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증평에서 재판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몇번 국도였는지는 모르겠다.

증평 IC를 타기 직전의 왕복4차선 국도였는데 사방이 훤히 펼쳐진 들판에 푸르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흰 구름이 흩뿌려져 있는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런지 경치를 보고 감흥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오늘 본 하늘은 정말 사진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위 사진은 네이버에서 검색한 사진이다. 내가 본 하늘과는 다르지만 이 사진으로도 그때의 감경이 조금은 전해지는 것 같다.)

대신, 그 아름다운 광경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  스모그 하나 없이 한없이 푸른 하늘과 마음껏 매달려 있는 구름을 보니 갑자기 모든 근심 걱정이 사소하게 느껴지고 살아있음이, 그리고 아직 젊음이 너무도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시간 쯤 뒤에 라디오에서 오늘 하늘이 무척 이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태풍이 지나간 뒤의 가을 하늘이 인터넷과 뉴스를 수놓을 것이라고. 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산은 아름답지만, 태풍이 지나간 뒤에 산에 오를 때의 경치를 최고로 친다고도 했다.

라디오 진행자의 말처럼, 문서와 모니터만 마주한 채, 주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지내며 내 나름의 고민거리로 씨름하고 있다가  문득 마주친 태풍 후의 가을하늘은 나에게 그렇게 축복처럼 왔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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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joins.com/et/200509/02/200509022030003531a000a200a210.html

[행복한 책읽기] 덧나는 현대사 상처, 이젠 꿰맬 때

한국 근현대사의 '덧나는 상처'인 친일 등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민족문제연구소가 8월29일 발표한 친일파 3090명 명단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공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소설가 복거일씨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가 친일파 처벌을 주장하는 '쉰 목소리'들에 대한 '노!'의 목소리라면, 서양사학자 박지현씨의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는 2차 세계대전 말 프랑스의 꼭두각시 비시 정권의 사례연구를 통해 '완벽한 과거사 청산'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복거일 지음, 들린아침, 534쪽, 2만원, 2003년8월 발행

2039년 10월 26일 유신독재 종식 60주년을 기념하여 독재청산문제연구소는 친독재인사 명단 3090명을 발표하였다. 명단에는 유신시절 판검사를 지낸 사람 모두가 포함됐다. 이유는 사법고시를 통해 유신체제에 가담했던 앞잡이라는 것이었다. 발표 뒤 나라가 들끓었다. 2000년 초반 집권했던 전직 대통령도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판검사를 했다고 친독재인사라고 할 수 없다는 일부 반론이 제기되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모른 척 했다.

물론 내가 잠시 떠올려본 미래 가상이다. 며칠 전 발표된 친일파 명단 3090명을 둘러싼 소동이 갖는 위험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2년 전 나온 책, 그러나 사회적 논의에서 소외됐던 소설가 복거일의 '죽은 자를 위한 변호'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책에서 소설가 복거일은 친일파 변호를 자청한다. 대중적 정서를 거스르는 도박이기에 그는 친일문제에 관련된 네 가지 가정이 근거가 박약하다는 점부터 밝힌다.

즉 1) 친일행위들은 뚜렷이 정의될 수 있다. 2) 친일파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3)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해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 만한 법적 도덕적 권위를 지녔다. 4) 그런 판결은 우리 사회 발전에 필수적이다. 이런 숨겨진 가정을 공격하는 것은 복거일 식 논파법의 특징이다. 물론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자료를 근거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간단치 않은 친일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친일 행위는 이제 역사적 사건이므로 역사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시민단체나 매스컴이 아닌 전문가가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1년여 전의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서도 해석이 각양각생인데 하물며 70여 년 전의 사건이 아니던가.

다음으로 저자는 친일문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라는 주제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글픈 얘기지만, 거의 모든 증거들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조선조 왕조의 통치 아래에서보다 잘 살았다는 외국인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은 노선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조선의 근대화가 식민지 지배의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일본이 조선이란 국가를 근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조선을 개발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독립 후에 근대화란 미명으로 포장된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에 전적으로 해로웠고 조선에 이로운 측면은 전혀 없었다는 가정을 반박하는 것이지만 이때의 조선이 국명인지 지명인지를 분간해야만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친일파 청산과 함께 저항 운동 연구에 보다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민족정기를 높이는 데는 부끄러운 친일 행위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보다는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나 역시 동의한다.

다시 말해 파사현정(破邪顯正) 전략보다는 현정파사(顯正破邪)가 낫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삼청교육대 만들어 깡패를 없애면 정의사회가 구현되고, 부동산 투기꾼을 잡으면 집값이 안정될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반대다.

