애완용 설치류-옮긴이)를 걸겠다"까지 다양했는데, 심지어 "여기에 당신 황무지쥐를 걸겠다"도 있었다! - P105

이 예들에서 보듯 세 번째 밀레니엄에 전문가가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적(또는 인식론적) 겸손이라고 불리는 것을 함양해야 한다. 심리학자 마크 리리Mark Leary는 이 특질을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사실 주장에 대한 증거의 힘에 더 주목하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말한다. "개방성과 유연성을 중시하고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감내하는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다." - P115

다음 그림은 여러 해 동안 학생들에게 보정 문제를 낸 결과다. 학생들이 50퍼센트의 확신도를 보고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작위 추측을 한다는 뜻인데, 그때 학생들이 정답을 맞히는 확률은 50퍼센트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이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답에 대한 확신도가 커질수록 정확도는 자신의 생각보다 일관되게 낮아진다. 과신을 향한 뚜렷한 추세를 보여주는 ‘고전적‘ 보정 패턴은 수많은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많은 연구에서 거듭거듭 도출되었다. - P117

과신이 인간 심리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보정을 개선할 수 있다.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확신을 꽤 능숙하게 보정할 수 있다. 예측이 필수인 다양한 직종의 확신도 보정을 들여다보면 (이를테면) 기상학자들의 단기 예보가 놀랍도록 훌륭히 보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상 예보관이 이튿날 강수 확률을 80퍼센트로 예측한 경우를 전부 조사하면 실제로 비가 온 경우가 약 80퍼센트다. 그들의 보정은 왜 이렇게 훌륭할까? 관건은 기상학자들이 예측에 대한 즉각적 피드백을 끊임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상학자들의 직업적 명성은 자신의 지식(정확도) 못지않게 메타지식(보정)에도 좌우된다. - P121122

당신의 직종에서 확신도를 보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알면 당신을 과신으로 시나브로 밀어대는 힘을 발견하고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P122

전문가들은 신뢰받을 만큼 확신도를 보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 가치가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희소식은 자신의 확신도를 정직하고 현실적으로 평가하면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25

전문가의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이 자신의 불확실성과 자신이 틀릴 수도 있는 상황을 인정하는지에 주목하라. 우리야 전문가들이 100퍼센트 정확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100퍼센트에 가깝게 보정된 전문가를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한다. "확고한 의견을 제시할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보기에 그들이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방금 당신에게 이 주제에 대해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 셈이다. 그때까지는 행동에 신중을 기하고 얼마나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았는지 감안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다. - P126

과학자들은 신호 대 잡음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더 근사한 통계학적 정의를 동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리는 같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가진 신호의 잉어 비해 잡음의 양이 얼마큼인지, 이 비율이 주어졌을 때 잡음에서 신호를 탐지할 가능성이 얼마큼인지다. 이런 이유로 ‘신호 대 잡음비‘는 중요하고 알아두면 요긴한 용어다. - P141

하지만 우선 잡음 속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는 필터링 게임을 할 때 맞닥뜨리는 고약한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바로 우리 뇌가 무작위 잡음에서 패턴을 보고 그 패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제 보겠지만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온갖 잡음 출처 가운데에서 필요한 신호를 인식하는 능력은 같은 방식으로 속아 넘어가는 자신의 성향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 P143

무작위 잡음에서 얼마나 자주 패턴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뛰어난 직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패턴 발견 노력에 늘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익히고, 무엇이 신호인가에 대한 직관이 틀릴 수 있으며 무작위 데이터에서 패턴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야 함을 명심하는 것이다. (통계학에는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수학 기법이 많다.) 당신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앞의 생각을 깊이 내면화한다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 P146

그렇다면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할 때의 이점은 가짜 잡음 패턴을 보게 되는 빈도를 더 정확히 예측한 다음, 그 개수를 데이터에서 보이는 실제 패턴 더하기 가짜 패턴의 개수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 자신이 보는 것이 한낱 잡음일 확률이나 반대로 잡음 속에 있는 진짜 신호일 확률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통계학 기법이 기본적으로 이런 식이다. - P391000000

위의 모든 예에서 과학자들은 잡음이 아니라 신호를 발견했다고 결론 내리기에 충분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이 적절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일상생활의 사례들에서도 우리는 진짜 패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한낱 무작위가 아닐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호를 발견했다고 잠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 위해 가능성이 얼마나 커야 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 P161

