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전 쯤 스키장에 갔다. 성우현대 리조트였는데, 모처럼 휴가를 내서 야간 스키도 타고 다음날 오전, 오후까지 정말 짧은 시간동안 열심히 탔다. 내 스키 실력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중급은 좀 싱겁고 상급은 좀 버거운 정도의 실력이다. 어렸을 때 말고는 정식으로 레슨을 받아본 적 없이 그냥 일년에 몇 번씩 스키장을 가면서 적당히 타게 되는 폼으로 말이다.


사실 그날도 특별한 동기부여가 없었으면 상급자 코스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친구와 함께 온 친구네 커플과 코스 정상에서 만나게 되었고, 친구가 상급자 코스도 갈만하다고 부추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 친구는 나보다 스키를 더 잘 탔지만, 그 친구의 말에 혹하기도 했고, 함께 있던 선배형-이 형은 실력이 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나보다 겁이 없었다-과 나는 둘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상급자 코스로 들어서고 말았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초반 수십 미터를 그럭저럭 내려오고 나서 급경사 코스로 접어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날 내려왔던 코스는 내가 폼은 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에이자로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정말 오래간만에 상급자 코스를 가자 몸이 긴장되고 깎아지른 듯한 경사에 덜컥 겁이 나서 나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거의 옆으로만 가기 시작했다. 거의 평행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전환을 하려니 오히려 전환이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쉽게 잃었다. 당시에도 겁먹지 말고 과감히 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머리와는 달리 내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이라는 제목에 스키이야기가 좀 길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오래간만에 따뜻한 말 한마디에 훈훈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그 슬로프에서였다. 중간쯤까지 어기적어기적 내려오던 나는 계속 소심하게 옆으로 이동하다가 급경사에서 넘어지면서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속도도 거의 없었는데 다리가 꼬이면서 왼쪽 플레이트가 떨어졌고 나는 그 상태로 10여미터를 계속 미끄러졌다. 순간 이 사태를 어찌하냐는 생각과 쪽팔림이 함께 들었지만, 멈출 여유도 없이 나는 계속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꼬마천사가 나타나듯이(그때 나에게는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꼬마스키어가 나타나더니, 내 아래로 와서 자기 스키로 브레이크를 걸어서 나를 멈추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은 꼬마가 같이 넘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꼬마의 스키 실력을 생각하면 그런 걱정은 기우일 것이다. 그리고 자기 누나를 부르자 어디선가 또한명의 꼬마 천사가 나타나 나의 분리된 스키 플레이트를 주워 나에게 밀어주는 것이었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고마움이란...그런데 그 꼬마들이 내 플레이트를 찾아주고 나를 일으켜주고는 가면서 하는 말이 더 감동이었다. ‘조심해서 안전하게 타세요’ 그 목소리도 어찌 그리 이쁘던지 ^^;;


나를 도와준 사람이 패트롤이었다면 분명히 ‘위험하니까 여기서 타지 마세요.’였을 것이다. 그 말은 일면 맞는 말이다. 실력이 안되면서 상급자 코스를 타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 말 대신 꼬마들이 한 말은 순간적으로 쪽팔림도 잊게 해 주었고, 더 도전해서 이 슬로프를 정복하겠다는 오기를 심어주었다.


결국 나는 몇 번 더 그 슬로프를 도전해서 폼은 안 나지만 그럭저럭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 꼬마들은 상급자 코스에서 폴대를 꽂아놓고 훈련을 하는 엄청난 실력자들이었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사소한 해프닝이었지만, 그 때 내가 기대했던 말과는 다른 따뜻한 말을 들었을 때의 훈훈한 느낌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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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2disc) - 할인행사
박광현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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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영화가 나왔을 때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한국전쟁당시 순진한 마을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

