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 1884부터 1945까지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
김흥식 기획, 김성희 해설 / 서해문집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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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백년을 지탱해오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물론 지난 5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일본과의 7년전쟁, 그리고 청국과의 두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기본적인 사회구조에 일대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사실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정조사후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시대적, 역사적 변혁의 물결을 타고 조선은 近代라는 높은 파고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특히 일반민중에게 근대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했을까? 타의로 근대화를 물결을 타게 된 조선에 서구열강세력의 손길은 지배계층에게는 마수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일반민중들에게는 신천지를 보는듯한 환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자리매김 하였을 것이다.

그런 신진문물중에서 가장 대중에게 근대라는 개념을 각인시킨것은 다름아닌 新聞이었다. 현대나 고대나 권력유지의 가장 큰 틀은 정보 장악력이라고 볼 수 있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가 권력을 잡고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중세 조선도 예외는 아니였다. 이러한 정보를 지배계층만이 향유함으로써 정보 유출의 방지와 정보의 왜곡을 통해서 기난긴 세월 동안 민중을 통치해왔던 것이다. 그런 개념이 근대라는 물결을 타고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었던 것이 바로 신문의 탄생이다. 수백년동안 일반 민중들이 갈망했던 정보의 공유화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문의 역활은 지대한 것이다. 비록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속에 살고 있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신문에 대한 역활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요즘 몇몇신문들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정간당했던 <황성신문>, 그리고 한때나마 민족지라 자부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의 신문을 통해서 구한말시대에서 해방시기까지의 신문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을 추측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의 역사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기획은 기존의 판에 박힌 역사적 인식을 고찰하는 개념을 초월하여 일반 민중에게 시사되는 많은 부분을 신문지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시대상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정보 취득의 다양성이 떨어졌던 시대에 이런 신문의 역활은 바로 개인과 역사의 매게역활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번 책을 통해서 안창호와 재미교포들이 제작한 <공립신보>, 미국 호놀룰루에서 발행된 <국민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권업신문>과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등의 희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서 한층 기획의 의도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동안 역사공부 특히 구한말의 역사에서 단순암기식으로 실체를 볼 수 없었으나 이번 책을 통해서 이러한 신문들을 접하게 된 점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문은 여론을 대변한다고 한다. 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말이다. 지금도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을 대변하는 신문이 있듯이 당시에도 그런 색깔을 지니고 있는 신문들이 있었다. 특히 한일합방을 계기로 주권상실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러한 경향을 더욱더 커지게 된다. 비록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고 언론통제가 심한 시대였지만 그와중에서도 시대를 말하는 신문들이 있어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비록 정간이나 폐간의 어려움은 있었어도 이를 극복하고 민중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독립에 관한 무언의 메세지를 전달했던 신문들이 있었기에 민중들이 그 암흑기를 버텨낼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신문과 비교하면 많은 점에서 부끄러운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신문들을 통해서 굳이 거대한 역사적 상황이나 시대적 소명 내지는 독립의 갈망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역사서의 행간을 통해서 역사를 투영 하듯이 신문기사의 행간을 통해 그 당시 시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문이라는 것이 그 시대상을 대표하는 기록물임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역사적 인식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많이 접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매체의 다양성이 떨어졌던 시대에서 신문의 역활은 지금같은 그런 역활을 뛰어넘어 모든것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일반 민중에게는 더욱더 그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에 게재된 신문을 유심히 보면 그 재미가 한층 더 하다. 

