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의 대가 Mr. Know 세계문학 1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는 꽤 재미난 작가이다. 그의 책 홍보 문구에 적혀 있는 가장 많은 문구는 '움베르토 에코' 와 비교하는 글이다. 사실 움베르토 에코와 아르투로 레베르테의 공통점은 작품을 위한 '방대한 지식'이고, 기막히게 재미난 이야기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투로 레베르테 에게는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는 이야기 속 여운과 깊이가 없었다.


요컨데 <향수>에서 -이 책은 쥐스킨스의 작품과 이름이 같은 불운한 작품이다- 에코는 향수의 어원을 따라가 이렇게 정의한다. 향수는 무지에서 오는 고통이라고.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그곳에 있는데 너의 상태를 모른다는 무지에서 오는 고통애 향수라고. 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 문장인가. 요컨데 움베르트 에코와 아르투로 레베르테의 차이를 난 이 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자 봐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주제에 대한 지식을 꽉꽉 채워넣어서 재미있는 글을 똑같이 많이 쓰지만 이 가슴에 남는 단 한줄을 쓸 수 있느냐 쓰지 못햐느냐의 차이가 바로 두 작가의 차이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검의 대가>를 읽기 전까지는.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검의 대가>는 검술 교사인 돈 하이메의 이야기이다. 일단 배경은 스페인이고, 시대는 18세기이며 한마디로 영웅과 반역자가 난무하는 그런 어지러운 시대이다. 모든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오늘은 어디까지 반군이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는 시대에 그런 이야기에 초연한 검술 교사 돈 하이메가 있다. 그는 검술이 이전 시대의 소중한 기사나 신사의 덕목이 아닌 - 검술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결투를 하는 도구였던 시절이랄까 - 스포츠로 인식되어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는 그런 현실이 잘 이해도 되지 않지만, 담배 한대 태우고 무심히 중얼거릴 듯 하다. '흠 그래도 할 수 없지'. 돈 하이메에게 중요한 것은 귀족의 자제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일과 그가 지금 집필중인 검술에 대한 책이다. 물론 요즘은 검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지 않아 이래저래 힘들고, 그가 집필중인 책은 그가 꼭 넣고자 하는 '완벽한 검술'을 찾지 못해 지지부진이다.


돈 하이메에게 어느 날 아델라 데 오테로라는 여인이 찾아와 그의 검술 중 가장 뛰어난 공격술을 배우기를 청한다. 18세기 여자가 검술을 배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돈 하이메지만, 그녀의 검술을 보고 자신의 검법을 사사한다. 그 검법을 배우던 그녀는 돈 하이메에게 그가 검술을 가르치는 한 후작과 연결해줄 것을 부탁하고,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둘을 돈 하이메는 연결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후작은 살해되고, 아델라 데 오테로도 살해당한채로 발견된다. 돈 하이메는 당연한 말이지만 후작에 대한 복수와 아델라 데 오테로의 복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한다.


<검의 대가>가 이전에 아르투로 레베르테의 작품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 때문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소설이 향할 수록 한 페이지가 아쉬워서 아껴가며 읽었었다. 돈 하이메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적과 마주해 그와 검술 대결을 펼치고, 그 검술 대결의 끝을 보는 순간, 돈 하이메의 모습을 그의 일생을 요약한 단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돈 하이메라는 캐릭터는 이 소설의 전부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신경쓰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귀를 쫑끗 새우고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는 시대, 그 시대에 돈 하이메는 시대에 무심한듯 하지만 그 시대 속에서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정치가의 이름도 세간에 떠도는 사건도 제대로 모르지만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 그 가치를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고결함이라 해야할까 명예라 해야할까. 돈 하이메의 삶을 방식을 무어라 칭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인간형을 소설에서 직면할 때는 덩달아 그저 지켜보게 된다. 그 뿐이다. <검의 대가>를 기막힌 소설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의 90%쯤은 돈 하이메라는 도저히 말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을 들이밀고 읽어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이다.


사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을 읽으면서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그가 이런 상황을 겪고 나서 더특한 것이 그가 그토록 일생동안 찾던 완벽한 공격술이라는 사실이, 이런 결말을 배치한 작가의 글쓰기에 깜짝 놀랄만 하다. 오랜 여운이 남는 책장을 덮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 이런 마지막 문단이라니. 돈 하이메는 이 완벽한 공격술을 그의 책에 적으면서 - 적을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 무엇을 생각할가. 아델라 데 오테로를 생각할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이 남는 결말이다.


