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구판절판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 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51쪽

일상 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음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노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빛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133쪽

추사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을 걸었다.'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추사의 '구가' 속에는 그가 누렸던 삶의 두께와 깊이가 놀아들어 있다.오래 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물과 불은 삶의 영속성을 지탱해주는 두 원소이다. 이 두 원소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다.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가 깊은 곳에 줄을 내려서 거기에 고여 있는, 갓 태어난 원소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134쪽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138쪽

스패너 뭉치와 드라이버 세트와 공기 펌프와 고무풀은 얼마나 사랑스런 원수덩어리인가. 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진대. 장비가 있어야만 몸을 살릴 수 있고, 장비가 없어야만 몸이 나아갈 수 있다.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 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237쪽

마암분교 이야기는 한도 없고 끝도 없다. 전교생 17명인 이 작은 학교에서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샘솟아 오른다. 날마다 새로운 날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있다. 삶속에서 끝없이 이야기가 생겨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일인가. 봄에는 봄의 이야기가 있고 아침에는 아침의 이야기가 있다. 없는 것이 없이 모조리 다 있다. 사랑있고 죽음이 있고 가난과 슬픔이 있고 희망과 그리움이 있다. 세상의 악을 이해해가는 어린 영혼의 고뇌가 있고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성장의 설렘이 있다. 여기가 바로 세상이고, 삶의 현장이며, 삶과 배움이 어우러지는 터전이다. 자라나는 일이 배우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가는 일인 것이다. 귀봉이와 초이는 올 봄이면 졸업해서 이 학교를 떠나야 한다. 졸업식날 많이들 울 것이 분명하다. 이 졸업생들은 10년 후 운암대교 위에서 만나기로 김용택 선생님과 약속했다. 그때, 나는 또 마암분교에 대해서 새로운 글을 쓰고 싶다. 창우와 다희의 앞날에 깊은 사랑과 커다란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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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3-2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정말 밑줄을 안 그을 수가 없어요 그쵸?

치유 2007-03-2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네..바람님..*^^*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7-03-23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히, 도시적인 세련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
저는 언제나 한적하고 숲과 시내가 있는 시골에 전통가옥을 지어서 자연 가까이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복잡한 도시의 시멘트 냄새를 맡으며 자란
나에겐 끝도 없이 이어진 들판과 나무들과 자연의 소리가 항상 고픕니다.

치유 2007-03-2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안 그런 사람도 있더군요..
이 책여러부분에서 맘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았지만 전 끝부분에 있는 꽃피는 아이들편이 젤 맘에 와 닿았어요..어린 아이들의 맘표현에서 같은 무렵 할머니들을 떠나보낸 아이들의 그 그리움이 짠하기도 했구요..
발바닥끝에 매끌매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갯벌 사진도 좋았구요..

비로그인 2007-03-2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갯벌. 2004년 여름에 본의 아니게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만,
계속 발이 빠지는 바람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뜨거운 태양에 쪄 죽을 것 같고...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웃음)

홍수맘 2007-03-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전 '어려워, 어려워' 하는 부분도 있었고, 사회 비판적인 부분에서는 정말 날카롭다 라고 느꼈던 기억이 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 ^.

치유 2007-03-23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SHIN님/아..전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때 가서 그 기억이 더 오래가나봐요..여름이었으면 땡볕이었으니 힘든 기억이셨을듯 싶네요..

홍수맘님/네..그렇더라구요..전 제가 좋은 부분만 푹 빠져서 봅니다..ㅋㅋ

2007-03-24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7-03-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18속삭이신님/히힛.. 님이 제 책방에 들리시는 날이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요..
아..그랫었군요..넘 이쁜 모습들에 너무 흐뭇하고 짠해지고 그랬더랍니다..님 주말 잘 보내셨지요?/전 정신 없이 바쁜 주말을 보내고 이제야 의자에 앉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