1896년 4월 7일 <독닙신문>창간호에 나온 "광고"라는 기사에 신문 8장 가격에 10장을 준다는 마케팅 광고를 보면서 지금 신문사들의 마케팅전략과 비교해 볼 때 잔잔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또한 1905년 제국신문에는 민영환의 자살소식과 함께 광고란에 그의 부고를 실은점이 특이하다. 또한 소설이나 만평(우슴거리)같은 유머가 실여있는 점 역시 지금의 신문과는 다를바가 없다. 최초로 간행된 신문에서 출발하여 1918년까지의 신문은 대세가 정치적인 이슈등을 다루는 관보형식의 역활이 컷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19년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다양한 알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광고라는 형식을 빌려 본격적인 상업광고가 게재되고 있다. 이들 광고의 특징중의 하나는 유독 임질이나 매독 및 중풍에 관한 치료제 광고가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의학적 수준으로 보아서 치명적인 질병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신식문물의 확대로 인한 제화점 광고와 여성들 바느질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제봉틀에 관한 광고, 그리고 화장품 광고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사진과 함께 게재되는 봄나들이의 풍경들은 아마도 암울한 시기에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보라는 취지는 아니였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이 시대의 신문들은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의 삶을 투영해주고 있다. 나라잃은 슬픔도 중요하지만 일반민중에게 가장 큰 걱정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이었던 것 아닐까 싶다. 당시 신문을 통해서 역사적 인식이라는 거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반 민중들의 삶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도 봄나들이도 가고 싶은 것이고 외모에 대한 신경도 쓰고 싶은 것이고 신식의 의복과 구두도 신고 싶은것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신문이라는 기록물을 통해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면 너무나 큰 억척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보면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솔직하고 순박한 느낌이 들어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역사적 사초나 기록물을 통해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지향하고 있지만 반드시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일반 민중들의 삶에 대한 접근일것이다. 그러한 의도 없는 역사적인식이야 말로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 인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들 민중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고 시대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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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아사히신문 취재반 지음, 백영서.김항 옮김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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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대만, 일본 이 4대국은 지리적으로 아시아대륙의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현 세계경제판도 속에서 이들 4개국의 위치는 굳이 경제적인 수치로 말하지 않더라도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자리에 올라서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중국의 경우만 예를 들더라도 중국땅에 투자못해서 안달이 난 국가들이 시쳇말로 번호표를 뽑아들고 대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의 상황과도 흡사하다. 단지 투자에 대한 의도나 방식이 그 당시와 180도 바뀌었다는 점만 빼고선 말이다. 혹자는 이들 4개국이 일체된 경제적 통일성을 갖는다면 EU에 버금가는 엄청난 여파가 세계경제에 미칠것이라고도 한다. 그 만큼 이들 4개국의 역량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가능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들 4개국의 입장은 판이하게 다르다. 특히 지난 150년간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럼 이러한 구도가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조차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역사적 편견을 이들 4개국이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공통된 현실이다. 그런점에서 이번 책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올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은 대략150년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최근의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이들 4개국에 영향을 미친 10가지 역사적 사건을 최대한 공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려고 하는 취지에서 편찬 되었다. 물론 일본 아사히신문에 특별연재된 칼럼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4개국의 상이한 역사인식을 통해서 공통된 합의점을 도출할려고 하는 의도가 강하다. 특히 4개국의 교과서를 비교함에 따라 10대사건이 자국사에 미치는 영향과 인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들 사건들이 일개국을 넘어 이들 4개국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다시금 상고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에서 이번 기획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그동안 이들 4개국의 역사인식 특히 150년동안의 근대사에 관점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모를 정도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물론 그 진원지에 일본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흔히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들은 잊고 미래를 향해서 서로 相生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매번 정권이 바뀔때 마다 들어 온 이야기이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가해자의 철저한 반성과 그에 합당한 조치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것 아닐까 싶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기획은 상당히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 갈길이 멀긴하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시도가 4개국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역사인식에 다소 유연된 틀을 제공할 수 있다는 단초를 던져준 것이 바로 그 희망이 아닐까 한다. 세계의 어느 국가도 자국사의 인식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 4개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화라는 개념이 이들 4개국에는 서구열강의 강요로 시작된 근대화이기 때문에 지난 150년동안의 역사에 대해서 남다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로 부터 시작된 근대화가 결국 약자의 희생을 강요한 근대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본을 제외한 3개국의 역사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4개국의 교과서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자국의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인식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의 경우 간략한 사실의 기술형태이고 피해자인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 당위성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국과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선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간략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이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150년간의 사건들이 이들 4개국 상호간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런면에서 세계사에 별도 분리한 동아시아사라는 항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4개국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상호 연결된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진 사건>이라는 책을 통해 새삼 근대화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의 중요함과 그 여파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열가지 사건을 통해서 4개국에 영향을 주었던 현실들은 좀더 他者的인 입장에서 견지해 볼 기회가 주어진것 같다. 그동안 우리도 일본에 대한 적대심이 역사 인식 저변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보니 당연히 역사인식에서도 상당한 왜곡을 가져온게 사실이다. 또한 한국사 이외의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도 적었던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다소 편협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 이들 4개국은 지리적 근접성이나 한자 유교 문화권이라는 공통된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보기 힘든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50년전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서구열강의 침탈은 겪었다는 아픈 기억 또한 가지고 있다. 이제 그러한 서구중심에서 무게 중심이 동양으로 기울고 있다. 특히 이들 4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쪽의 무게감은 날로 커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들 국가의 역사적 기원은 오래되었다. 수천년의 역사중 극히 작은 부분이 150년간의 역사가 이들 4개국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한 시간적인 잣대를 적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제기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수용하자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4개국이 편협된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다가 온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언제까지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고 단순한 민족감정에만 의지하여 동아시아 역사를 인식할 것인가? 좀더 열리 가슴으로 역사인식을 할때라고 생각된다.

