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1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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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타르코스 영웅전보다 더 재미있고 솔솔한 영웅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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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1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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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는 동양세계에서는 역사서의 바이블같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 면면을 이어왔다. 특히 열전편은 인간군상들의 삶을 집대성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듯 동양에 사기열전이 있다면 서양세계를 대표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로마 신화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야 말로 백미를 장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쓰여진 시기가 비슷하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연구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동서양이 공통으로 역사의 원동력을 인간 중심에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플루타르코스와 사마천 이전의 역사인식은 신화를 바탕으로한 전설의 시대에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소리일 것이다. 이런면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서양세계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소크라테스가 사랑했다는 알키비아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이 회자되는 '개 같은 인생'을 노래한 디오게네스, 최초로 서민을 위한 개혁에 목숨을 건 호민관 그라쿠스형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세기의 대결 그리고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쳤던 카이사르등 그 이름만으로도 벌써부터 왠만한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 잡고 있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은 그리스-로마신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명사이자 우리 시대 신화 전문가인 故이윤기 선생의 유작이다.  

서양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리스-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서양문화의 기저엔 항상 그리스-로마 신화가 동반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성경만큼이나 회자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동양권의 독자들에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혼용되는 지명이나 인명등 읽을수록 복잡하게 다가오는 내용들로 인해 그 깊이와 재미가 반감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윤기선생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국내 독자들에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출간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이라는 이름으로 재 탄생시켰다. 굳이 재 탄생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각색/편집하는 차원을 넘어서 저자만의 색깔을 담아내고 있는 새로운 영웅열전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리스-로마 신화와 동시에 이윤기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렸듯이 이번 책 역시 이윤기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할 만큼 군더기 없이 깔름한 설명과 각종 삽화와 사진으로 한층 맛깔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책을 접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맛깔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 있기 마련이고 바로 이윤기선생의 책들이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신화나 영웅전은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양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윤기의 입담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리스 로마 영웅들의 모습은 마치 책을 펴든 독자들의 눈앞에 한폭의 서사시처럼 술술 읽히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저자의 전문가적인 지식의 깊이와 폭이 넓은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 맞는 언어의 선택 그리고 감미료를 더하는 듯한 나레이션에서 한층 더 영웅들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저서는 원전인 플로타르코스 영웅전에 충실한 기초를 배경으로 한 그리스-로마 영웅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배경까지 곁들여 나레이션을 충실히 하고 있어 중복되는 느낌도 들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팁을 선사하고 있다. 테세우스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고구려 유리왕의 설화와 너무나도 유사한 점등이 우리가 이역만리 떨어진 생뚱맞은 문화권의 신화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그만큼 신화나 영웅전은 바로 이렇게 이질적인 문화권을 아우르는 인류 공통의 생각들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마치 겨울밤 화톳불가에서 손자들에게 들여주듯이 맛깔나게 풀어주는 고인의 생동감 넘치는 나레이션이 더해져서 더욱 더 정겹고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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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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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유니크한 주제를 다룬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생물학적으로 INPUT과 OUTPUT이라는 극히 단순한 구조에 의해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명체보다 인류라는 종인 우리는 이제 더이상 INPUT에 대해서 만큼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와는 달리 살아가고 있다. 즉 음식, 먹거리는 인간에게 있어 더 이상 기본적인 생명유지의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렵과 채집의 시대와 기초적인 농경시대의 먹거리의 개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그 만큼 과학기술의 발달과 획기적인 재배방식 및 그에 따른 파생 조리법의 출현으로 이제 먹거리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는 해결되었다고 봐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아직도 먹거리에서 해방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덕 시티>는 바로 이런 먹거리를 다룬 작품이다. 먹거리를 다루면서도 이 작품속에는 조지 오엘의 <1984>를 방불케하는 거대한 음모 그리고 페스트푸드와 정크푸드로부터 야기되는 비만과 그를 바라보는 시각등 다양한 볼거리를 담고 있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대게 정치적인 무거운 소재를 플롯으로 절대권력인 국가나 자본이 인간의 심성까지 지배한다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소설들은 상당수 접할 수 있고 대부분의 래퍼토리가 상당히 심오한 정치적 이슈를 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덕 시티>는 이러한 국가나 자본의 거대한 음모가 우리일상 특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어야만 하는 먹거리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약간은 무게감이 떨어지는 듯한 발상이지만 실상은 지금 풍요로움에 흠뻑 젖어있는 현대사회를 그로테스크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디딕>의 등장인물의 괴기함과 디지니 만화 도널드 덕의 우스꽝스러운 소재를 차용한 작가는 현대인들의 빼앗긴 먹거리, 나아가 자유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대량생산과 자본의 급격한 지배력은 한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했지만 이제 사회는 작중 도널드나 데이지처럼 뚱뚱한 사람을 루저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비만에 치명적인 정크푸드를 마치 풍요로움과 권력의 상징처럼 열심히 기계에서 찍어내고 있고 강요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손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들고 다른 손에 코카콜라를 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자유의 여신상과 비견되는 풍요로움과 자유를 대변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짜맞추고 있다. 그리고 마치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으로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선택을 좀먹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웰빙바람과 더불어 먹거리에 대한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이어트에 광풍이 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중독된 환자처럼 정크푸드에 집착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 마저 앗아가버리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먹고싶은 것을 먹지 못한고 있다는 강한 자괴감을 가지게 한다. 