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대기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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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레이 브래드버리를 접하기까지 SF는 환성,공상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풍부한 볼거리로 가득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권수를 늘려가는 재미정도로만 여겨졌다. 물론 그렇다고 SF계통의 작품들을 싸잡어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유희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 아니 더 나아가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모와 감정 그리고 판단논리까지 두루두루 갖춘 사이보그, 그리고 시간여행이 가능한 타임머신을 통해서 차원을 넘나드는 시간여행 등 이렇게 상상한 하더라도 SF의 플롯, 내러티브는 매혹적으로 다가오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선입관을 한번에 날려버린 작가가 바로 레이 브래드버리이다. <화성연대기>를 통해서 물론 그의 전작을 접해보질 못해서 단언하지 못하지만 통상의 SF를 기대했던 독자들의 바램을 저버린다. 작품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화성을 주무대로 하고 있고 지구에서 화성으로 여행을 오고 화성에 정착하여 살기도 하고 그 와중에 인간을 빼다 닮았는 로봇도 등장하고 시간적인 배경도 1999년에서부터 2026년까지 SF적 구성요소는 다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작품을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SF인지 서정문학인지 독자들을 알송달송하게 만들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결말부분으로 다가갈수록 지구와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인문학적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동안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읽었던 인내감에 돌을 던지게 된다. 

화성(MARS)는 달과 더불어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천체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그리스로마신화부터 시작하여 과학시대를 접어들면서 화성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지구와 가장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어쩌면 우리와 같은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리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상은 1898년 하버드 조지 웰스의 <우주전쟁>이라는 SF의 원조적인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고 나사의 바이킹호가 화성에 착륙하여 생명체가 살수있기에 부적절한 환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우리에게 화성은 지구의 또 다른 닮은꼴로 그려져 왔다. 그러면서 화성은 그 어원에서 볼수있듯이 전쟁의 신인 마르스에서 따왔기 때문에 외계인하면 화성인을 지칭했고 화성인하면 지구를 침범하는 침략자의 이미지로 낙힌 찍힌것 역시 사실이다. 가깝고 친근하면서 왠지 두려움의 대상인 화성과 화성인이라는 틀을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뒤집어버렸다. 정말 때묻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들인 화성인들을 멸종으로 몰아가는 것은 다름아닌 지구에서 건너온 정신으로 오염된 지구인이었던 것이다. 폭력,전쟁,돈,시기,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한 지구인의 눈에 순수한 화성인은 마치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이후 물밀듯이 몰아닥친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화성은 그들의 도피처이외는 어떠한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현대과학문명은 인류에게 많은 점을 선사했다. 지식의 보고로 부의 매개체로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으로 과학문명은 곳곳에 자리잡고 지금도 인류의 견인차 역활을 하고 있다. 그 옛날 덩치 큰 육식 포유동물의 눈치를 살치면서 생존에 급급했던 인류에게 과학적 사유와 방법에 대한 진화는 그야말로 눈부신 결과를 가져왔고 이제는 이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생각을 굳혀버린지 오래다. 오직 인류에게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우주탐사라는 미명하에 하나씩 정복할 수 있는 자만심을 은근히 몸에 배게해버린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이기주의 빠져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오히려 생각이 깊은 인문학적 플롯을 던져버리고 SF적인 메타포를 동원하면서 더 인상깊게 다가온다. 결말 부분의 다소 시니컬한 인상은 어쩌면 이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발더둥치고 있는 인류에게 보내는 대우주의 메세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황량하면서도 거의 독백에 가까운 화자들의 목소리는 지금 이대로 인류가 변화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아마도 가까운 미래속에 위치할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전혀 SF작품 같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SF작품이 바로 <화성연대기>이지 않나 싶다. 그 어떠한 메아리보다 강력하게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거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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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아저씨 1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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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가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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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아저씨 1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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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디론가 떠난다. 다람쥐 체바퀴 돌듯 틀로 짜여져 한치의 오차도 없을것만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저 떠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희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이던 그리고 어떤 교통수단을 동원하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갈 것인가등의 방법론은 다음 문제이다. 마냥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심장의 박동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이나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떠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간다면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지 않을까. 

