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간만에 11시간이나 자 버렸다.

어제 모처럼만에 저녁약속이 없이 시간이 비어 있어서 집안일도 할겸 밀린 일을 하려고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던 중, 전날 술을 마시고 피곤했었는지 졸려서 1시간만 눈을 붙이기로 하였다.

7시에 자리에 누워 알람을 8시에 맞추고 잠시 잠을 잤는데.

눈을 떠 보니 사방은 캄캄하고 몇 초 동안은 시간 감각이 없었다.

눈을 뜨기 직전까지 고등학교 생활로 되돌아간 꿈을 열심히 꾸고 있었는데,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문득 들었지만, 곧 어제 7시부터 잠을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

다시 깨서 무엇을 하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그냥 조금 더 자기로 했다.

결국 6시에 깨고 말았는데 일어날 때 몸이 정말 가뿐함을 느겼다.

역시 잠이 보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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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내 삶은 내가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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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 전후 - 1940-1949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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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은 70살이 넘은 노학자가 자신의 유소년기(대략 6살에서 15살까지)에 해당하는 해방전후기(1940년~1949년)의 기억을 복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6년간의 일제치하에 있다가 해방을 맞고, 해방이후에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혼란했을 그 시절을 실제로 산 사람이 당시 소년의 눈으로 해방전후의 생활상을 복원한 것이다.


내가 뒤늦게 해방전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읽었던 소위 ‘운동권적 성향’의 역사책을 통해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막연한 역사적 지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우리의 현대사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면에 더 관심을 가져 책을 몇권 읽다 보니 역사적인 fact는 하나인데 그것을 상반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격변기였던 해방전후의 시기는 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의 눈으로 당시 일어났던 일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은 없을까하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던 중에 신문지상에서 ‘나의 해방전후’를 접하고 읽게 된 것이다.


격변기를 실제로 겪은 사람의 객관적인 fact의 서술 -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한 것이었고, 이 책은 그 기대에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저자는 ‘들어가면서 - 기억의 복권을 위하여’라는 책의 서두에서 이 점에 관하여 무척 공감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의 사고는 개인적인 경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고 실제로 겪지 못한 과거의 일을 떠올리거나 이를 평가할 때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생활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주위에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생각만으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 종종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일상적이고 당사자들은 별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을 행위가 예상치 못한 큰 역사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그러한 파장조차 없이 단순히 후세 역사가들이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적 사건의 실제 상황을 포착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의 불일치하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랄까.


물론 이 책을 읽고 그 욕구를 모두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기대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충실했고, 다만 내가 객관적 사실의 진술보다 내가 보고자 했던 어떤 것 - 기술된 역사와 실제 사건이 달랐다는 진술 등 - 을 읽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부모님을 통해 조금씩 들었던 당시의 생활상이 저자의 놀랍고도 성실한 기억의 복원작업을 통하여 많은 부분 재생된다. 그리고 저자는 정말로 객관적으로 당시의 생활을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글 중간중간 드러나는 그의 삶이나 인생관을 통해 정말 그가 객관적으로 기억을 복원했으리라는 점에 대한 강한 신뢰가 생긴다. 복원된 기억 중 일부분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활했었나 하고 쉽게 믿기지 않는 것도 있고, 불과 십수년 전에만 해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일도 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일도 있다. 그것이 아마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겨우 30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는 것도 무척 의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불완전한 기억이 더욱 흐려지기 전에 어린 시절을 조금씩 기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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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2disc) : 디지팩
박찬욱 감독, 이영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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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름을 외우는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하나가 박찬욱 감독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특별히 감명깊게 보아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올드보이로 박찬욱 감독이 너무 유명해져서 나또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특정 감독의 필르모그래피를 쫒아 영화를 볼 정도로 열성적이거나 영화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을 때도 이 영화가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씨리즈로서 이영애가 주연을 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배경지식만을 가지고 흥행에도 꽤 성공한 유명 영화를 본다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복수’다. 그것도 13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러한 복수가 성공했는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금자가 복수에 성공을 했는지, 복수에 성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관객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무척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해서 특이한 방법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다는 것 말고는 과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솔직히 잘 알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의 제작의도가 벌써 공표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나는 영화를 보고 ‘그럭저럭 볼만하긴 한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인공역의 이영애에 대해서도 박찬욱 감독의 유명세와 함께 이영애 자신의 유명세로 인하여 완벽한 연기변신을 이루어 냈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았는데, 개인적인 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영애가 과연 금자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영애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리고 금자라는 캐릭터와 이영애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금자가 금자로 느껴지기 보다는 이영애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언가 열연을 하고 있기는 한데, 금자라는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는 느낌이랄까...


