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마블 위픽
이종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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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위픽 시리즈의 판형은 물론 분량과 좌측 정렬의 본문 디자인 같은 모든 요소들이 이미 흥미로웠다. 예측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야 할까.

 

 책의 외형요소들부터 전형적이지 않았고, 내용도 그러했다. 여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아주 기본적인 얼개만 파악했고, 이 작가가 능히 다룰 주제라고 생각하며 들였던 기억이 난다. 장소는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의 책방토닥토닥이었다.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9쪽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27쪽

 

 씨네21의 누군가는 별 넷 이상을 줄 법한 단편영화처럼, 어차피 길지 않아서 여백이나 비약을 굳이 아끼지 않는 밋밋한 전개일까 싶었다. 대화보다 독백이나 관찰이 더 많은 전개라거나. 처음 몇 페이지 정도는. 지레짐작이 틀려먹었다는 생각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역시 표리일체라고 안도했다. 은유와 여백으로 시처럼 전개되는 거의 모든 영상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다행히 그렇지 않았던 덕에, 이 설정으로 이 분량에서 이 서사라면 대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져 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55쪽

 

 잡지 ‘캐치’의 기자와 디자이너인 두 사람, 푸른과 구슬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블루마블이자 부루마불이다. 두 사람만 잡지의 창간 기념 이벤트로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과정, 그렇게 엮인 상황에서 구슬에게 전부터 호감이 있던 푸른의 사랑을 떠미는 뜻밖의 보드게임, 이 두 보드게임의 결과로 전개되는 푸른과 구슬의 관계까지, 이 세 개의 축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을 이룬다. 완결성 있는 소품, 소품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고 소품으로서 완성되는, 그래서 가장 소품다운 소품이란 이런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123~124쪽

 

 세 개의 축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의 보드게임 속 각자의 플레이어처럼 각자 움직이는 까닭에 결국 이 플레이어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부루마불은 부루마불다워진다. 하나의 칸에 둘이 놓일 때 비로소 불화가 발생하고 갈등이 형성되며 긴장이 고조된다. 구슬이 푸른의 뜻밖의 보드게임을 알아챘을 때부터 마냥 감미롭던 이야기가 곤두박질쳤다. 말이 잡거나 잡히거나, 돈을 받거나 잃거나. 인간의 보드게임이다.


 하지만 신들은 각자 푸른과 구슬을 말로 자신들의 보드게임을 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읽듯이 신들도 그들의 게임을 단지 즐겼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철저히 승패와 무관한 보드게임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면 주사위조차 의미가 없어서 그렇다. 어떤 우연도, 의외도 없다. 단지 필연과 의도만 있다. 신이라면 바로 이렇게, 가장 즐겁게 주사위 놀이를 할 것이다. 언제든 무엇이든 원하는 숫자가 나올 테니까. 누구도 패배하지 않은 블루마블의 보드게임이야말로 신들의 장난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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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수업 -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팔리는 비즈니스로 이끄는
호소다 다카히로 지음, 지소연.권희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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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방식, 규모 등을 막론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컨셉의 목표다. 그런 까닭에 컨셉 자체는 물론이고 그 컨셉을 기획, 실행하는 경로를 제시하는 이 책과 저자도 이율배반의 상황에 놓인다. 컨셉은 어떤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하지만 모든 소비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그 어떤 소비자들의 명확한 문제이자 해답이어야 하며, 그들이 여태 도출하지 못했지만 바로 납득되어야 한다. 따라서 컨셉은 치밀하면서도 결국은 참신해야 한다.

 

이 책의 순서에 따라 비즈니스 과제를 마주하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생각하면 세상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컨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컨셉을 작성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프레임워크라는 논리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면 논리를 뛰어넘는 비정상적인 값이 필요하니까요. -375

다시 말해, 더 퍼스트 테이크는 부담 없이 음악을 즐기고 싶지만, 아티스트의 진심을 느끼고 싶다는 팬들의 욕심 가득한 인사이트에 아주 분명한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147

 

 이 책은 치밀하게 컨셉을 수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결정적인 컨셉은 이 치밀한 논리와 구조 이후에 도출되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자기 부정인 동시에,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다. 치밀한 컨셉이 논리적인 정량의 영역이라면, 참신한 컨셉은 결정적인 정성의 영역이다. 치밀함이 누적시키는 성취와 참신함이 확산시키는 전환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컨셉이다억지로 우열을 가린다면 결정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참신한 컨셉이 우위에 놓이겠지만, 치밀한 기반 없이 참신한 첨단만으로 돌파하는 컨셉은 그야말로 논외의 사례다. 극히 드문 까닭이다. 참신한 컨셉을 결국 이룬 그 사람이 치밀함의 자질 역시 함께 갖추었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나 구성원이 치밀한 컨셉으로 참신함을 지탱하는 것이 상례다. 이 책이 결국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참신한컨셉을 작성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인하기까지 치밀한컨셉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풀어준 이유다.

 

부분에서 전체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러한 질문 바꾸기는 모두 평소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점을 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보지 못하는 각도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질문의 재구성이 반드시 일방통행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으니까요. ‘전체에 관한 질문을 생각하다가 너무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부분에 관한 질문으로 방향을 전환해 봅시다. ‘주관적인 질문을 설정했더니 너무 치우친 아이디어만 떠오른다면, 이번에는 객관적인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이타적인 질문이 위선적인 아이디어만 이끌어낼 때는 이기적인 질문을 떠올리면 됩니다. 렌즈를 교환하여 사진을 찍듯이 양방향으로 관점을 유연하게 바꾸어봅시다. -114

 

 자신이 제시하는 통찰과 기법의 효용성을 구체적,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에, 그 한계로 매듭을 짓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가 그 흔해진 호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제대로 된 약을 팔고, 제대로 약을 판다는 점 모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각 파트들부터 그 파트들이 모인 전체 구성까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기법, 요령들을 깊이 있게 제시한 다음, 그것으로는 끝내 채울 수 없는 참신함의 지점으로 결말을 맺는 컨셉이 일관되다.

 

여기서 가치와 컨셉의 차이를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당신의 회사·조직·브랜드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행동 원칙이나 행동 지침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지요. 반면 "앞으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컨셉입니다. -350

 

 컨셉의 논리를 실컷 가르치고서 이것으로 결정적인 컨셉은 도출할 수 없다는 마무리가 잘 보아도 선문답, 나쁘게 보면 기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참신한 결정적 컨셉을 위해 결국 그 한 사람, 그가 속한 조직의 치밀한 컨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확신한 결과로 보였다. 컨셉이 과제를 돌파할 수 있는 정형적인 논리, 계획, 방향이 항상 중요하지만, 그 과제 이후의 과제를 위한 컨셉은 결국 비정형성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이 이 책의 컨셉이다. 납득하기 쉬운 컨셉보다 납득해야 하는 컨셉을 제시하는 수업이다.

 

 비슷한 범주의 무수한 책 사이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경제경영, 자기발 범주의 책을 아예 안 읽는다면 모르거니와 읽는다면, 읽어야 한다면 앞으로 이 이상의 책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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