이 화해를 한다...뭐 이런 뻔한 스토리가 식상할 것 같았고, 영화가 분명히 양자간의 단순한 화해로 끝나지는 않을텐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관람객 300만을 훌쩍 넘기면서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주위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도 거의가 다 영화가 참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주요장면을 상당히 여러번 접해본 상태였지만(이 영화는 정말 마케팅비용을 많이 쓴 것 같다.) 영화를 보기전 가졌던 마음내키지않음을 한쪽으로 던져둔 채 영화를 보러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기본 스토리라인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단순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전쟁(또는 6.25.전쟁)만큼 수많은 비극과 아이러니, 그리고 수많은 해석이 가해지는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흔치않을 만큼 한국전쟁 자체가 드라마틱한 요소를 수없이 가지고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한 형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에 처해진 것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는 만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국군과 인민군이 전쟁의 직접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순박한 마을에서 함께 지내며 화해를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전쟁의 광기가 그런 일을 일어나기 어렵게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웰컴투 동막골’에서는 그런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영화적 설정으로 바로 동막골이라는 동화속에 나올법한 마을과 때묻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곳에서는 수류탄이 곡간에서 터지면 팝콘이 되어 하늘에서 떨어지고, 군인들이 총을 들이대도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게 손님으로 받아준다. 그리고 그러한 영화적 설정들은 이 영화가 가장 비극적이고 무수하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냈을 한국전쟁을 그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마을주민들의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와 정말 천재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적 설정이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완벽하게 중화시켰다고나 할까.(강혜정이 정말 잘 연기한 ‘여일’ 캐릭터도 너무나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이 영화를 두고 미국은 주민들을 학살하는 자로 그리고 인민군은 주민들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린 편향된 시각을 조장하는 영화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몇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미군이 오폭이나 작전상의 불가피성 또는 일부 군인의 광기로 많은 민간인을 살상한 것은 어느정도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서울시민들을 기만한 채 한강다리를 끊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미군만 민간인 학살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통일한국이 건설되는 것을 부당하게 막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에서의 미국이 마을을 폭격하는 상황이 사실을 날조한 완전한 허구가 아닌 이상 그에 대한 색깔시비는 시비자의 인식수준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독이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 인민군이 부상자를 학살하려고 한 장면이나, 미군인 스미스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치는 장면 등이 그렇다(마지막 폭격기와의 전투장면에서 임하룡이 ‘연합군’ 운운하는 것은 약간 오버였지만..)


전쟁을 그린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것...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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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정치학 - '사면은 좋으나, 망각은 거부한다.‘; 아담 미흐니크

사실상 대중 독재의 과거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문제는 사법적 차원에서 죄의 유무를 추궁하는 문제를 넘어서, 그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죄의식과 수치심을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p242)


이등 국민과 비국민(p64)

세습적 희생자 의식과 결합된 이 일등 국민의 지위에 대한 회한과 욕망은, 이등 국민인 자신이 만주와 동남아의 비국민에게 가한 ‘새끼 식민주의 sub-colonialism'적 억압에는 눈을 감고, 식민주의의 다층적 억압 구조를 일본인(일등 국민) 대 조선인(이등 국민)의 구도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 구도에서 비국민에 대한 이등 국민의 억압과 차별, 그리고 이등 국민이 일등 국민이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잠재적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의 여지는 별로 없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한줌 친일파의 인적 숙청을 통해 식민주의가 청산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적지 않은 수의 식민지 조선인들이 가졌던 제국과 근ㄴ대에 대한 선망과 동경, 그리고 일등 국민이 되고픈 사회적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사 논쟁과 시대착오주의(p106)

고구려사 귀속을 둘러싼 한중간 논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이고 비역사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있었던 것은 그저 고구려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 전에 존재했던 고구려에 (근대 동아시아의 경우) 20세기에서야 등장한 근대 국민 국가라는 개념을 그대로 투영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논쟁 구도인데, 이건 시대착오입니다.


민족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개념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는 하나’라는 구성원 간의 동질감을 그 전제로 하는데, 신분제/반상제가 존재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과연 그게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때 일본군 점령 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는 것이었거든요...(자신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착취나 하는 양반들이 물러가고, 갑자기 쌀 나눠주겠다는 놈이 들어온 건데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싸웠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의 궁성을 불태운 건 노비들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지킬 것이 있는 집단과 지킬 것이 없는 집단의 차이입니다.(p110)


적대적 공범관계

-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 또는 빈 라덴과 부시가 서로 대립하는 것과 같은 외양을 띠면서도 사실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자신의 힘과 권위를 강화시키는 공범관계에 있다는 주장. 부시가 빈 라덴을 제거하려면 할수록 이슬람에서의 반미주의는 강화되고 이는 빈 라덴의 힘을 강화시켜 준다. 반대로 빈 라덴이 테러로 미국을 위협할수록 테러에 대한 전쟁을 주축으로 한 부시의 정책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민족혁명(p234)

대중 독재의 체제적 성공과 효율성은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동원이 전제될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민족 공동체의 정치에 대한 국민적 참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보장한 ‘국민 주권’ 개념은 대중 독재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동원을 이끌어내는 사상적 기제였다....물론 이는 주권 독재가 대중 참여 민주주의를 현실로 보장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 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은 ‘대문자 현실’이 아니라 ‘인식된 현실’ 혹은 ‘사회적으로 해석된 현실’의 영역에서였다. 인민 주권론이 대중에게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민족 공동체에 소속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통해서였다...인간의 실천을 유도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현실’이기 때문이다.(p235)...민족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믿음이나 가치들을 구조화하고 위계를 만드는 대중 독재의 ‘메타 신앙’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배반감과 기대에 못 미치는 일상적 삶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불평, 불만에도 불구하고, 민족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유지되는 한, 체제에 대한 일반적 동의 수준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p237)


민중 없는 민중 사학(p294)