관습법 전통에서 배심원단에 제시하는 입증 기준은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지 않는 쪽으로 편향된다.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은 무고한 사람 한 명을 단죄하는 것보다 범인 열 명을 놓치는 편이 낫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므로 대체로 배심원단은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서" 피고인이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피고인에게 무죄 방면 평결을 내리라고 교육받는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범죄에 무른‘ 태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편향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형사사건에서는 시민 개인이 검찰이라는 공권력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검사는 피고인보다 인적•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하다. 둘째, 많은 경우(이를테면 범행이 저질러진 것은 알지만 누가 저질렀는지는 모르는 ‘범인 찾기‘ 범죄) 유죄 평결에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바람직하다.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곧 진짜 범인을 풀어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 P166167

우리는 거짓양성의 위험과 거짓음성의 위험 사이에 진퇴양난 상충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기준 점수를 정하는 것은 정책 결정이며 여기에는 오류의 상대적 비용에 대한 기관 차원의 결정이 반영된다. 이런 결정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가치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 P174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불확실성을 구분하고 이름을 붙인다. 통계적 불확실성은 당신이 측정한 값을 올바른 값 주위에 무작위로 흩어지게 만드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호텔 체중계마다 몸무게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어떤 값은 더 높고 어떤 값은 더 낮다. 통계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값을 점점 많이 평균할수록 참값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에 반해 계통적 불확실성은 모든 측정값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측정할 때마다 값을 낮게 표시하는 당신의 부정확한 체중계처럼 값은 전부 더 높거나 전부 더 낮다. 계통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을 몇 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평균을 내봐야 참값이 아니라 ‘편향된‘ 결과를 얻을 뿐이다. - P182

요점은 계통적 불확실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을 알아낸 뒤에는 연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의 원인을 알아내고 이 원인 때문에 측정이 결정의 토대로 삼기에 너무 불확실해지지 않도록 각각의 측정을 통제하거나, 균형을 맞추거나, 적절히 실시하는 창의적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은 과학자가 받는 훈련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 P190

게다가 어떤 약을 복용해야 하는지, 셰일가스 추출 정책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지 등에서와 같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서 계통적 불확실성의 범위를 충분히 탐색했는지 예민하게 점검해야 한다. 반대 견해를 가졌거나 맞수인 과학자들이 계통적 불확실성을 이미 들여다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든 자신이 어떤 과학적 발견을 왜 믿는지 설명하려면 계통적 불확실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답변을 요구해야 한다 - P191

요는 우리 인간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이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게으르게 진화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끝똘히 생각하는 일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에돌 수 있으면 굳이 올라가려 하지 않듯, 힘든 생각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느림보 뇌에는 여러 부담이 가해지는데, 앞에서 보았듯 잡음 속에서 거짓 패턴을 신호로 착각해 스스로를 속일 가능성이 있는 때를 알아차리려면, 또는 중대한 측정을 편향시키는 계통적 불확실성의 잠재적 원인 목록을 짜려면 상당한 정신노동이 필요하다. - P199200

문제에 진득이 매달리지 못하는 이 인간적 속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 과학의 비밀 도구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 도구는 과학 문화가 발명한 단순한 심리적 수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과학적 낙관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과학적 낙관주의는 하루하루 느끼는 평범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할 수 있다‘ 정신이며 당면 문제가 당신에 의해서나 당신과 동료들에 의해 해결 가능하리라는 기대다.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법이 손안에 있는 것처럼 접근하면 문제를 풀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은 문 제를 풀 수 있다고 믿도록 (실제로 푸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다.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대목은 이곳뿐이다! - P200201

반복적 진전이 충분하지 않고 막무가내식 ‘과학적 낙관주의‘ 추구를 미뤄야 한다고 결론 내리더라도, 이것은 목표의 폐기보다는 일시 중단일 수도 있다. 한데 어우러져야 하는 해법의 여러 조각들이 한꺼번에 준비되지 않았을 때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보조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문제를 제쳐두어야 하는 때도 있다. 사실 과학의 ‘할 수 있다‘ 정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를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기술이 등장해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된 시점에도 이런 성격이 있었다. 페르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학 분야에서 1980년대에 도출된 결과가 1995년의 증명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 P208

과학적 낙관주의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고, 이상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필수 가속페달이다. 물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10년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점이 불만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반복과 끈기를 통해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 중 하나다. - P206

페르미 추정은 일차 설명을 이차 설명과 구별하는 데 매우 실용적인 쓰임새가 있다. 숫자를 제시해 논점을 입증하는 세상에서 페르미 추정은 그 숫자가 말이 되는지 확인하는 데 매우 요긴한 기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르미는 학생들이 이 빠른 추정 방법에 익숙해지면서 ‘할 수 있다‘ 정신을 체득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음을 깨달으면 커다란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 P217

방금 제시한 예들에서 페르미 추정을 위해 쓴 세 가지 요긴한 비법을 나열해보겠다.

