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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이 무색하다. 통렬하고, 신랄하다. 덧붙여 낄낄거리며 웃게 만든다. 우아하게 웃길 줄도 안다. 버트런드 러셀에 대한 새삼스런 감탄이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십여 년 전 유일하게 읽었던 책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인데, 다소 까다로웠다. 얇은 책임에도, 그의 글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런 얄팍한 나의 편견을 깬 것이 《인기 없는 에세이》다. 물론 지금 다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보면, 예전만큼의 까다로움을 겪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입문서로도 이 책은 좋아 보인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가, 능란하고 섬세한 논객’이라는 책 뒷면 카피에 백배 공감한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국의 많은 사회지도층, 특히 일부 국회의원 나리들의 언어가 떠올랐다. 막말의 향연(?)을 기본 장착해놓고,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는 언어적 작태와 행동을 일삼는 그들 말이다. ‘지적 쓰레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쓰레기 말종나리들. 이런 말 지껄였다고 ‘인신공격’이랍시고 잡아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에이~ 설마???)
버트런드 러셀은 아마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 스스로 지껄인 깔때기에 콧방귀를 낄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그는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 재밌는 문장을 보자. “지구가 기나긴 세월에 걸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삼엽충과 나비를 낳아 기른 후에 인류는 네로와 칭기즈칸과 히틀러 같은 인간들을 낳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하지만 이는 짧은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p.41)
인류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한다. 진화와 진보를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인류가 지구에 미친 패악과 해악은 또 어쩔 것인가. 러셀은 그런 자만심에 “깨몽”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읽은 바는 ‘성찰’이다. 러셀은 인간에게 말종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다음 그의 말에서 그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언급한 문명인의 조건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고 너그러울 때도 있고, 욕심 때문에 소심해질 때도 있으며, 용감해질 때도 있고 겁에 질려 비굴해질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얻었고, 어떤 이들은 최고의 지성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비상한 감수성에 이끌려 미를 창조했다.… 문명인이란 자신이 칭찬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할 때 비난하기보다 이해하기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p.245)
재밌다고 해야 할 런지는 모르겠는데, 1950년 첫 출간된 이 책이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오래 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꼭 들어맞는 생생한 지적들이 흘러넘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21세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라고 특별히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정신적 성숙을 갈망하는 건,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다. 러셀은 그런 사람의 한 명일 것이다. 더불어 유머와 위트까지 겸비한 극소수의 사람.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이만한 논객, 여태껏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만 놓고 봐도 러셀의 지적질은 온전하게 타당하다. 자만심 혹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신념의 과잉은 허술한 일반화만 양산하고 있다. 사실 신념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이해타산, 즉 이권에 의한 이합집산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폭력과 이권이다. 러셀의 말마따나 정부의 헛소리에는 한계가 없다. 가령 국정원. 요원들의 폼 나는 정보 전쟁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세상에 댓글로 정권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똥꼬나 핥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신경쇠약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사실 여부는 그래서 상관이 없다.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뿐이다. ‘무언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동물’이다보니, 불충분한 근거만으로도 믿음을 행하고 타인에 대해 낙인을 찍는다.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것이 다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다른 견해를 인정하라는 지당한 말씀이 나부껴도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틀리다’고 (무의식적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세계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러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임에도,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동물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동물의 숙명이고.
“특정한 독단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는 당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을 벗어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라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도록 하라. 또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소속된 신문을 찾아 읽도록 하라.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p.219)
그래서 결심했다. 박씨 정권 혹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다른 집단’이 가진 견해를 알아보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결심도 해보건만, 글쎄, 나는 수양이 아직 부족한지, 숨구멍과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사고 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들의 기준과 잣대로만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재단하는 저들의 행태가 아마도 그동안 그나마 어렵게 지켜온 훌륭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 것 같다. 가령 피로 물들이며 매우 힘들게 쟁취했던 민주주의가 그렇고, 일부 삑살이도 있었지만 참교육을 위해 노력했던 전교조 교사들의 노력이 그렇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늘 품고 있는 질문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더 깊고 넓은 탐구와 관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성찰이며 사유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고, 그 불완전한 믿음을 너무 애지중지한다. 러셀의 말마따나 실질적인 해악 때문이 아닌 우리에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모든 정신적 위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한 인간이 하는 걱정의 태반은(90% 이상이었던가?)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한다고 하지 않던가! 불안을 사서하며 미리 걱정하는 탓에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우스운 존재가 인간이다. 그것도 따지고 들면, 그렇게 주입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배후세력(자본 등)의 교묘한 조정이 따른다. 불확실한 미래의 선을 위해 비교적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무가치한 뻘짓을 우리는 버젓이 하면서 괴롭고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빌어먹을!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기묘한 혼합물이다. 인간은 밤이 지닌 화려함을, 봄꽃의 부스러질 듯한 아름다움을, 부모가 주는 사람의 부드러움을, 그리고 지적 이해의 황홀함을 느낄 줄 안다. 어쩌다 통찰력이 깃드는 순간이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서로가 지닌 것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을 때 어떤 질서를 따라야 하는지 꿰뚫어 보기도 한다.”(p.276)
비록 미국의 일국 체제를 주장한 오류(!)가 있다 한들,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선 옮긴이가 충분히 설명했다) 이 책의 미덕은 감추기 어렵다. 특히 러셀의 철학 예찬은 지금 자본과 기득권이 주입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상비약이 될 것이다. 성찰하고 사유할 것. 지금 우리가 잃은 삼평, 즉 평정과 평화, 그리고 평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뭣보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으로 재미를 보장한다. 물론 일상에서의 실천은 독자 당사자의 몫이겠지만.
“철학은 비단 수학 및 과학뿐만 아니라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철학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지평을 제공한다.… 사고의 대상을 넓힘으로써 철학은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해독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예민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을 보여 주는 것, 그것 또한 철학의 임무이다.”(pp.85~86)
물론 철학이 지적 발달의 한 단계이지 정신적 성숙과 상통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러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겐 가장 재밌는 챕터였던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에서 보듯, 세상에 지식인이라는 탈을 쓰고 뻘짓 하는 인간들, 쌔고 쌨다. 내가 속한 환경, 조직, 나라 등에 집착하기에 그들은 넓고 멀리 깊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만하지 않고 불충분한 근거의 믿음을 전부로 여기지 말 것.
러셀을 통해 나는 다시 나의 세계를 돌아다본다. 세상이 한 뼘 넓어진 기분이다. 작고 사소하지만, 이 기분을 일상에서 실천적 자세로 전환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다. 뜬금없지만, 전쟁이 없으면 좋겠다. 러셀의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간의 사상과 에너지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세대 안에 세계 곳곳의 심각한 빈곤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p.105)
단언컨대, 세상 모든 전쟁은 정부 권력 혹은 자본과의 협잡이 빚어낸 참극이자 정신적·육체적 학살이다. 세상에 성전 따위는 없다! 이건 불충분한 근거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