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icaru >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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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두명의 남녀 작가가 원고를 서로에게 연애편지 쓰듯이 부치고 그런 과정을 2년 동안이나 거쳐서 사랑을 하는 두 남녀 - 준세이와 아오이 - 각자의 이야기를 제목은 같지만 시각은 전혀 다른 두 권의 소설로 탄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 같다.

어디서 그런 충고를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두 소설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읽으면 좋다고 해서 나도 첫 소설을 한 장 읽고 그 후부터는 다른 소설을 두 장씩 읽는 방법으로 두권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니 - 그런 경험 자체가 당연히 이전에는 없었고 - 사랑을 구성하는 두 남녀 각자가 아픈 이별을 뒤로 한 채 8년여간 어떤 생각을 가지고 누구를 만나며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대비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준세이와 아오이는 8년전 과거의 상대방의 모습, 그 시절의 사랑에 얽매여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에서 아오이의 30번째 생일날 만나기로 한 그날까지 온전히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듯한 생활을 해 오게 된다. '인생은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성립하고 마음은 그 사람이 있고 싶어하는 장소에 있는 법' 이란 작가 에쿠니의 말과 같이 준세이와 아오이의 인생은 각자가 있는 그 곳에서 성립하여 과거가 되고 마음은 과거속의 상대방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랑의 힘일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그리고 지난 8년간 자신들을 부여잡고 있는 과거에 매듭을 짓고자 약속 장소인 피렌체의 두오모에 갔고 둘은 그 곳에서 정말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리고 3일동안 둘은 지난 8년간 세월의 간격을 메꾸려고 노력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하였고 둘은 8년간 세월의 흔적으로 상대방에게 각자가 접근해 들어갈 수 ㅇ벗는 공간이 생겼음을 깨닫고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다. -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재회해서 끝나거나 미래를 함께하기로 하는 설정이었다면 이 소설은 또 하나의 드라마에 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아오이를 떠나보내고 난 직후 준세이는 영영 과거가 되어버릴지 모를, 멀어져가는 현실을 그의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 현재로 만들기 위해 결심을 하고 아오이를 만나러 급행 열차를 타고 떠난다. - 이 부분은 사실 멋진 결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고 냉정과 열정 사이란 제목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지은 것이란 것도 느꼈다.

사랑이란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것이고 고통스런 순간도, 미움과 증오, 원망, 권태, 일탈의 순간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보다 그런 고통스런 순간이 시간적으로는 더 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모든 역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이를 뛰어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준세이와 아오이가 8년의 세월의 냉정을 건너뛰어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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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충분히 돌보는 일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쓸데없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그러나 큰 위기를 맞이하면 즐거이 목숨도 바친다. 어떤 경우에는 사는 것이 오히려 욕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봉사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남들에게 봉사하려고 한다.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우월성의 증거이고 친절을 받는 것은 예속의 증거이다. ...그는 공개적인 선전에 끼어들지 않는다...그는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며 인간사와 사물을 경ㅁㄹ하므로 언행이 솔직하다. 그의 안목으로 보면 위대한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결코 열렬히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는 벗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공손하지 않다. 공손하다는 것은 노예의 표시이다....그는 결코 악의를 느끼지 않으며 모욕을 받아도 언제나 잊고 흘려 버린다...그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칭찬을 받든 남이 비난을 받든 그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타인에 대해,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직접 면전에서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험담을 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침착하고 그의 목소리는 굵직하고 그의 말은 신중하다. 그는 오직 소수의 일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매우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경쟁에 휩쓸리지 않는다. 근심에 싸인 자만이 날카로운 소리로 외치고 급히 걷는다. ...그는 인생의 재난을 위엄과 품위를 갖고 인내하며 온갖 전술로써 한정된 병력을 지휘하는 능숙한 장군처럼 자신의 환경을 최선의 것으로 만든다. 덕이 없는 자,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대의 적이어서 고독을 두려워하지만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선의 벗이므로 그는 칩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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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영광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맥시코의 군사정권이 천주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신부가 죽음의 위협을 피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고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끊임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면서 아무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렇지만 미신적 이유로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신부는 마지못해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세속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위스키 신부라고 불릴 정도로 술을 좋아하고 여인과 정을 통해 딸을 두고 있다. 너무나도 오래 계속되는 도피 생활에 지쳐 차라리 잡혀서 죽었으면 하고 생각도 한다.

하지만 결국 한명의 인간에 불과한 사제에게 술을 마시고 딸을 두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큰 타락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이기에 계속되는 도피생활에 지치고 자신을 잡아 넘겨 현상금을 타내려는 교활한 사내에 대한 의심과 적개심을 품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경찰에게 잡혀 신분이 탄로날 뻔 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죽음의 순간을 잠시 후로 미루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도망치는 길에서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신이 사제인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인 혼혈사내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뻔한 미끼를 던진다. 은행강도인 미국인이 배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데 마지막으로 신부님을 찾고 있다고...신부는 고민한다. 함정일 것이 거의 확실하고 간다면 죽음이 기다린다. 하지만 죽어가는 미국인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신부는 함정인 줄 알면서도 목숨에 대한 미련없이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영혼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둘 수 없었기에. 결정을 내린 순간 그의 마음이 가벼워지고 온갖 집착이 사라진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무엇이 그를 괴롭힐 수 있으랴.

신부는 결국 잡히고 감옥에서 삶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성스러운 결정을 내린 그이지만 아직도 그는 인간이다. 딸을 향한 사랑을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하려 노력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는 인간이지만,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최후를 맞이한다.