즉 정의사회가 구현되면 자연스레 깡패가 없어질 것이고, 집값이 안정되면 부동산 투기꾼이 없어질 것이다. 독립투사를 계속적으로 발굴하고 극진히 예우하면 할수록 친일파는 더욱 더 초라해질 것이다. 실은 복거일 같은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는 외롭다. 모든 사람이 맹목적으로 앞 만 보고 뛸 때 그는 뒤를 보기 때문이다.

탁석산.철학자.'한국의 정체성' 저자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박지현 지음, 책세상, 184쪽, 4900원, 2004년 8월 발행

'신화의 시대'에서 '기억의 시대'로. 독일 점령(1940년~45년) 하의 비시 프랑스라는 유령이 그려온 궤적이다. 패전, 독일점령과 비시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던 5년은 프랑스인들에게 어두운 과거였다. 종전 뒤 수치스런 독일의 꼭두각시 정권인 비시 프랑스의 유령 앞에 프랑스인들은 신화에 기댔다. 드골의 집권과 함께 부각된 그 신화란 "소수의 대독 협력자를 제외하면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나치 지배에 저항했다"는 레지스탕스의 장렬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1968년 혁명은 분기점이었다. 기존 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환멸은 비시 시대에 대한 비판을 자극했고 부끄러운 기억들이 봇물처럼 들춰졌다. 기억의 시대 도래 앞에 자발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인들이 부각됐다. 이때 나치에 저항했던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프랑스는 죄악의 발상지로 변해 버렸다. 역사학은 방향 상실의 위기 앞에 비틀거렸다.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의 저자는 이렇게 의문을 털어 놓는다. 이어지는 고백은 한국 근대사로 이어진다.

"(그 이전)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가, 국외에서는 망명정부인 드골 정부가 독일과 대항해 싸웠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로 프랑스를 꼽고 있는데, 그들 역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던 것일까?"(7~8쪽)

"그들의 현주소는 나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특히 일본강점기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반일 대 친일, 좌파 대 우파의 이분법이 지금껏 갈등으로 남아있다. 총체적 과거사 청산이라는 개념을 세워보지도 못한 채 일제 강점기에서 이념의 시대, 민주화 시대, 개혁 시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9쪽)

파리1대학에서 비시 체제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저자의 이 책은 1940년 전쟁 패배는 독일의 힘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프랑스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규명해낸다.

전쟁 이전부터 프랑스 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좌우 대립, 파시스트 등 이념의 범람과 실패의 결과라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프랑스인들은 이제 비시 체제를 단순히 대독일 협력체제로만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국내 학자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시 연구라 평가받을 수 있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종착점은 한반도. 그리하여 "일제 치하의 한국인들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이해하는" 도식에서 탈피하여 그들의 "총체적인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의 밑바닥에는 점령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삶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 어두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진정한 초석이라는 성찰이 깔려있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와 일제시대 역사의 만남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멈춘다. 4년에 불과했던 나치의 점령과 36년을 지속했던 일본의 점령의 경험을 수평적으로 비교하고 프랑스식 과거청산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 것에 저자는 반대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의 역사와 우리 역사와의 만남이 끝나야 하는 것일까? 이 시점에서 프랑스식 과거 청산의 경험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없는가?

과거에 대한 억눌린 기억이 머지않아 엄청난 반대 기억의 홍수를 몰고 오고 온갖 종류의 기억의 범람 속에서 과거의 모습은 오히려 왜곡되었던 프랑스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어두운 시절에 대한 폭로와 비난의 와중에서, 기억의 오용과 남용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차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반성에서 귀담아 들을 부분은 없는가? 신화와 선별된 기억, 억압된 기억을 넘어 과거사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김용우.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서양사


조금 더 읽으려면 …

1개월 전 나온 책 '세계의 과거사 청산'(안병직 등 지음, 푸른역사)제작을 준비하던 출판사의 편집팀은 당혹스러웠다. 본래 책 뒷 편에 친일.과거사 관련 참고도서 목록을 만들기로 했는데, 의외로 양질의 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업은 포기를 했다. 친일.과거사 청산문제란 그만큼 마음이 앞섰을 뿐, 그동안 정교한 이론적 검토는 부실했음을 보여주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 분야의 저술 중 임종국의 선구적 저작 '친일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2002년 재출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6년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이후 '친일정치 100년사'(김삼웅 지음,동풍,1995년)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증언 반민특위'(정운현 지음, 1999년) '실록 군인 박정희'(정운현 지음, 개마고원, 2004년)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과거사 정리의 이론적 작업 이전에 단순 다큐멘터리에 머문다는 한계를 가졌다. 친일행위를 한 개인들의 행적 보고서 내지 자료집에 그친 셈이다.