당연히 이러한 시발점에는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일본의 정확하고 성숙된 역사인식이 최우선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한 선행과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공통으로 합의도출 되었다고 하는 인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3개국 역시 열린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진정한 가슴으로 악수하지 않는한 이러한 의도는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하다. 지금도 간간히 들려오는 일본 극우파의 망발과 자국내의 비뚤어진 역사관, 갈수록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는 세대들... 하지만 이번 책은 그래서 더욱더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출발이라도 없다면 정말 이들 4개국의 역사인식은 세계사에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난 150년 보다는 향후 150년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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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 악녀 이야기
시부사와 타츠히코 지음, 이성현 옮김 / 삼양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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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각종 악행과 비행으로 세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들은 클레오파트라, 엘리자베스, 메리 스튜어트, 마리 앙트와네트, 측천무후, 서태후등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도 있고 프레데군트, 브룬힐트, 루크레치아 보르자,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처럼 다소 생소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후대의 평가는 이들에 대해서 후하지 않은 편이다.  심하게는 이 책의 제목처럼 악녀라는 불명예까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들이 권력의 최고정점에 가까이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녀들의 권력행사로 인해 한국가 좌초의 위기에 봉착하거나 전쟁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 것 같다. 특히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에서 그런 악행이나 비행이 더 부각된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책의 주인공중 에레체베트 바토리,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에게 악녀라는 평가는 한번 제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에레체베트나 브랑빌리에부인의 경우 극히 개인적인 사이코패스라는 희대의 살인마로써 악녀라는 기준에 적합할 지 몰라도 그외 나머지 인물의 경우는 다른 평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절대권력의 쟁취를 향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캐들을 개인적인 치부로만 몰아가기엔 왠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권력이란 피를 나눈 부모, 형제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단지 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개인적인 치부의 과정으로 매도할 수 는 없을것이라 본다. 오히려 뒤에서 온갖 부조리와 악행을 자행하면서 보이는 면에선 성군인양 행세하는 남성들보다야 더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권력이라는 마약에 중독이 되면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동전의 양면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필자의 의도 처럼 선과 악의 구분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종교적, 문화적 잣대로 과연 규정할 수 있을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찌보면 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지 모른다. 성 바르톨로메 대학살의 주범으로 평가하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경우 카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신념으로 후세에 악행으로 평가받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과연 누가 누굴 악녀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녀들을 악녀라고 매도하는 우리에게 대리만족이란 미묘한 감정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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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자연사 -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섹스와 구애에 관한 에세이
애드리언 포사이스 지음, 진선미 옮김 / 양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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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섹스와 구애에 관한 에세이 

구라는 행성에서 존재하는 생명체는 섹스를 한다. 박테리아에서 부터 이 행성의 주인라고 자부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섹스를 한다. 물론 약 1000여종의 생명체가 무성생식을 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종들은 유성생식 즉 섹스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이라는 숭고한 개념이 바로 이러한 생식의 과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성의 자연사>>에서 필자는 다양한 종들의 생식형태를 통해서 자기종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탄생단계에서 부터 생명의 유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간략하면서도 과학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인간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인 성도착자, 간강범, 카니발리즘, 낙태와 영아살해등의 표현을 빌려서 좀더 실감나게 현상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생식에 대한 현상을 경제학적인 비용과 이익관점에서 설명한 부분은 독자들로 하여금 내용을 단숨에 각인 시켜준다. 

물론 필자는 생물학적인 견해와 사회학저인 견해를 적절히 대비하면서 이러한 생식이 가져다 주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인간을 비롯한 유성생식을 하는 종에 대한 비용발생과 이익취득의 면에서 그들 종 나름의 진화방식을 설명해주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 유성생식을 하는 종의 경우 암컷이 수컷보다 비용면에서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수컷들 역시 비용을 부담하고는 있지만 암컷에 비해서 그 책임은 작게 마련이다. 또한 자식을 성장하는데 대한 비용과 위험의 감수 또한 암컷의 경우가 크고 많다. 그럼 이들 종은 왜 이런 비용과 위험부담을 가지면서 유성생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과 상반된다고 볼 수 도 있지만, 무성생식을 통한 번식보다 유성생식을 통한 번식을 선택했던 것은 다름 아닌 개체의 다양성 확보라는 것이다. 암컷이 이러한 비용을 무릅쓰고도 유성생식을 고집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유전적으로 다양한 자손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확보함으로써 다양한 자연의 선택에 적응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 진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돌연변이가 없어도 환경 및 생물학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유전형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점이 바로 유성생식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무성생식이 유성생식에 비해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번식력이 떨어지는 종일수록 숫자보다는 확률적으로 유성생식을 통해서 번식을 한다는 것이다.