   
  이 모든 것과 격리된 채, 시간의 흐름도 정지해 버리고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침잠해 버린 것처럼 고요와 정적마니 감도는 검술 연습실 한가운데에는, 노인 하나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날씬하고 차분한 외모를 지녔고, 약간 매부리코에 이마가 넓었으며, 머리는 백발이었고 코수염은 회색빛은 띠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고, 옆구리가 온통 피로 젖었으며 피딱지가 말라붙어 가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 치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자세에는 긍지와 자부심이 묻어났고, 오른쪽에는 이탈리아식 손잡이가 달린 플뢰레를 들고 있었다. 두 다리는 약간 구부리고 있었고, 왼팔은 어깨 위쪽으로 직각으로 쳐들고 있었으며 손목만 꺽어 손이 앞으로 향하도록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전통 검술 자세였다. 손바닥이 깊이 베인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말없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온 신경을 집중시켜 검술 동작 하나하나를 취해 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창백한 입술로 그 동작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가고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이 모든 동작들을 차례대로 정확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했따. 그리고 완전히 자기 자신에 몰두한채, 주변의 모든 것은 잊어버린 채 오로지 그 동작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해 애썼다. 절대적 정교함과 수학적 정확함으로 서로 연결될 수 바께 없는 이 모든 동작들의 단계단계를 직접 실행에 옮겨 보았다. 그는 마침내 인강늬 머리로 생각해 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격법을 터득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오는 아프리카>를 리뷰해주세요.
눈 오는 아프리카
권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난 평범하지도 그렇다고 소설에 나올 법한 특별한 성장기를 거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황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냥 자랐다. 어떻게 살아야하나라는 어지러운 고민보다는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가고 그렇게 자랐다. 성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 않은가..라고 솔직히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보면 딱히 성장이라는 단어나 어감 보다는 그냥 자라고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라는 어감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지 싶다.


조금은 평범하고 조금은 특별한 성장기
아버지가 아주아주 유명한 괴짜화가였던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캔버스를 보고 자랐으나, 아버지의 그림에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본래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관계 아닌가.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그림에 일단은 적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은 이 아들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눈 오는 아프리카'를 하나만 들고 아버지의 자화상이라는 '야마 자화상'을 찾아 나서는 걸로 시작한다. 자신의 형을 찾기 위해 유럽으로 가야 하는 또 다른 한 청년과 함께. 그들은 그렇게 유럽으로 떠난다. 이 와중에 재미있는건, 형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청년에게는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거고, 야마의 아들에게서는 아버지의 자화상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거다. 그거다, 그래서 이들의 여행은 여행같지 않은거다. 전혀 시작과는 다르게 절박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유유자적 세상을 돌아다니는 기분으로 따라갈 수 있는거다. 

한국에서 미대 입시에 실패한 뒤로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그는 잠시 그림을 접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건을 겪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유작인 '눈 오는 아프리카'는 젯소로 끊임없이 덮이고, 그 위에는 그의 여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유럽에서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여행을 그림으로 남겨가면서, 그의 고민은 무엇으로 캔버스를 채우냐에서 무엇으로 삶을 채워야 하느냐로 넘어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 무엇으로 삶을 채워야 하느냐라는 살면서 한번쯤은 문득문득 하게 되는 그런 고민들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라는 표현에 맞는 어른이 되어 가는걸까? 

난 여행을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 1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솔직히 멀미가 난다. 일단 갑부가 아니기 때문에 여행 내내 절대 쾌적하게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아주 가끔은 돈이 딸랑 몇 달러 밖에 남지 않을 때도 분명 있을거고, 노숙은 기본이 될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왜 이 여행을 해야하나'싶은 마음으로 여행을 하는 날도 있을거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견딜만하게 하는건, 그게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사실 읽는 내내 피식거리면서 <눈 오는 아프리카>를 읽었다. 일단 작가의 글이 무심한듯 쓰여진듯 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코믹에 가깝게 쓰여진 어쿠투가 재미나게 느껴진다. 읽으면서 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고, 무엇보다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예술관'에 대한 토론과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및줄을 그어둘만한 부분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내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소설 <눈 오는 아프리카>였다. 사족이지만, 아프리카에 눈이 온다면 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를 들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교육 수준이 대중들 - 액네일-레러 쇼를 보거나 <뉴요커>지를 읽는 대중들-은 갤브레이스르 ㄹ중요한 경제 사상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갤브레이스는 하버드이 경제학 교수이기는 하지만, 학계 동료들은 그를 "메스컨 명사(media personality0" 정도로 여셔서 한 번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없다. 대중과 교수들의 인식차이가 특히 크게 벌어진 것은 1967년 갤브세이스가 <새로운 산업 국가>에서 경제학에 관한 그의 사상을 장대하게 전개하였을 때였다. 그는 이 책이 J.M.케인즈의 <일반 이론>이나, 나아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과 같은 반열에 올려지기를 바했다. 이 책에 대해 대중 언론에서는 경쟁적으로 서평을 실었으나,학계는 냉담하였다.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갤브레이스의 책은 진정한 경제 이론이 아니었던 것이다.(p.29)

경제 후퇴란 현상은 금세기 초의 많은 경제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했고, 그렇다보니 필경 그들 중 대다수가 최악의 저작을 내놓게 되고 말았다. 톨스타인 베블렌은 경제 불황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설명해보려고 탁월한 <유한계급론>에서 아주 끔찍한 책 - <기술자와 가격 체제>-까지 쓰게되었다. 자본주의 성장에 내제괸 "창조적 파괴"라는 장대한 전망을 제시하여 많은 경제학자들을 끊임없이 고무하였던 슘페터는 <경기 순환론>이란 과장되고 거의 무의미한 두권짜리 연구서를 썼다.(pp.44-45) 