낯익은 항목으로 추정할 것. 낯설고 접근하기 힘든 양을 낯익고 접근하기 쉬운 양으로 분해한다. (첫 번째 경우는 미국의 차량 대수보다 미국 인구가 낯익으므로 후자를 근거로 전자를 추정했다.)

근사적일 것. 추정값은 정의상 근삿값이지만, ‘충분히 가깝‘기만 하면 대체로 무방하다. 당신이 찾는 답은 위아래로 세 배 이내까지는 괜찮은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당신이 추정하려는 양의 참값이 100이라면 33부터 300까지의 추정값은 대개 적당하다. 이 말은 당신이 추정의 토대로 삼는 낯익은 숫자가 그 이상 정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으면 상한과 하한을 먼저 추정한다. - P219220

우리는 ‘편향되었다‘라는 낱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편향되었다‘라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지 그의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다행히도 9장에서 논의했듯 판단에서의 편향은 꽤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이 무작위 오류를 많이 만들어낼 때는 잡음이 많다고 말하지만, 계통적 오류를 만들어낼 때는 편향되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계통적 오류란 정답보다 일관되게 높거나 낮은 오류를 말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기준이나 참값이 있을 때는 상대방의 반응을 그 기준이나 값과 비교해 편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참인 것을 모를 때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지만, 편향을 근절하는 다양한 실험적 전략이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있다. - P236237

후견은 선견보다 훨씬 수월하다. 심리학자 바루크 피시호프 Baruch Fischhoff는 인간 판단의 일반적 특징을 하나 제시했는데, 결과를 알고 나면 그 결과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1970년대 초 피시호프는 확률 판단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가능성이 희박해 보일 수도 있고 다분해 보일 수도 있는 미래 사건들을 선정했다. 때는 닉슨 행정부 시절이었다. 닉슨은 골수 반공산주의자였기에, 피시호프는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의 예로 닉슨이 퇴임 전 중국에 외교 방문을 할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공교롭게도 닉슨은 실제로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외교정책 전문가들조차 놀라게 했다. 피시호프는 빛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이 사건 뒤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그들이 닉슨의 중국 방문 사건에 대해 제시한 확률을 기억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자신의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오기억했다. 한마디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 P242243

지금껏 밝혀진 편향 탈피 전략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반대로 생각하기(더 복잡한 경우에는 대안을 고려하기)다. 미래의 결과에 대해 확고한 예상이 든다면 잠시 멈추고 정반대 결과가 생길 수 있는 이유를 모조리 생각해보라. 이 연습을 해보면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물론 좋은 이유가 있지만 다른 선택에 대해서도 좋은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4장에서는 학교의 전국 모의고사 확대를 주제로 한 토론에 대해 서술했는데, 참가자들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각각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예: 75퍼센트)를 부여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는 이렇게 했더니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반대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가 99퍼센트 미만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기‘는 과학 수업에서 정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지만, 실상으로는 대부분의 과학 방법론에 배어 있다. 이를테면 무작위 배정 실험을 설계하는 것은 반대(‘반사실‘) 조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탐구하기 위해서다. - P248

좋은 과학을 기준점으로 삼아 출발하자. 과학이 훌륭히 수행되어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 것은 이상적 상황이다. 당신이 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거나 과학 논문을 읽을 때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과학이 틀린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사실 4장에서 논의한 확신도를 생각해보면 좋은 과학 중에서 어떤 것은 반드시 틀린 결과를 낸다. 좋은 과학자는 당신에게 확신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확신도란 결과가 옳을 확률이다. 확신도야말로 당신이 과학자에게 기대하는 전부다. 하지만 과학자가 그 결과에 대해 95퍼센트의 확신도를 제시한다면, 그들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논문 20건 중에서 한 건은 틀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틀린 결과를 내놓는 좋은 과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확신도가 95퍼센트라면 논문 중에서 적어도 20분의 1은 그 범주에 속해야 한다. - P250251

앞에서 언급한 랭뮤어의 병적 과학 강연(노벨화학상 수상자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의 1953년 강연)에서는 과학적 결과가 이 수상쩍은 범주에 속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케 하는 실마리의 목록을 제시한다(문구는 살짝 바꿨다).