외국의 사례를 담은 책으로 기억할 만한 것은 '프랑스 대숙청'(주섭일 지음, 중심,1999년)이 꼽힌다. 이 책은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비시 체제 협력자 청산문제를 과거사 정리의 모델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저널리스틱한 이 책은 최근 사학계의 성과와 동떨어졌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앞의 책 '세계의 과거사 청산'저자들은 완벽한 과거사 청산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으며, 이렇다 할 모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비시체제 청산작업 역시 완벽한 과거사 청산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적된다.

2005.09.02 20:30 입력 / 2005.09.03 05:29 수정

이 기사를 읽고 중앙일보의 사주의 아버지가 친일파로 친일인명록에 올랐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중앙일보가 친일문제를 덮어두고 가자는 주장을 은근히(이 정도면 대 놓고일수도 있지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상한 것인지...

친일파 청산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과거청산에 여러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데기 무서워서 장을 안 담글 것인가? 우리가 언제 한번이라도 과거청산을 한 적이 있었던가? 현 여당의원과 관련된 친일파 범위확정의 문제는 강한 의구심이 들지만, 구데기는 그때그때 대처하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장 담글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장 한번 담궈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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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2disc)
한재림 감독, 이대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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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애의 목적은 연애 5년의 신출내기 남선생과 사랑의 상처를 입은 교생간의 연애를 때로는 아기자기하게, 때로는 심각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능글능글한 플레이보이 스타일의 유림(박해일분)은 교생 최홍(강혜정)에게 노골적으로 성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정상적이라면 따귀를 10대는 맞고 고소를 해야할 상황이지만 홍은 이를 강하게 거부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튕기고 때로는 도발하며 둘의 연애는 시작된다.(물론 둘 모두에게 바람을 피는 것도 되긴 하지만)

유림의 지나치게 발칙한 접근이나 이를 은근히 받아들이는 홍의 관계가 처음에는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 특히 둘다 애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 유림과 홍이 차츰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요즘 같은 시대에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림과 홍 모두 결혼을 사실상 약속한 애인이 있었으나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면서 이미 옛 연인이 되어버린 기존의 애인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유림이 사랑의 유효기간은 화학적으로 3개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과 그러면서 새로운 사랑..연애에 빠져드는 모습이 오버랩되는 느낌이다. 유효기간은 짧을지 모르지만 그 강렬함은 다른 모든 것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만든다. 연애란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렬하고 파괴력이 강하지만,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면 아무런 의미없이 사라져 버리는...그렇다고 이 영화가 사랑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사랑이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싹트니까 말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시원시원하게 걸죽한 대사다. ‘5초만 넣고 있을께요’부터 시작해서 박해일의 입담이 압권이다. 남자들은 노골적인 음담패설로 여자를 꼬시는 유림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낄 만하다. 영화에서는 섹스도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영화제목인 연애의 목적이 섹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연애의 목적으로 한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과연 연애의 목적이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유림과 홍의 연애를 놓고 주위 사람들의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는 장면이었다. 유림과 홍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애인이 있으면서도 서로 새롭게 연애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 뿐인데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학교라는 공간, 인터넷을 무기로한 학생들의 무책임한 비방, 무책임하게 소문을 믿고 이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의 심리가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둘의 연애는 교생이 꼬리를 쳐서 애인 있는 남선생과 바람이 났다는 것에서부터 남선생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교생을 성폭행 했다는 것까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개의 사실로 각색된다. 그리고 홍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여 하나의 사건이 전혀 다른 성질의 사건으로 각색되는 순간 주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의 극적인 변화...를 보고 내가 앞으로 사건을 처리할 때 정말로 신중해져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을 꼬시는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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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09-0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영화였어. 나는 둘 다 이해되지 않어.
암튼, 연기는 꽤 괜찮았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22 세트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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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거의 1년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늘리고자 역사책 코너를 뒤적이다가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를 접하고 읽게 된 것이. 역사 또는 역사책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인지도가 높은 책을 위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인지도에는 어쩔 수 없이 출판사의 광고와 마케팅 활동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내가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를 고르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 21권의 전 시리즈가 완성되어서 신문기사 등으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문의 기사도 대체로 저자의 노력과 연구자세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지금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기사가 어디 있겠는가?) 재야에서 한평생을 우리역사 연구에 받쳤다는 저자의 프로필도 마음에 들었다. 막연히 이제껏 주류 역사학계가 일제시대의 영향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고(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나의 막연한 추측이라는 말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틀에 박히고 죽어 있는 역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재야’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고, 그렇다고 운동권적인 시각에 크게 사로잡히지도 않은 듯 하면서 역사학자로서의 열정과 소명의식이 있는 듯하여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1년여 지난 지금 결국 나의 독서는 11권에서 끝마치게 되었다. 애당초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한번 훑어보기 위함이었는데 1년 동안 미약하나마 그 의도는 어느정도 달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두 번째로는, 어쩌면 이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애당초 관심이 갔던 것은 이 책이 주안점을 두었던 민중들의 삶과 문화보다는 역사의 큰 흐름과 그 흐름의 갈림길이 되는 주요사건들에 대한 기본지식과 역사적 의미 등 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으나 7-8권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 채 멍하게 있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은 11권까지만 읽고 나머지 부분은 한권으로 된 역사서로 재빨리 스캔을 하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책을 읽자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부수적이지만, 서술이 좀 논리적이지 못하여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는 점도 독서중단 결정에 아주 조금은 기여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21권 전체를 읽지 못하고 임진왜란 직전까지인 11권까지 읽고 나의 독서는 중단되고 말았다.