<자전거 아저씨>의 저자는 바로 누구나 한번쯤을 꿈을 꾸었던 갈망을 현실로 실현한 사람이다. 자전거로 한반도의 곳곳을 심지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자전거로 하나로 전국을 누빈 현대판 김삿갓이자 김정호라고 해야할 정도로 한두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전거를 끌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듯이 아니면 자전거 바퀴처럼 한곳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굴러가듯이 그렇게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굴러다녔다. 지금이야 웰빙의 수단 정도로 전락한 자전거이지만 이 나라에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들어온 자전거는 일반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보편화되기전까지 자전거는 우리 아버지들의 출퇴근 시간을 돋보이게 했고 학교 등교길에 아버지등을 두팔로 감싸안고 등교했던 아련한 기억들까지 자전거는 이동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게체로써의 역활도 톡톡히 했다. <자전거 아저씨> 에서 저자는 바로 이렇게 정이 묻어나는 자전거를 통해서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이정표로 표현되고 있다. 낯선길을 찾을때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하듯이 자전거는 닫혀있었던 삶을 열린 공간속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단 그 이정표를 잘못보아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더라도 그곳에도 역시 열려있는 세상이 있음에 저자는 네비게이션을 찍듯이 굳이 정확하게 찾아가야할 필요성 조차 제거해 버렸다. 아마도 이런게 자전거 여행의 참맛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독자들 스스로 공감하게끔하고 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제주도 자전거가 발닿는(?)곳 어디에도 수수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제대로된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만 제외하고는 모든 삶들이 평온하고 친근하고 정이 넘쳐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진다. 의도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속에 여행자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버린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고 하듯이 여행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자나 독자들에게 희망이고 삶 그자체로 다가온다. 

집을 나선다면 지도, 먹거리, 입을거리, 이동수단, 기타 등등 챙겨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막상 나서지만 한두가지는 빼먹게 마련이다. <자전거 아저씨>는 우리의 의도되고 계획된 여행과는 사뭇 다른다. 즉흥적이고 준비되지 않는 다소 생뚱맞는 여행의 연속이다. 중량천변에서 낚시줄에 물고기가 아닌 들쥐 한마리가 걸려던 광경이 황당하고 우습지만 바로 이런 의도되지 않는 모습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모처럼 마음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가슴찡한 감동적인 문구나 단어를 찾을려면 눈을 씻고 들여다 보아도 그 행방이 묘현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행간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는 강력하게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이 역시 전혀 의도되고 계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다가온다. 거의 매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저자의 작품들과 사진들이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반영하고 있어 더 돋보이는 책이다. 올여름 상영되었던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넌 정체가 뭐냐라는 대답에 원빈이 그저 "옆집 아저씨" 라고 답한다. <자전거 아저씨>는 마치 옆집의 수수하고 푸근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정말 깊어가는 이 가을날 어딘론가 목적지도 없이 계획도 없이 떠나게끔 하는 책이다. 그렇게 도달하는 곳엔 옆집 아저씨같은 소박한 우리의 이웃들이 있을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덩달아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을것만 같다. 아니 인식하지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그게 다 사람살아가는 과정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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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아저씨 2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어디론가 떠난다. 다람쥐 체바퀴 돌듯 틀로 짜여져 한치의 오차도 없을것만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저 떠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희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이던 그리고 어떤 교통수단을 동원하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갈 것인가등의 방법론은 다음 문제이다. 마냥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심장의 박동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이나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떠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간다면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지 않을까. 

<자전거 아저씨>의 저자는 바로 누구나 한번쯤을 꿈을 꾸었던 갈망을 현실로 실현한 사람이다. 자전거로 한반도의 곳곳을 심지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자전거로 하나로 전국을 누빈 현대판 김삿갓이자 김정호라고 해야할 정도로 한두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전거를 끌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듯이 아니면 자전거 바퀴처럼 한곳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굴러가듯이 그렇게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굴러다녔다. 지금이야 웰빙의 수단 정도로 전락한 자전거이지만 이 나라에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들어온 자전거는 일반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보편화되기전까지 자전거는 우리 아버지들의 출퇴근 시간을 돋보이게 했고 학교 등교길에 아버지등을 두팔로 감싸안고 등교했던 아련한 기억들까지 자전거는 이동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게체로써의 역활도 톡톡히 했다. <자전거 아저씨> 에서 저자는 바로 이렇게 정이 묻어나는 자전거를 통해서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이정표로 표현되고 있다. 낯선길을 찾을때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하듯이 자전거는 닫혀있었던 삶을 열린 공간속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단 그 이정표를 잘못보아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더라도 그곳에도 역시 열려있는 세상이 있음에 저자는 네비게이션을 찍듯이 굳이 정확하게 찾아가야할 필요성 조차 제거해 버렸다. 아마도 이런게 자전거 여행의 참맛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독자들 스스로 공감하게끔하고 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제주도 자전거가 발닿는(?)곳 어디에도 수수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제대로된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만 제외하고는 모든 삶들이 평온하고 친근하고 정이 넘쳐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진다. 의도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속에 여행자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버린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고 하듯이 여행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자나 독자들에게 희망이고 삶 그자체로 다가온다. 