1. 간신히 탐지되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며, 결과의 크기가 원인의 세기에 대해 대체로 독립적이다.
2. 결과 자체가 간신히 탐지되거나 통계적 유의성이 매우 작다.
3. 대단히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4. 경험과 상반되는 허무맹랑한 이론이 연구에 결부되어 있다.
5. 연구에 비판이 제기되면 임기응변으로 변명한다.
6. 지지자 대 비판자 비율이 초반에 50퍼센트 가까이로 급등했다가 0퍼센트 가까이로 급락한다. - P257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핵융합에 이르는 경로 중에서 훨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롭고 이례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구는 과학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다. 심지어 결과가 재현 가능하지 않거나 실험에 결함이 있더라도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갈망하는 것은 한발 물러서서 오류를 선제적으로 찾아보는 능력이다. 묻고 더블로 가는 것은 여기서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적신호가 켜질 가능성을 외면하는 노골적 저항이다. - P265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에는 더 기본적인 문제가 하나 예시되어 있다. 과학 연구를 실제로 수행하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믿음에 홀딱 반할 수 있으며 그 믿음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모든 것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놀랍게도 내가 가장 생산적인 때는 과부하가 걸리고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때야"). 또한 이 믿음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나쁜 핑계를 대며 앞 장에서부터 논의했듯 우리의 믿음과 잘 맞아떨어지는 최적 사례에만 주목한다("금요일에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하다 실수를 저지른 것은 물론 전날 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고한 발견으로 이름을 날린 저명 과학자들조차, 훈련을 통해 이런 정신적 고장모드에 저항력이 생겼어야 마땅하건만 두 사례 연구에서 보듯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잠깐 멈춰 ‘기억력을 가진 물’과 ‘상온 핵융합‘에 대해 생각하라. 그러고 나서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라. "여기서 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야겠어." - P271

문제는 이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를 찾아 거부하고, 소프트웨어 버그를 찾아 고치는 행위는 놀랍지 않은 답을 얻게 되는 시점까지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당신은 뜻밖의 결과를 얻으면 불량 데이터나 버그를 찾지만 결과가 ‘옳게 보이면‘ 찾지 않는다. 근사해 보이는 결과가 잔류 불량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미발견 버그 때문일 경우에도 말이다. 이런 까닭에 최종 측정과 학술 논문의 결과는 과학자들이 예상한 쪽으로 계통적으로 편향된다. 과거의 물리학 측정이 무작위 잡음에서 예상되는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우주 팽창 측정이라는 더 극적인 경우에 결과가 50km/sec/Mpc(메가파섹, 태양계 밖의 천체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는 약 0.7메가파섹이다-옮긴이)과 100km/sec/Mpc으로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각 연구진이 어느 데이터를 신뢰할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선택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 P281

모든 과학자가 이 절차를 접하자마자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분석blind analysis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결과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맹분석에 익숙해지려면 핵심 결과를 도출하지 않은 채 이런 문제를 찾아낼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재훈련이 필요하며 이따금 창의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핵심 결과를 얻기 위해 대량의 측정 집합을 평균해야 하는 과학 연구를 상상해보라. 간단한 맹분석 방법은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친구에게 모든 자료점(도표나 그래프 따위의 그래픽 좌표에서 하나의 점을 표시하는 정보-옮긴이)에 숫자 하나를 몰래 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평균값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다음 최종 분석이 끝났다는 판단이 들면 친구가 알려주는 비밀의 수를 빼서 실제 평균값을 구한다. 이렇게 하면 핵심적 최종 답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고도 (숨겨진) 평균과 거리가 먼 자료점을 찾아내어 나쁜 데이터로 간주해 폐기함으로써(그날 검출기가 고장났으려나?) 실험을 디버깅할 수 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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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들도 대부분 동료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나는 책을 모두에게 (적어도 그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로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내게 서간체는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와 소통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교수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올리버 색스/O) - P1314

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 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수전 배리/S) - P14

저는 도서관에 가서 과학 논문을 뒤졌습니다. 찾을 수 있는 입체시 검사를 모조리 다 해 봤고 전부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수술 이후에 선물받은 장난감 입체경에선 원래 3차원 이미지가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댁에서 그 오래된 장난감을 찾아 들여다봤지만 3차원 이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볼수 있었는데도요. (S) - P20

2005년 1월 3일

배리 교수님께,

(STS-72 임무가 있기 전날이었던) 그날 밤과 몇 년간 두 분께 (또는 두 분의 가족 분들께) 크리스마스/새해 축하 카드를 받았던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죄송하게도 제가 답장을 보낸 적은 없었지요.
그러나 교수님의 29일 자 편지를 받고 저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새로 만난 (시각적) 공간의 ‘세계‘를 이토록 열린 마음으로 경탄하며 맞이하고—비록 카우아이에서는 고소공포증을 느꼈지만—그 경험을 이토록 섬세하고 시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하시다니요. (O) - P33