결국 자본과 결탁된 식품에 대한 선태권을 상실한 우리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 점보다는 과연 우리는 식품에 대한 진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스웨덴 작가라 하면 <말괄량이 삐삐>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이나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정도를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레나 안드레손은 깊은 각인을 세겨준다. 그녀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이번 작품은 애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현실고발적인 플롯과 작품 전반에 흐르는 내러티브는 독작들에게 마치 거대한 음모를 하나씩 파해쳐나가는 일종의 성취감마저 불러 일으키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의 가슴에 돌하나를 던져준다. 그러면서 소설속 가상의 도시 <덕 시티>가 과연 픽션속에나 존재하는 상상의 도시일까라는 의구심에 대해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덕 시티로 변해가는 과정이지는 않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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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종말 - 지금 당신의 밥상은 안전합니까?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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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식탁은 과연 안전한가? 그에 대한 해답과 미래의 식탁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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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종말 - 지금 당신의 밥상은 안전합니까?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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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발전주의의 정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방면에 걸쳐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지향하고 있고 또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인류가 첫발을 디딘 이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의 획득과 부의 소비시대를 누리고 있고 특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식량(식품,음식)의 문제 역시 이제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1차적인 욕구충족의 시대를 지났다. 오죽하면 좀더 미각과 정신적인 달콤함을 달래기 위해 레시피라는 일종의 요리법이 등장하면서 식품 역시 이제는 하나의 풍요로움이 만들어낸 산출물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불과 1만전만 하더라도 수렵과 채집으로 하루를 연명해야 했던 인류에겐 먹거리 즉 식량의 의미는 절대적이었고 지금도 10억명에 이르는 이들에게 식량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산업개발국은 넘쳐나는 칼로리로 인해 성인인구의 절반가량이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고 다른 한쪽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절대빈민국에서는 기아와 영양결핍으로 삶의 의욕마저 앗아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저서들이 출간되었고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기아의 방지와 예방이라는 측면으로 그 촛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거의 각론적인 시각으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 왔고 특정인구 특정지역에 국한된 경향이 있었다. 이번 <식량의 종말>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식량, 식품 전반에 걸친 시스템을 고찰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전 국토를 강타하고 있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된 광우병파동등 동물과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고병원성전염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러한 전염병의 창출,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의 급증, 죽음직전으로 내몰리는 기아와 영양결핍의 원인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식품 산업 시스템이 기인한다고 논거하고 있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하드웨어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만을 가져온게 아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운송수단과 기계화의 급진적 발달은 식품 생산에 도화선으로 작용하였고 식량의 증대는 다시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대해 1798년 멜서스는 <인구론>에서 그 유명한 말로 인구와 식량간의 위험한 상관관계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멜서스의 경고는 산업화에서 자본주의시스템으로 탈바꿈한 2차 변혁 앞에서 그저 기우로 치부 되었다. 즉 이말은 이젠 식품,식량도 다른 재화 처럼 하나의 상품으로 인지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는 식품이 조리라는 노동력을 투여하지 않더라도 간편하게 언제 어디서나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반열에 올려 놓았고 획일화된 몇몇 브랜드와 소매업체의 선반에서 취사 선택만 하는 간편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보면 단일성을 맥락으로 하는 이러한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가져준 듯 하지만 실상 우리의 식품 시스템은 현재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논거이며 이에 대한 반증으로 한층 더 신뢰감을 주고 있다. 

<식량의 종말>는 식품 산업 시스템 전반에 걸쳐 식품이 음식에서 상품으로 전화하는 과정, 독점적인 식품생산업체와 식품가공업체, 식품소비업체들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한 식품권력이 창출되는 과정, 기아와 영양결핍의 원인, 육류소비 증가의 패해, 곡물생산 증대를 위한 각종 인위적인 간섭과 유전자 변형등의 심각성등 식품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인구증가와 발맞추어 이들의 입을 해결할 수 있는 식량의 증가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저자는 단호하게 해답을 던지고 있다. 지금의 식품 산업 시스템으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몇년 몇십년은 가능하겠지만 지속 가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식품 산업에 종사하는 행위자들과 시스템에 메스를 가하더라도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식품의 최종 소비자인 주류 소비자들의 의식과 식단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식품 구조의 패해와 개선의 방향을 알면서도 자신의 입으로 들어오는 편리하고 달콤한 음식을 거부할 실천의지가 없는 한 향후 인류의 미래는 멜서스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불편한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물론 저자는 현재의 식품 시스템을 타개할 방책으로 대안농업, 청색(바다자원)혁명, 지역농업, 다양성의 확보등을 제시하고 있고 현재 작지만 몇몇 국가(대표적으로 쿠바의 성공 사례가 주목 받고 있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례들에서 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최고 정점에 있는 육류 소비의 절감 없은 이러한 대안들은 그 빛을 보기가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경제발전이 가져올 육류소비의 증가는 그  예측자체가 무의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렵/채집의 시대 먹거리를 찾기 위해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투여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는 식품을 구하는 시간이 몇분도 되지 않고 먹거리에 대한 비중의 의미 자체가 퇴색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먹거리 식품은 인류의 생존에 불가피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전반적으로 <식량의 종말>을 통해서 지금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심오한 고민거리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며 그 해결방안에 대해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식품 시스템 전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 내막은 경악을 금치못할 정도의 충격을 던져주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시스템이 굴러가게 하는데 우리 소비자들도 지대한 일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식단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던저주고 있는 문제작이다. 더불어 기아와 영양결핍으로 인한 인류의 심각한 이질성 회복과 지구 생태적인 차원의 회귀의 모색 또한 병행하여 생각해야할 여지를 남기게 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숲으로 들어가 열매를 따 먹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려가면서 효율성 낮은 전근대적 식품 경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음식 만들기를 타인의 손에 넘겨주고 우리의 먹거리 그리고 식량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자체을 자본주의적 경제 모델에 내맡기면서 식량의 종말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 바로 음식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데서 그 작은 시작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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