솔직히 스토리가 무척 흥미로운 것도 아니고 줄거리 전개가 좀 느린 듯한 느낌도 있지만 결국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하나의 꺼져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면서 깨달음을 얻는,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여전히 지니고 있는, 사제의 모습은 적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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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당신의 지젝을 즐겨라!

지난 1월에 다음카페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에 연재했던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우리말로 번역된 지젝의 단행본 저작은 모두 7권이다(아마도 내년까지는 4-5권이 더 번역돼 나올 듯하다). 그 중 5권이 2001-3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다. 이 정도면 지젝 ‘르네상스’는 아니더라도 푸코나 들뢰즈의 경우처럼 일종의 ‘붐’은 형성할 수 있을 터인데, 현재의 사정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여러 차례 지적된 바대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함량 미달인 탓이다(그것은 상대적으로 푸코나 들뢰즈 번역의 경우 오역이 없지는 않더라도 ‘찬물’을 끼얹을 정도는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이 번역의 수준은 책의 판매량과 직결돼 있는데(그만큼 독자들의 안목이 예리하다는 의미도 된다), 알라딘 통계를 기준하여 순위를 매기면([ ]안은 원저의 출판년도),

1.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외, 1995)[1991]
2.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2002)[1989]
3.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주은우, 1997)[1992]
4.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김종주, 2003)[2002]
5. <환상의 돌림병>(김종주, 2002)[1997]
6. <향락의 전이>(이만우, 2001/2)[1994]
7. <믿음에 대하여>(최생열, 2003)[2001]

이다. 물론 판매량을 결정하는 요인에 출판년도도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신통찮은 번역의 경우에 절판되는 것이 예사이므로, 오랫동안 팔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략 그 번역의 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순위에 동감한다. 이 7권에 대해서 일부분이라도 대략 원저와 대조해 본 결과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빼면, 잘팔리는 두 권의 ‘영화책’은 지젝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 번역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나는 지젝의 이름을 영화학도에게서 처음 들었는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학을 하는 사람들 간의 입소문에 의해 지젝은 처음 우리의 ‘지식장’ 혹은 ‘지식시장’에 편입됐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바, ‘현대이론’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영화학도에게서 숭배하건 무시하건 간에 라캉과 정신분석학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라캉에 대한 열정을 보라). 요즘은 아무리 무식한 영화학도라고 해도 ‘라캉’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이 영화과를 졸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교수가 덩달아 무식하지 않는 한). 그런데 그 (신화적이면서도 난삽하기 짝이 없는) 라캉이론의 영화에 대한 개입(방식)을 가장 쉬우면서도 현란하게 보여준 이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지적 영웅’ 지젝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앞으로 나올 또다른 ‘영화책’ <들뢰즈와 결과들 Deleuze and Consequences>(2004)의 번역이 영화학도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아울러 기대해 볼 만하다).

물론 지젝의 ‘영화책’들이 읽기 쉽다는 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의미에서일 뿐이다. 당연히 지젝을 읽는 것은 라캉을 직접 읽는 것보다 10배는 쉽다. 그리고 그의 ‘영화책’들은 현재 번역/교정중이라는 <불안정한 주체 The Ticklish Subject>(1999)나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1993) 등의 ‘철학책’(독일관념론을 다룬다)보다는 3배쯤 쉽다(물론 이들 ‘철학책’들에도 영화 얘기가 들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그냥 만만하게 읽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나는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를 재미있게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해서, 지젝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지젝을 읽고 즐길/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다소 ‘계몽적인’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거창한 것은 아닌바, 비교적 읽을 만한 우리말 번역본을 같이 읽으면서 중요한 핵심을 정리/이해하고, 일부 오역들은 교정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년쯤인가(혹은 2002년에) 나는 <향락의 전이>에 대해서, 이러한 방식을 시도해 보고자 했는데, 워낙에 견적이 안나오는 번역서라 그걸 교정하면서 함께 읽는다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내가 조금 게으르고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정한 원칙은 우선 읽을 만한 번역을 읽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한 커트라인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이다. 그게 허리인바, 나머지 4권은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허리이하적인 번역서들이다(이런 번역서들은 각자의 골방에서 사적으로만 음미하는 게 좋겠다). 내가 권장하는 것은 그나마 있어서 다행인 번역서 3권을 한달에 한권씩이라도 독파해 보시라는 것이다. 그 읽을 순서는 좀 임의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삐딱하게 보기>로, 그런 후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전이해 가겠다. (가령, 쿤데라님처럼) 영화를 안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이데올로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겠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원제(Enjoy your symptom!: Jacque Lacan in Hollywood and out)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라캉 정식분석학의 핵심개념들을 헐리우드 안팎의 영화들을 소재로 하여 설명하고 있는 ‘계몽적인’ 책이다. 딜런 에반스가 쓴 <라캉 정신분석 사전> 같은 류의 책들이 보다 직접적인 용어설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젝의 영화책들은 그 추상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실감’이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비유컨대, <사전>이 비타민이나 영양제(라캉 캡슐)라면, 지젝의 책들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라캉 식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한 식탁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즐길만하지 않을까?..

(예고) 다음번에 다룰 내용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얘기와 함께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를 설명하고 있는(동시에 데리다에 대한 라캉주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1장은 내가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 기억에 평이하게 읽혔던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간다(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다). 혹 읽으신 분들이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하실 경우에는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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