양안 체계가 양쪽 눈에서 얻은 이미지를 융합하려면 두 눈이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시여서 양쪽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양 눈의 입력값을 동시에 처리하면 복시 증상이 나타났으므로, 어릴 때부터 한쪽 눈에 입력된 정보를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 나에게 있었을지 모를 양안 세포들은 한쪽 눈에서는 강한 입력값을, 다른 한쪽 눈에서는 매우 미약한 입력값을 얻었다. 그러나 시력 훈련에서 양안 통합 운동을 하면서 두 눈의 초점을 동시에 같은 곳에 맞추는 법을 배웠다. 이로써 양안 세포에 상호 연관된 입력값이 전달되었다. 이제 양안 뉴런은 양쪽 눈에서 얻은 정보를 융합할 수 있었고, 나는 세상을 3차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S) - P52

박사님은 대다수 사람이 입체시의 가치를 모를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한 안과 의사처럼 비운의 사건으로 입체시를 잃은 후에야 그 중요성을 깨달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은 그저 이 세상 자체가 3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세상이 3차원으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끈 이론을 논외로 치자면요). 자신의 뇌가 2차원 망막에서 얻은 정보를 해석하고 처리해서 3차원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유클리드와 뉴턴, 다빈치 같은 초기 광학의 위대한 연구자들조차 입체시를 발견하거나 기술하지 않았죠. (S) - P5455

게다가 올리버의 편지에는 아주 솔깃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내 사례를 노벨상 수상자이자 시각 발달 분야에서 "결정적 시기"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장본인인 허블David H. Hubel 박사와 비셀Torsten Wiesel 박사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올리버의 말마따나 두 과학자가 정말로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이라면 용기를 끌어모아 편지를 써 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2005년 5월 7일, 데이비드 허블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허블 박사는 5월 27일에 답장을 보내 늦어서 미안하다고, 이제 막 대상포진에서 회복했다고 썼다. (중략) 허블은 이렇게 썼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교수님에게는 줄곧 입체시 능력이 있었지만 안구 부정렬 때문에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구가 정렬 되어 이미지가 융합되자 입체시가 발현된 것이지요. 그리고 훈련을 계속하면 입체시가 개선될 거라고도 말했다(정말로 그랬다).
허블은 올리버에게도 편지가 와서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하며 내게 막 출간된 저서 《뇌와 시지각Brain and Visual Perception》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허블 박사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는 결정적 시기를 발견한 공로 덕분이었다. 나의 시력 변화는 이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는데도 그는 내 말을 믿어 주었다. 이메일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내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S) - P7576

또 그는 내가 스스로 좀 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오로지 내 시각적 경험이 특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밤늦게까지 정보를 찾고 편지 폭격을 퍼부은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대답했다. 네, 제가 좀 집요할 때가 있죠. 나는 올리버의 질문이 아무렇지 않았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동족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S) - P77

저는 책을 더 폭넓게 읽고 다른 분야의 개념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환원주의 과학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저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됐죠. 이렇게 저의 환멸은 해방감으로 변했답니다. (S) - P80

다음 날 아침, 올리버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식탁 한가득 종이를 펼쳐 놓고 만년필 쥔 손으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처음 읽은 그의 책이 《깨어남》이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파킨슨병을 앓았기에 그 책에 담긴 사연들이 대단히 감동적이었고 올리버의 글에도 푹 빠져들었다. 올리버는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으면 어깨 부상으로 직접 글을 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던 부분을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S) - P91

그리고 올리버는 내게 (올리버 색스가 수전 배리의 입체시 획득 경험을 써서 《뉴요커The New Yorker》에 기고한 〈스테레오 수〉에서) 혹시 이름을 가명으로 바꾸고 싶은지 물으며 "개인적으로는 ‘스테레오 수‘가 마음에 들지만 교수님을 난처하거나 불쾌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스테레오 수라는 이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올리버에게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이름은 통통 튀는 데다 그 유명한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첫 소절과 리듬이 비슷하다! (S) - P9394

올리버의 앞선 편지는 2005년 12월 13일에 쓰였고 14일 자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그의 오른눈에 커다란 암점과 섬광이 나타났다. 결국 올리버의 시력을 빼앗고 10년 뒤에는 목숨까지 앗아간, 망막에 생긴 종양의 초기 증상이었다. 내 시력이 놀라울 만큼 향상되는 동안 올리버는 반대로 시력을 잃고 있었다. (S) - P104

올리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그는 자기 책상에 앉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올리버가 1856년에 처음 출간된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의 책 《브루스터의 입체경 연구 Brewster on the Stereoscope》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대답 없는 질문The Unanswered Question》을 선물했는데, 당시 올리버가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를 더 주고받은 뒤 올리버가 번스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올리버가 덤덤하게 암에 걸렸다고 말했다. 내 표정이 겁에 질렸었는지, 올리버는 암이 거의 전이되지 않았고 오른눈에 시력이 남아 있어서 아직 입체시로 볼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직후에 《뉴요커》의 올리버 담당 편집자인 존 베넷이 도착했다. 내가 곧 나올 《뉴요커》 기사의 핵심 주제였기 때문에 나와 편집자가 만날 수 있도록 올리버와 케이트가 미리 초대해 둔 것 같았다. 베넷의 은근한 텍사스 억양이 놀라웠다. 그가 자신이 키우는 잭 러셀 테리어의 우스운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왜인지 나는 《뉴요커》의 편집자가 은은하게 남부 억양이 섞인 말투를 쓸 거라고는, 또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S) - P112