좀 아쉬움은 남는다. 그렇지만, 얻은 것도 많다. 우선 우리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을 얻으려는 최초의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하게 해주었고, 학창시절 배웠던 역사에서는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관점도 접할 수 있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삼별초 항쟁이 군사정권에 의해 각색된 면이 없지 않다는 점,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의미를 강조한 신채호의 주장에 대한 반박,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조선이 명에 대해 취한 사대주의와 그에 대비되는 고려의 상대적 자주성 정도...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찬찬히 훑어볼 수 있었다는 점과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관심이 가는 부분에 대해 추가적인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 나의 소박한 우리 역사읽기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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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09-0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글을 보니, 함부로 22권짜리는 도전하면 안 될 것 같군. 흐흐..

doll0826 2007-03-2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는데요...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그래서 지금 16권에서 읽기를 중단하고 있는중...
 
대한민국사 2 - 아리랑 김산에서 월남 김상사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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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주로 친일파들이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 지배세력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해 온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2권에서는 주로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치부와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관한 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가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는 무척 크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지금도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고 있다. 근대화의 초석을 세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는 주장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회적으로 암매장한 악독한 독재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주장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로 극과 극이다. 어쩌면 모든 평가가 그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사가 한면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그러나 적어도 그가 우리 현대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그의 등장이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역사적 발전에 기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긍정 또는 부정의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대한민국 史 02를 읽으면 적어도 박정희의 어두운 면은 확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은 박정희의 功을 아무리 고려하더라도 덮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박정희의 치부를 들출 때처럼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구체적인 논거가 좀 빈약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박정희가 아니고 다른 독재자가 집권했어도 그 정도의 경제성장은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는 식의 무책임한 반론은(저자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논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박정희에 대해서도 평가해줄 면은 평가하여 그의 功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다고 그의 어두운 면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글도 내게는 꽤 새로웠다. 어린 시절 어디서 배운 지식인지는 몰라도 과거 우리나라에서 널리 퍼져있던 가짜 김일성설을 어렴풋이 믿고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 기억도 못할 어린시절의 나에게까지 그런 인식을 심어주었다면 정말 교육의 힘(특히 왜곡된 교육)이 엄청남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실제 있었고 그 성과도 상당했던 것 같다. 다만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관해 과장된 부분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저자의 태도가 조금 불만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예비군에 대한 저자의 지적도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과연 지금과 같은 예비군 시스템이 꼭 있어야 하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분명 인력과 물자의 동원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만, 지금의 예비군 체계는 누가 봐도 좀 아닌 것 같다. 예비군 관련직종에 종사하는 이익집단이 너무 커져 제도에 손을 대기 힘들어졌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상아탑의 비리.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보면 정말 말도 안되고 기도 차지 않는 일들이 사립대, 사립고교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다만 당사자가 아니라 관심이 없을 뿐. 그래도 이 책에 나온 정도의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립학교법과 관련된 서로 다른 주장의 당부를 판단할 수 있으려면.

개인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정책 중 지지하지 않는 것이 꽤 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방향이나, 그런 정책을 추진하는 밑바탕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의 생각이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출판사가 한겨레신문사라는 무척 시사적인 점 말고도 크게 보아 저자의 생각과 현정부의 정책방향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한순간에 완전히 전환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상당부분은 적어도 그 방향만은 올바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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