경제학의 향연 / 폴 크루그먼 

 
   

 폴 크루그먼 이니까 이렇게 쓸 수 있는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헤세의 인생>과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 : 알라딘 서평단으로 들어온 책  
 - 사실 헤르만 헤세를 특별히 좋아하는건 아니다.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니, 꽤 재미날 듯 하기는 하다.
   그런데 시리즈가 헤세의 인생, 사랑 이런 식인데 흠.. 사랑이 가장 재미있으려나?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는 어린 나이에 가족의 의지로 결혼했던 아이가 열살에 이혼하게 된 기막힌 (이 말 밖에...)
   이야기이다. 진정 기막힌 이야기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정시퇴근, 그 시간 활용의 힘>과 <통하는 커뮤니케이션> : 모 카페 서평단으로 들어온 책
-  최근 회사생활의 여파로 들어온 책이다. 정시퇴근의 로망과 일을 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에 신청했다.
   사실 답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어떠려나 모르겠다. (반신반의 인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요시다 슈이치는 이번이 딱 2번째로 만나는 작가이다. 이 직전에 읽었던 책은 <파크 라이프>인데 아직 그 책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못했다. <파크 라이프>는 도시 속에 있는 한 공원을 중심에 놓고 그 공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특별하게 느껴지는건 주인공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전혀, 일체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고 있고, 주인공과 다른 사람들의 심리상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 그토록 얇은 이야기였는데- 인물 파악이 안되는거다. 그 기막힌 기분이라니. 그때서야 알았다. 요시다 슈이치는 인물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대화만을 들려줄 뿐, 그들의 속내는 들려주지 않았다는걸 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한참이 지나서 알았다. 사실 그래서 요시다 슈이치의 책을 찾았다. '도대체 어떤 글을 쓰는지 파해져주겠어'라는 생각으로.


상상속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
<7월 24일 거리>는 작은 어촌 마을에 사는 혼다라는 여주인공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혼다는 마을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떠나지 못하고 직장생활까지 이어가고 있다. 엄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신다. 출주한 외모로 근처 여심을 사로잡은 남동생 덕택에 가끔은 저런 동생에 이런 누나라니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동생은 그의 자랑거리이다. 굿이 꼽자면 브라더 컴플렉스라고 해야하나. 이런 지루한 일상이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이 마을을 그녀는 리스본의 도시로 상상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리스본에 있는 거리 이름과 공원, 광장까지 이렇게 비슷할 수는 없다며 그녀는 일상을 자위한다.  물론, 그녀는 이 마을을 벗어나본 적도 없다. 

너무나 평범해서 지루할듯한 그녀의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쩍하고 금이 가는건 아니지만 저 끝에서부터 하나씩 미세한 금이 가는거다. 완벽했던, 그래서 내 삶을 대신해주는 듯 했던 동생에게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 혼다는 평범이하라고 생각하지만- 여자 친구가 생긴다. 이로인해 동생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와 누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동생의 모습은 혼다의 일상에 엄청난 폭풍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가 학창시절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남자 선배의 등장과 그 선배와 연인이었던 선배, 그리고 그 선배의 남편 사이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남자 선배와 지금은 한 나편의 아내인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미가 느껴지고, 자신은 그들은 선배의 남편에게 말못한 공범이 되어 버린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선배에게 설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면서 혼다의 일상은 긴장감이 넘친다.


사람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 그 이중주
<7월 24일 거리>는 연예소설이라고 하기에 어렵지만 굳이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소설이다. 맨 뒷 부분을 읽으면서야 알게 되는거지만, 각 장의 제목들은 나름 의미가 있다. 미리 맑히면 소설을 읽는 재미가 50%쯤 반감될테니 여기에서는 얘기할 수 없고. 소설 속 주인공 혼다는 재미있는 모습을 보인다. 브라더 컴플렉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심리가 재미있는데, 나와는 전혀 다른 멋진 동생이 저렇게 평범한 - 어쩌면 평범 이하인- 여자를 만나는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그녀의 사고는 누나라면 가져좀직한 생각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건, 동생이 사귀고 있는 평범 자체인 여자가 사실은 자신의 처지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도 모든 사람들이 학창시절 좋아하고 호감을 가지던 남자와 관계의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한없이 위축되고, 실패할까 두렵고 자신에게 자꾸만 회의가 든다. 결국 혼다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연애에 대처하는 누군가의 자세
누군가  <7월 24일 거리>를 연애 소설이라고 하지만 연애 소설이라기 보다는 '연애에 대처하는 누군가의 자세'라고 하는 편이 가장 쉬운 정의가 아닐까 싶다. 실수할까봐, 실패할까봐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시도해보고 부딪혀보라고, 그렇게 부딪혀봤을 때 후회도 없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거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마지막이 꽤 인상적이다. 그렇게 부딪혀봐야 비로소 내가 직면한 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는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