그리고 《뉴요커》 최신호를 집어 들고 긴 특집 기사를 펼쳐 (2002년 여름 당시, 17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전직 역사학 교수인) 어머니께 소리 내어 읽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사는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해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남자에 관한 것이었어요(이 기사는 2002년 8월 5일 자 《뉴요커》에 실린 맬컴 글래드웰Malcom Gladwell의 〈벌거벗은 얼굴The Naked Face〉이었다.). 어머니는 주의 깊게 들으며 이따금 끼어들어 방금 들은 구절을 평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기사를 읽고 개는 코를 골면서 그날 오후는 그렇게 즐겁게 지나갔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운동이상증이 사라졌고, 움직임이 다시 우아하고 자발적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힘들었던 말년에 함께한 가장 행복하고 좋은 기억이고, 그때 이후로 《뉴요커》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S) - P117118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댄과 저는 가능한 한 책을 많이 읽어 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 읽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요. 제니에게 처음으로 읽어 준 진짜 ‘이야기책‘은 E. B. 화이트가 쓴 《샬롯의 거미줄》이었습니다. 어린애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니도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 해서, 한때 댄과 저는 이 책을 거의 통째로 외우고 있었어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마지막 문장은 암송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화이트는 지혜롭고 재주 많고 용감무쌍한 거미 샬롯뿐만 아니라 자신의 좋은 친구를 가리켜 그 문장을 썼다고 합니다. 동화 속 거미에 자신을 비유하는 것이 싫지 않으시다면, 이 마지막 문장에서 "샬롯"을 "올리버"로 바꿔 읽어 주세요. 그러면 제 마음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가 진정한 친구이면서 뛰어난 작가인 경우는 흔치 않다. 샬롯은 둘 다였다."
사랑을 담아, (S) - P118119

우리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사랑을 담아,
올리버 - P124

〈스테레오 수〉가 《뉴요커》에 실리기 두 달 전인 4월 27일, 미국공영라디오(NPR)의 과학 전문 기자인 로버트 크럴위치Rober Krulwich에게 깜짝 이메일을 받았다. "아주 오래전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시절부터" 올리버, 케이트와 친하게 지 낸 사이로, 가끔 올리버의 이야기를 라디오 콘텐츠로 만든다고 했다. 그는 올리버가 보여 준 〈스테레오 수〉를 읽고 NPR에 내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원고 작성을 위해 올리버를 비롯한 이야기의 핵심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그전에 먼저 전화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NPR의 열렬한 청취자였던 나는 NPR 과학 전문 기자의 전화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잔뜩 신이 났다. 5월 15일에 맨해튼에 갈 일이 있어서 그때 맨해튼에 있는 NPR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날 아침,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로버트는 나와 악수를 나눈 뒤 길 건너에 있는 편린도너츠에서 간단히 뭘 좀 먹자고 했다. 나는 쫄딱 젖은 우산을 보여 주며 바깥에 비가 퍼붓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길 건너로 달려갔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로버트는 도넛을 몇 개나 허겁지겁 해치우며 대학 때 사귄 애인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긴장해서 도넛을 깨작거렸지만, 로버트가 워낙 친절하고 재미있어서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아마 애초에 이것이 던킨도너츠 습격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 P127128

시모조(시모조 신스케Shinsuke Shimojo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실험심리학과의 거트루드 볼티모어 기금 교수로, 인간의 지각과 인식, 행동을 연구한다.) 박사는 (벨라) 율레스의 무작위 점 입체화를 보고 나서 지각 능력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하지만 막상 과학자로 자리 잡고 대형 연구소와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연구비까지 생기고 나니 연구의 마법 같은 매력을 잃어버렸었다고 해요. 그런데 박사님(올리버 색스)이 보낸 〈스테레오 수〉 초고를 읽고서 자신이 애초에 왜 지각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네요. (S) - P132

그러나 이 편지에서도 나는 마냥 솔직하지 못했다. 올리버의 표현을 살짝 바꿔서 말하자면, 우리는 어린 시절을 빠져 나오지만 결코 그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눈이 사시였고, 그 탓에 글 읽기와 자전거 타기, 운전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올리버에게 하소연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깨어남》에 나온 것처럼 수십 년 간 신체와 정신이 마비된 환자들을 돌본 사람이니까. 사시가 내 평생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그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어려움은 사소해 보였다. (S)