집을 나선다면 지도, 먹거리, 입을거리, 이동수단, 기타 등등 챙겨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막상 나서지만 한두가지는 빼먹게 마련이다. <자전거 아저씨>는 우리의 의도되고 계획된 여행과는 사뭇 다른다. 즉흥적이고 준비되지 않는 다소 생뚱맞는 여행의 연속이다. 중량천변에서 낚시줄에 물고기가 아닌 들쥐 한마리가 걸려던 광경이 황당하고 우습지만 바로 이런 의도되지 않는 모습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모처럼 마음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가슴찡한 감동적인 문구나 단어를 찾을려면 눈을 씻고 들여다 보아도 그 행방이 묘현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행간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는 강력하게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이 역시 전혀 의도되고 계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다가온다. 거의 매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저자의 작품들과 사진들이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반영하고 있어 더 돋보이는 책이다. 올여름 상영되었던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넌 정체가 뭐냐라는 대답에 원빈이 그저 "옆집 아저씨" 라고 답한다. <자전거 아저씨>는 마치 옆집의 수수하고 푸근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정말 깊어가는 이 가을날 어딘론가 목적지도 없이 계획도 없이 떠나게끔 하는 책이다. 그렇게 도달하는 곳엔 옆집 아저씨같은 소박한 우리의 이웃들이 있을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덩달아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을것만 같다. 아니 인식하지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그게 다 사람살아가는 과정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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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 2 - 제국을 멸망시킨 화학 원소 이야기
존 엠슬리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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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헤 리비 비씨 노흐 블레 .... 학창시절 화학시간에 주기율표에 나온 원소들이 잘 외워지지 않아서 이런한 방식을 동원해서 머리속에 담아둘려고 노력했던 생각이 난다. 수소에서 시작하여 우누녹튬에 이르기까지 주기율표상의 화학기호만 보더라도 눈앞이 막막했던 시절 화학은 그다지 쉽게 다가오던 그런 분야가 아니였던 기억이 강하다. 노벨을 비롯하여 이후 퀴리부부등 노벨화학상을 받은 학자들의 업적을 보면서 그 대단함을 느끼지만 화학과 난 그저 평행선을 그리듯이 가까울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특히 화학공식에 법칙들 그리고 개별원소들의 상이한 반응들은 지금은 기억저편으로 가물거리지만 아직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기억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화학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발판으로 성장한 분야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 인류와 함께했던 분야이다. 근대현사를 비롯하여 좀 더 역사를 확장하여 중세 그리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각종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화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특히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분야와 더불어 누군가를 제거하는 독약에 이르면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은 바로 나와 같이 화학에 문외한이나 한때 절망감을 가졌던 독자들에겐 더욱 더 기쁜 소식으로 다가온다. 고리타분하기만 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한꺼번에 넘어서 일사천리로 책장을 넘기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특히 독약으로 지칭되는 유해한 원소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흥미가 배가 되고 있다. 조선왕들 중 1/3 정도가 독살설에 휘말려 있고 르네상스시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이상형이었던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누이동생이자 연인이었던 루크레치아의 엽기적인 정적 제거 방법, 당나라 측천무후가 애용했다던 정적 제거 방법중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이었던 독살과 독약에 대한 내용을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어 책을 읽는 속도감과 집중력을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다 한때 동서양을 막론하고(아마도 지금도 이런 야망을 져버지 못한 이들이 있겠지만) 황금을 향한 열정에 부응한 연금술과 내력 및 그들이 즐겨사용했던 방법등을 소개하여 과학서적으로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부분을 걷어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사망원인이 수은중독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이에 더해 뉴턴이 죽는날까지 금을 만들기 위한 연금술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수은중독자중에 형사들이 많았다는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자장수 역시 수은중독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온도계,형광등,치광용 아말감 충전재등 우리 주변엔 유독한 독금물들이 넘쳐나고 있고 이를 섭취한 동식물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등 독약은 먼 옛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은밀한 물건이 아니라 바로 지척에 있는 평범한 원소들이라는 사실들에서 상당한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 점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히치콕 감독이 이 책을 읽었다면 이 한 권으로 몇 편의 스릴러가 탄생했을거라는 뉴욕 타임스의 리뷰처럼 저자는 역사적 사건들에서 사용되었던 독약의 활용방법과 그 사례들 그리고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남다른 추론을 통해서 화학의 세계를 세롭게 조명하고 있다. 부록으로 화학전문용어에 대한 친절한 해석을 덧붙여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화학의 세계를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쉽게 그리고 아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오며서 화학 전문가로서의 견해를 곁들여 자칫 가십거리로 흘를 수 있는 주제에 대해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예로부터 수은, 비소, 납, 안티모니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료용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을 정도로 인간에겐 친밀한 원소들이다. 물론 이러한 원소는 우리의 몸에도 존재하고 있다. 단지 그 양의 과다에 따라 치료용이 되느냐 죽음을 재촉하는 독약이 되는냐의 판단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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