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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정영문 지음 / 세계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정영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9년 겨울이다. 그보다 한 해 전, 작가정신에서 이윤기의 <진홍글씨>를 필두로 소설향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정영문의 <하품>이 열한 번째 발간되었다.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이순원, 윤대녕, 최윤, 신이현, 김채원 등 작가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기껏해야 150쪽을 넘지 않는 분량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적합하고 코팅되지 않아 소박한 표지가 마음에 쏙 들었던지라 15권 째까지 착실하게 사 읽었다.
이후 김연수(친구가 김연수의 누나와 친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김연수를 생각하며 던진 멘트는 그 엄살에 있어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지인의 동생이 펼친 무공 실력에 대한 평가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라니. 그 후 김연수는 친구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평온하고 세심한 인사법’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문학상을 거머쥔 자의 여유로움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여유로운 심성이 문학상을 먹어치우게 했던 것일까)와 백민석의 소설이 합류했다.
난 정영문의 풀어 헤친 머리가 좋다. <하품>의 한쪽 면을 차지한 정영문의 사진은 수도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퍼머가 풀어져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아래를 향하고 있는(어쩌면 눈 감고 있는) 눈과 굳게, 그렇지만 고집스럽게 보이지 않는 얇은 입술과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두 무릎을 말아쥔 힘줄이 돋은 그의 손. 입 주위에 모여든 한 줄 주름으로 정영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정영문을 정영문 답게 보이게 하는 건 그의 옆모습이다. 그의 옆모습에 영광 있으라!
그건 그렇고, 정영문의 글쓰기를 가리켜 ‘이단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듯 정영문 소설의 방식은 주류와 멀어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전공(심리학)을 글쓰기에 백분 발휘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인물은 두 명으로 족하다(하나여도 상관은 없지만 그리 되면 소외와 단절의 극적 효과가 반감될 것이므로). 그들의 직업은 무위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으며, 듣는 이의 반응에 조응하는 방식으로의 대화가 아니라 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독백의 방식(<하품>에서 ‘나’와 동물원에서 만난 사내가, <겨우 존재하는 인간>에서 ‘나’와 공원에서 만난 사내가, <중얼거리다>에서 왕과 왕비, 광대, 시종, 시녀가, 또한 그의 단편에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상은 대부분 익명의 누군가이다)을 차용함으로써 ‘관계’의 비루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대체로 상대에게 무관심하지만, 구걸하는 태도가 사뭇 당당하거나 살인을 고백하는데 있어 오늘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에 대해 얘기하듯 대수로워하지 않는 등, 상대가 파렴치하거나 뱀처럼 사악해 보일 때는 예외적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갖는다.
또 정영문은 가족이란 관계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인하며 혐오감을 드러낸다. 누군가 얘기했듯 가족은 그것이 끊을 수 없는 사슬로 엮인 운명이라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절망적이다 라는 말을 형상화시킨다. <무게없는 부피>에서 죽음을 앞둔 화자는 아들의 탄생이 여자가 놓은 덫이라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들이 잉태되는 순간조차 자신은 여자의 역동성 앞에 불가피하게 놓여있었을 뿐, 임신에 기여한 바가 없었음을 명백히 한다. ‘핏덩어리의 그 기괴하면서도 느끼한 느낌’이라 표현되는 아기의 탄생은 그가 자람에 따라 역겨움과 가증스러움과 환멸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을 향해 ‘우리의 모든 관계는 무효이며, 마땅히 무효가 되어야 하며, 무효임을 선언한다.’라며 교활하게 웃는다. <환멸>속에 등장하는 ‘나’는 어머니를 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치매에 갇힌 아버지의 삶을 비꼬며 ‘그가 내 아버지라는 확신을 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을 뿐더러, 오늘도 그의 죽음이 유보된 것을 애석해한다. <괴저>의 ‘그’는 몸이 썩어들어가는 병을 앓는다. 그는 가족이라는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지우는 쪽을 택한다. 그의 죽음을 보며 가족들이 터뜨리는 눈물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는 이 아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아이는 우리를 살렸어’라는 자신들의 안도에 대한 거북함 탓이다.
또한 정영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백스페이스는 무용지물이다. 그는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로 나아간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사고와 언어를 無로 되돌린다. 이것은 그의 소설의 일관된 정서다.
“네가 내게 올 수 있는 먼길들을 놔두고 가장 가까운 길로 와줄래?”
“.....”
“어쨌든 안 갈게.”
“됐어. 그럼. 그래, 오지 않을 수 있으면 오지 마.”
“그래도 되겠지?”
“괜찮아. 어쩌면 너무도 혼자 있고 싶은 나머지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기라도 바랐는지도 몰라. 네가 옆에 있게 되면 너를 견딜 수 없게 될 거야.” (불면증)
- 후회가 되나, 내가 말했다.
= 아니. 아니, 후회가 돼.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 게 후회가 된다고 말하고 싶군. (하품)
- 그것을 보는 사람을 다소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아니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춤이면 좋겠어. 그것의 넋을 빼놓는 나팔소리에 넋이 빠져 그것을 보는 사람의 넋까지 빼놓는 춤을 추는 코브라가 추는 춤 같은. 아니, 꼭 그런 춤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춤이어도 좋으며, 그런 춤이어도 좋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런 춤이어야 한다 (중얼거리다)
이것은 그의 글쓰기 방식과도 통한다. 그의 글은 어리둥절하고 넋이 빠지게 만들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함과 동시에 정영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드시 그런 방식을 유지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영문식 언어의 유희를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을 <고문하는 고문당하는 자>에서 발견한다.
-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한다. 너는 그 말들의 울림만을 느낀다. 그의 모든 말은 네게 다가오지 못하고 네 주변에 머물 뿐이다. 너 또한 무슨 말인가를 하고자 한다. 자신으로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말을, 의미를 벗어나 있으며, 그 상태로 자족적인 어떤 말을, 하지만 너는 어떤 말도 구상할 수가 없다. 너의 모든 생각들은 혼돈 속을 서툴게,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가로질러갈 뿐이다. 너는 너의 언어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정영문의 소설은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전혀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그의 소설집을 주욱 늘어놓고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서사가 그의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든 칼로 오려내어 짜맞추기 해도 새로운 소설 한 편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품의 기운을 털어내기는 힘들다. 또 정영문은 한 문장에 소유격 조사를 반복해서 사용(의도된 것이라면 그 의도의 내용이 궁금하다)하고 쉼표를 남발함으로 해서 자연스러운 읽기를 방해하는 오류를 범한다. 간혹 비문과 맞닥뜨리는 일도 있다. 정영문이 고뇌하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진로와 문학에 대한 성찰은 <어두운 화면 위에 떠오른 느슨한 말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결국 문학의 본질적 기능은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 언어에게 낯선 이미지들을 소개하고, 언어가 그 이미지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도록 행위에로 이끌어내는 작업. 언어의 보살핌과 위협을 동시에 받으며 하는 사고의, 좌표 없는 항해, 존재의 규명이 아닌, 그것의 규명될 수 없음을 규명하는 헛된, 하지만 부득이한 노력.
- 자신의 절망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더 큰 절망.
- 그는 자신의 글이 사조라는 하나의 군(郡)에 묶이기에는 넘치거나, 아니면 턱없이 모자라는, 단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싶어한다.
- 재치 있는 기교와 놀라운 착상이 아닌, 투명한 직관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작품은 얼마나 드문가. 그러한 작품들의 결핍으로 인한 커다란 구멍 속에서 사람들은 허우적거리고 있다.
- 자아에 대한 비평적 거리 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