*올리버 색스, 〈화학의 시인, 험프리 데이비〉. 먼저 《뉴욕리뷰오브북스》(1993년 12월 4일 자)에 실렸다가 나중에 축약된 형태로 《모든 것은 그 자리에》에 재수록되었다. - P151

편지로 제 공감각을 설명해 달라고 하셨지요. 다음 주에 휴가를 갈 예정이어서 그 전에 편지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공감각은 어렸을 때부터 쭉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략 8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신경생물학과 학생들과 연구실에서 긴 오후를 보내며 다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지로 이야기가 흘러갔습니다. 저는 당연히 이름의 빛깔이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한 학생이 크게 관심을 보이면서 다른 것들에서도 색을 연상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글자와 숫자, 단어,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 월과 요일의 이름에서 색을 연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학생은 라마찬드란 박사*의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제게 공감각이 있다고, 라마찬드란 교수가 그 현상을 연구했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의심하면서 그냥 색채 연상이 좀 강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학생은 공감각이 정말 존재한다고, 자기가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 학생이 단어와 글자, 숫자 목록을 적은 클립보드를 들고 제 방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목록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어떤 색상이 보이는지 말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보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자니 약간 바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알파벳 ‘C‘는 연분홍빛이 감도는 순백색이었고, 알파벳 ‘N‘은 색과 결이 참나무 원목 바닥과 똑같은 아름다운 황갈색이었습니다. 한편 알파벳 ‘H‘는 진녹색이었는데, 이 축축한 글자에서는 어느 집 지하실의 습한 콘크리트 세면대에 쌓인 냉하고 눅눅한 곰팡이가 떠올랐어요. 저는 그 학생에게 단어는 보통 첫 글자와 같은 색상을 띤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S‘는 초록색이고, ‘공감각synesthesia‘이라는 단어는 초록색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노란빛이 도는 주황색과 뒤섞이는데, 장음 E가 노란빛 도는 주황색이기 때문입니다. 숫자 3은 새순과 같은 색이고, 13은 색과 맛이 익힌 시금치와 똑같습니다. 저는 시금치를 정말 좋아해서 숫자 13도 좋아합니다. 그 학생은 다른 학생 다섯 명에게도 똑같이 질문한 뒤 대답을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그리고 2주 뒤에 다시 클립보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전체 항목에서 대답이 지난번과 완벽하게 일치했던 반면, 다른 학생들은 대답이 중구난방이었어요. (S)

*V. S. 라마찬드란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다. 공감각을 비롯해 인간의 뇌를 다각도로 연구해 왔으며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 (인간 의식으로의 짧은 여행A brief Tour of Human Consciousness》 등 여러 대중 과학서를 썼다. - P156158

내가 방문했을 때 올리버는 《뮤지코필리아》 집필을 마치고 음악과 뇌에서 시각과 환각으로 관심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전, 올리버는 오른눈의 종양 때문에 시력이 왜곡되어 오른눈 망막 중심부를 레이저로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문제없는 왼눈을 감고 오른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시야 한가운데가 검고 불투명했다. 길을 걸을 때면 오른눈으로는 사람들의 하반신만 보였다. 오른눈의 중심시를 잃자 입체시도 거의 사라져서, 우리의 대화는 입체맹의 삶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흘러갔다. 예를 들면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전체가 유리창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정말로 그래요!" 올리버가 이렇게 맞장구치더니, 얼마 전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피아노 선생님을 보는데 창문 바깥의 나뭇가지들이 선생님 머리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S) - P188189

제 경험은 대부분 요즘 교수님이 하는 경험과 정반대입니다—거울에 비친 교수님의 모습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을 글로 아름답게 표현하셨지요. 저는 제 양복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다가 그 얼룩이 거울 표면 위에 묻은 것임을 발견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거울 표면 위에 있어요—제 모습이 거울 속에, ‘거울 너머에‘ 있다는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O) - P201

우리가 움직일 때 멀리 있는 사물보다 가까이 있는 사물이 우리 시야에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상대운동 또는 운동 시차에서 원근감—무엇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다. 나도 언제나 운동 시차를 사용해서 원근감을 추론하곤 했으나, 실제로 운동 시차를 통해 사물 사이의 공간감을 느낀 것은 입체시를 얻은 뒤였다. (S) - P202

프레드는 6개월 뒤 다시 찾아와서 피아노를 조율하고 이번에도 일주일 뒤에 전화를 걸어서 피아노가 어떻느냐고 물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저는 만족스러워하며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죠. 프레드는 정음 작업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번에 프레드가 왔을 때 정음 작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건반마다 연결된 해머의 펠트를 조정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어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시잖아요." 프레드가 (언제나처럼 기계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야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제가 그런 소리를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조차 제가 어떤 소리를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아." 프레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눠 보고, 어떤 곡을 연주하시는지 보고, 피아노의 어떤 부분이 닳았는지 보면 알 수 있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피아노를 조율하려면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요."
잘 조율된 마음을 담아, (S) - P212

"제 생각에 [어린 시절의] 이 입체시 경험은 제게 늘 입체시를 습득할 잠재력이 있었고, 그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두 눈을 제대로 정렬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며칠 뒤인 2010년 2월 4일, 올리버에게서 답장이 왔다.