민중 역사학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올바른 결합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관건적 문제라고 파악하는 한, 그래서 민중의 내적 역동성을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이라는 추상적 담론 속에 가두는 한, 그것은 민중 없는 민중 역사학으로 남을 위험성이 컸다.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추구, 해방의 거대 담론에 대한 집착 등은 사실상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민중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엄격히 말하면, ‘민중을 위한 역사’는 있었지만 ‘민중의 역사’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무엇이 민중을 위한 역사인가를 결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해였다. 과학적 인식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구성주의의 시각이 설 땅을 잃어버린다. 때때로 선험적 도식성과 경직된 획일주의가 논의와 해석의 다양성을 덮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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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국민화(p140)

- 국가와 사회의 이분론의 전제에서 국가권력이 일반 대중을 국가권력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지원 및 참여하도록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 전쟁이나, 스포츠 경기를 통해 일반 대중이 국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되고 이것이 국가권력의 통치를 용이하게 한다. 국사도 대표적 도구이며 여기에서 국사의 태생적 한계가 도출된다.


열린 민족주의(p158)

- 인종주의와 대비하여 다양한 계층, 인종, 종교를 포섭하는 것을 인정하는 민족주의. 그러나 열린 민족주의 역시 이런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여 ‘민족’이라는 카테고리의 하위에 위치시키고 민족개념은 결국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국가권력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도구개념이라는 점에서 닫힌 민족주의 또는 인종주의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집합적 유죄/ 세습적 희생자의식

- 역사적 사실에서 가해민족 또는 국가, 그리고 그 국민을 집합적으로 유죄로 낙인찍고 그와 대비하여 가해자에 협조한 일부 배신자(친일파등)을 제외한 나머지 피해민족 또는 국가, 그리고 그 국민들을 희생자로 보는 것. 그리고 이러한 희생자의식이 대를 이어 세습되어 가해자 대 희생자의 구도로 인식하는 것. 이러한 집합적 유죄, 그리고 그와 연결된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희생자적인 측면의 일방적인 강조로 희생자가 가해자의 측면도 가질 수 있다는 복합적인 이해를 가로막는다.


기억의 정치학

- 과거의 역사적 경험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 보다는 이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널리 알려 과거의 역사적 과오들을 반성적 성찰의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사면을 전제로 가해자들의 진술을 받은 것이 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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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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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국가주의를 해체하자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임지현 교수의 기본 논지는 국가권력이 국가의 구성원들을 자발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제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국사, 민족주의, 국민 주권주의 등등 이라는 것이다.


임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임교수의 ‘스스로 선택한 정신적 망명자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첫 느낌은 무척 불편하고 당황스런 것이었다. 국사나 국민윤리 자체에 국민들의 일체감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우리 국사가 일본 극우 민족주의의 역사관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지적이나,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간의 논쟁에 대해 고구려사를 우리가 전유할 수 없다는 지적, 일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토대로 인식하고 있던 민족주의에 대한 동원 기제적인 성격에 대한 지적 등을 접하면서 내 자신이 철저히 ‘국민화’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런 느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임교수가 주장하는 국사의 해체나 민족주의를 극복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이후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임교수 스스로도 답하고 있듯이 명확한 해답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국사와 민족주의를 해체하면 다른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만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수가 모여 함께 사는 사회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느  도의 규율과 집단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기제가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간에 계층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임교수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무정부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밖에도 임교수의 국가주의 해체 주장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의 지적 공감대 속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실질적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작으로 민족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청산문제, 미국의 신제국주의 등에 대한 기존 논의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근대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와 인식의 폭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임교수의 논의는 무척 의미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실제 존재하는 현상과 그것에 대한 인식 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회의 현상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은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변형시킨다. 그러면 대다수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또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뼈 속 깊숙이 박혀있는 국사 또는 민족주의의 패러다임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왜곡된 사고의 틀로 현실을 인식하고 국가권력의 입맛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는 현실 그 자체는 결코 하나의 시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주류적인 이데올로기나 이론에 의해 재단된 채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들 개개인의 이념(?)을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등으로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듯이 진보나 보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면’적인 것이지만 이를 인식할 때는 특정 위치의 ‘점’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자는 임교수의 주장에 대해 극단적인 상대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현상을 특정 이념이나 기제의 틀을 초월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우리는 특정한 틀 안에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고, 책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 아닌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기 때문에 임교수와 같이 인식의 틀 자체를 뒤집어 보려는 시도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밖에도 유럽 등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비교를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동유럽 국가 등의 예를 통해 일회적인 사법적 처벌 - 특히 자주 사면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 보다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반성적 성찰의 기억으로 간직하자는 ‘기억의 정치학’ 주장은 무척 공감이 갔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 이런 목소리는 왜 공론화가 안되는 것인지...(아님 나만 모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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