그밖에 영화의 구도나 화면이 무척 이뻤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의 화면이 웅장하고 스펙태클하게 멋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화면은 마치 인테리어 잡지 속의 잘 배열된 소품 또는 잘 꾸며진 실내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쁜 달력 그림 같다고 해야 하나. 한 장면 한 장면 마다 구도나 화면에 무척 신경을 쓴 느낌이다. 그리고 독특한 분위기의 나레이션, 머리에 빛이 나거나 수형자의 인적사항이 재미있게 화면에 제시되는 장면 등은 무척 신선하고 또 맘에 들었다. 

 


색상의 절묘한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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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2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비디 패키지는 어떤가요? 흑백판이랑 2disc라고 하던데,
살까 말까 고민중이거든요.

외로운 발바닥 2006-03-2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빌려본 것이라 도움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에궁~
 

 

‘한국 현대사와 부침(浮沈)을 같이 한변호사 100년은 영욕의 세월이었다.’ 올 7월이면 한국에서 변호사란 직종이 생겨난 지 꼭 100년이 된다. 지난 세월 동안 변호사는 변함없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런 만큼 사회적 책임도 무 거웠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에 대항 했던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보신주 의에 급급하거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변호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변호 사들은 살아남기에 혈안이 돼있고, 변호사수도 대폭 증가해 “변호사가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변호사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영욕의 세월 변천사=국내 변호사 제도는 1905년 11월 ‘변호사법’이 공포·시행되면서 도입됐다. 한국 최초의 소송대리인은 일본에서 법률학을 배워 온 장훈으로, 그는 1900년 3월 당시 서 울의 법원 격이던 경성이사청에서 처음으로 소송대리 허가를 받 았다. 장훈은 서울 광교의 실업가 이재필에게서 일본 상인으로부터 6200여원을 돌려받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소송을 맡아 원고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고, 이자(186원)까지 받아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변호사법 시행 이듬해인 1906년에는 홍재기가 판 ·검사 퇴직 4개월 만인 7월2일 서울에서 처음으로 변호사 등록 을 했다. 순수한 의미에서 국내 ‘1호 변호사’가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1907년 9월23일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전신인 ‘한성변 호사회’가 창립 인가를 받았다. 경성변호사회(1909년), 조선변 호사회 서울분회(45년), 서울변호사회(48년), 서울통합변호사회(80년) 등을 거쳐 83년 서울지방변호사회로 변경됐다. 52년에는 지방변호사회의 연합체인 대한변호사협회가 창립됐다.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호사는 ‘권력’과 맞서 싸우거나, ‘권력’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두가지 유형으 로 나눠진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가담한 변호사들이 다수 있었다. 허헌 변호사는 3·1운동 지도자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고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다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4년간 옥고 를치렀다. 안병찬 변호사는 안중근 의사 변론을 한 것으로 유명하 다.


이승만 정권 시절엔 다른 분야만큼이나 변호사들의 부패도 심했 다. 사례금, 공탁금을 가로채는가 하면 법조 브로커가 횡행해 이들을 통해 사건을 수임했다가 징계를 받은 경우가 잦았다. 당시 벌금은 5000~1만원 정도. 광복 이후 권력의 편에 섰던 판·검사 들은 변호사로 개업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변호사 수가 10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해다툼이 늘어 소송 건수도 증가했다. 이들 중 상 당수는 다시 정·관계로 진출해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웠던 변호사 들도 적지 않았다. 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비상계엄이 선포 되자 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건의했다가 구속된 이병린 변호사는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꼽힌다. 인권변호사의 수요는 신군 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늘어났다. 시국·공안사건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활동 영역도 넓어진 셈이다. 지금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모태가 된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이돈명,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후 이들 변호사는 87년 6월항쟁에 일조하면서 88년 5월 민변을 창립했다. 김진욱 서울변호사회 홍보이사는 “변호사들이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주의 확립에 나름대로 기여해왔고,앞으로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위기의 변호사들=지난 100년간 변호사 업계는 양적 성장을 거 듭해왔다. 1906년 1명으로 시작해 현재 전국적으로 변호사수가 8000여명에 달한다. 변호사들은 “사법개혁에 치이고, 로스쿨 설 립에 얻어맞고, 변리사나 법무사 등 유사 직역에 또 당하면서 영 살맛이 안 난다”고 자조한다. 그러나 질적 성장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변호사들이 지나치게 직역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그동안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매년 1000명씩 사시합격자가 배출되는데다 법률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되면 변호사업계는 그야말 로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란 예상이 많다.


또 윤상림사건에서 드러나듯 변호사들이 법조계 주변의 브로커들과 공생관계를 형성하면서 돈벌이에 급급할 경우 변호사에 대한 거부정서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변호사들이 서민들을 상대로 무료 법률서비스를 확대하고 공익적 역할을 확대할 때 사회 지도층으로서 진정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이현미기자 always@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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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03-2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사를 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권력과 함께 호흡하는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적어도 요즘 같은 때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다. 마치 세상에 빨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과 같이...변호사에 대한 단편적 시각이 조금 아쉽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시각을 불식시키는 일은 변호사들의 몫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