교수님의 (탁월한!) 편지를 이제 막 읽고 (제대로 된 편지지도 없이) 서둘러 답장을 보냅니다.

편지는 노란 리갈패드 종이에 쓰여 있었다.

교수님 주장에 전부 동의하고, 이렇게 깊이 고민해 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사소한 점을 제외하고) 제안해 주신 내용을 모두 반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소한 점"은 무엇일까? 올리버에게 단어는 무척 중요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그 한 가지 사소한 점은 바로 "정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posture"라는 단어입니다. 교수님이 여러 차례 쓰시고, 또 제게도 권하신 단어이지요.) 이 단어를 대신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나이 많은 영국인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제게 이 동사는 거짓되게 행동하고 가식적으로 군다는 의미가 훨씬 큽니다—"사칭imposture"이라는 단어와 가깝달까요.
전문적인 측면에서는 교수님의 단어 선택이 옳겠지만, 저는 이런 느낌의 단어를 차마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올리버는 "posture"를 "position"이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 P261263

2010년 5월 4일

수에게,

(언제나처럼) 근사한 편지(4월 19일 자)에 감사드립니다—교수님은 편지를 참 잘 쓰십니다—모든 편지에 새롭고 신선한 것이 담겨 있어요.
진심으로, 교수님이 (수전 배리가 앞 편지에서 자신이 읽었다고 전한 책, 《우정의 미적분학》의 저자인) (스티븐) 스트로가츠에게 편지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스트로가츠는 재능도 무척 뛰어나지만 매우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교수님의 개인적 감상을 전하는 것이지요. 교수님은 스트로가츠의 이상적인 독자입니다.
···
아름다운 조개껍질과 그 안의 깜짝 선물까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스트로가츠에게 편지 꼭 쓰세요. (O) - P272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제 어머니가 이스라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습니다—그래서 저도 그렇게 될 거라는 미신적 느낌이 있었지요—(상당히 비이성적이지만) 이것이 제가 그간(1955~1956년에 몇 달간 머무른 뒤로, 2014년까지) 이스라엘을 찾지 않은 여러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O) - P346

2015년 2월 5일

수에게,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지난달에 저의 안구 (포도막)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암은 원래 잘 전이되지 않는 편이지만, 저는 이 괴물이 몸에 퍼지기 전에 9년간 좋은(그리고 생산적인)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이된 암은 치료가 쉽지 않은데, 몇몇 처치로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아마도 ‘생존‘ 기간을 6~9개월에서 15~16개월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늘린 몇 달이 좋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에 글을 쓰고(일부 또는 거의 다 쓴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 여행을 다니고, (철없이 군다거나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제가 이 상황에‘적응‘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과 대상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 갑작스러운 ‘시간의 끝‘ 앞에서 평정심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지난 삶을 돌아보는 짧고 굵은 에세이(제목은 〈나의 생애〉)를 쓸 생각입니다. 흄이 (1775년에)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깨닫고 하루 만에 쓴 글처럼요. (후략) (O) - P361

2015년 5월의 만남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다. 2015년 7월 9일, 82세 생일을 맞이한 올리버는 늘 그래왔듯 자기 아파트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다. 이번이 올리버의 마지막 생일임을 본인도 알고 우리도 모두 알았지만, 그는 연민의 대상이 되거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중략)
대화를 나눈 직후 댄과 나는 시간이 늦기도 했고 올리버가 다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조용히 아파트에서 나왔다. 올리버는 눈물 젖은 작별 인사를 원하지 않았다. (S) - P372373

올리버는 세상을 떠나기 겨우 3주 전에 내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때 그는 빠른 속도로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지만 케이트와 사무보조원 헤일리 파커, 연인 빌리 헤이스의 도움을 받아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2010년 이후로는 내게 늘 손 편지를 썼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약해져서, 이 마지막 편지는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다.
편지는 ‘수에게"가 아니라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 인사말을 보니 2009년 12월에 올리버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올리버는 "친애하는"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친애하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일반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운을 뗐을 때, 나는 여기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S) - P380381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O)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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