이점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생태계는 끊임없는 경쟁의 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이 일방의 멸종을 이끄는 경쟁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했다. 상호 경쟁적 진화를 통해서 종들은 다른종의 희생을 바탕으로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경쟁적 진화는 지구가 멈추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섹스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으로 유성생식을 하는 모든 종은 지금도 끊임없이 섹스를 하고 있다. 단지 그들과 인간의 차이점은 섹스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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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참하라 - 상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우리역사 진실 찾기 1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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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사학자인 필자의 <<왕을 참하라>>는 조선통사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통사와는 사뭇다른 시각에 저술된 역사서이다. 그동안 조선사를 군주내지는 권력층의 시각에 바라봤다면 이번 시각은 조선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조선통사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왕을 참하라>>를 읽고 느끼는 감정은 통쾌함과 서글픔이라고 해야겠다. 
우선 통쾌함이란 학창시절 역사시간을 통해서 배웠고 각종 역사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조선사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사유를 송두리채 흔들었다는 점(그렇다고 필자가 말하듯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신화나 소설은 결코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과 그 어느 역사서에서 볼수 없는 필자만의 거침없는 언어선택(죽일놈의 왕, 견공지자제분등)나 역사서에는 일종의 금기로 여겨지는 필자의 감정이입등이 마치 읽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의 기쁨을 주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이래로 당당한 양반가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보기엔 무척 당혹스럽고 소위 말해서 열이 받게지만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정말 통쾌함을 감출수 없다.

두번째는 서글픔이다. 이점은 필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조선사 500여년을 통틀어 27명의 군주중에 세종과 정조를 제외한 세월은 일반 민중에겐 암흑같은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역사를 인식하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고는 고정된 관념에서 역사를 보아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어두운면보다는 부각되는 부분을 더 조명하게 되고, 군주와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보는 역사적 관념이 거의 도식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일반민중에 대한 역사적 배려나 인식은 소홀히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이번 책을 읽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이 서글프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에서 <<왕을 참하라>>는 책 제목처럼 상당한 반향을 불러오리라 여겨진다. 조선의 역대 군주 27명에 대한 평가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들의 무능과 부패등 그들의 치부를 고스란이 들어내고 있고, 민란등을 통한 일반 백성들의 삶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필자의 집필의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지 몇가지 점에서 필자의 의도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은 절대군주의 나라인 왕조국가이다. 군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층 일부가 국가전체를 이끌어 가는 구조이다. 이는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역대 왕조국가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러한 구도를 부정하고 소위 우리가 말하는 만인이 평등한 국가라는 개념은 최근래에 들어선 국가개념일 뿐인 것이다. 사회구조가 이러하다 보니 역사적인 서술방식에서 일반 백성의 반영비율을 떨어질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일부 권력층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후대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행간을 읽을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필자의 집필의도는 아마도 이 책을 대략 몇페이지 만 읽어봐도 알수 있을 만큼 그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뉘양스(그러니까 군주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민중과의 관계설정에서 너무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설정했다는 점)와 필자 개인의 감정이입이 책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조선사를 읽고 있노라면 입에서 좋은 소리나올 경우는 드물다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 만큼 안타까운 장면도 수없이 많고 필자의 표현처럼 입에서 개거품물고 싶은 장면 또한 많은 것이 조선사이다. 오죽하면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만큼 가정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필자가 평가하는 세종이나 정조에게도 적지 않는 부분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담지 못했던 면을 총대를 메고 만천한에 고한점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자칫하면 오류의 함정에 빠질수도 있다는 점이 심히 걱정된다. 특히 역사에 대해 아직까지 제대로된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청소년이나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편협된 시각의 역사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좌,우 두눈의 균형감각으로 통해서 봐야함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우리가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은 과거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의 바탕이 되고함임을 잊이 말아야 할 것이다.

조선사는 필자의 말대로 수탈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것은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당연히 민중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구조인 것이다. 세계사 유래를 찾기 힘들정도로 오래 유지되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생하였겠는가 이는 말안해도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선사 또한 엄연한 우리의 역사라는 점에서 이제는 더이상 감출필요 없는 성숙된 역사인식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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