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마음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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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게는 책을 들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떠안기는 버릇이 있었다(이것이 과거형인 것은 이제 그 버릇을 옆집 개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그가,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 못된 버릇 때문에 내게는, 정작 내가 갖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절판되는 수모 앞에서 종종거리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이것이 현재형인 것은 아직도 그때의 종종거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청하 출판사 발행 초판본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아무튼 난 그 무렵 장 그르니에의 <섬>을 끼고 다니며 틈 날 때마다 애독했다. 그러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가끔 버스에서 마주치는 훤칠한 재수생에게 매료되어 눈인사 한번 나누어 본 적 없는 그에게 이거요, 전해 주었다. 그 날 눈이 왔고 훤칠한 재수생은 눈보다도 더 새하얀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알량하게도 그 눈부심에 꼴깍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 후로도 청하 발행본 <섬>을 몇 차례 더 구입했고 구입한 족족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이어서 얼마 후 청하 출판사는 문을 닫았다. 청하가 발행한 장 그르니에 전집은 표지의 착 가라앉은 색채(쟈끄만은 예외라 연초록의 뽀사시함이 거슬리긴 했다만)와 타원 안에 들어있는 그르니에의 판화 초상 덕에 꽤 마음을 자극했던 지라 청하의 파산은 나의 그것처럼 마음 서늘한 소식임에 분명했다.

그러다 민음사에서 <섬>이 발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친구가 종로서적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각 그 즈음에 <섬>이 눈에 띄었다. 난 단숨에 값을 치르고 뽀얀 미소로 친구를 맞았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이 <섬>이 그 <섬>이 아니다? <섬2>다? 섬의 후속편인가? 그러나 소설인데? 앗뿔싸, 민음사가 아니라 책세상이네? 게다가 그르니에가 아니고 끌레지오라? 다행이었던 것은 끌레지오에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 난 그의 <섬>뿐만 아니라 <조서>와 <침묵>과 <사막>과 <황금물고기>와 기행문인 <하늘빛 사람들>까지 찾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타오르는 마음>도. 아오, 사설 길다.

<타오르는 마음>은 일곱 개의 단편으로 엮여 있다. 그의 데뷔작인 <조서>를 약간 머리에 힘 주고 읽어야 했던 반면 <타오르는 마음>은 그저 술술술술 읽힌다. 그의 소설이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발과 인간으로 인해 거대해진 세상이 인간 자신을 살해하는 병기가 될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페시미즘이다. 하여 클레지오는 원시의 자연으로, 사고가 영글기 이전인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 그런 그에게 제3세계를 그리는 일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타오르는 마음>에 실린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리거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하지만 이들은 삶이 선사하는, 주옥같은 음률에 익숙한 티없음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날 선 세계가 휘두르는 횡포에 상처 받은, 상실과 고독을 먼저 체득한다. 하지만 그들을 읽으며 뼛속까지 아리지 않은 것은 클레지오가 그리는 서정성 때문이다. 그의 묘사는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의 세밀한 묘사 탓에 누구는 그를 사실주의 작가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지만 난 오히려 그가 몽환의 밤을 서성이는 신비주의 작가라 말하고 싶다. 그가 그리는 가시덤불과 관목들, 노천 시장, 마차들, 밤꾀꼬리의 울음 소리, 맨발로 걷는 아이, 정령들을 따라 가다 보면 머리 속이 옅어지고 호흡이 느려지며 박무에 싸인 텅 빈 숲을 거니는 것처럼 아련해지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나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는 천진난만하고 그윽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내친김에 사적 고백을 좀 더 하자면 이렇다. 시험 공부한답시고 졸던 와중에 라디오에서 사연을 읽는 디제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연인즉슨, 이제 대학생이 되어 떳떳해진 내가 버스 안에서 만난 여학생과의 재회를 꿈꾼다, 뭐 그딴 것이었는데 사연의 말미를 듣고 난 기절초풍하여 그 달던 잠에게 레프트 훅을 날리고 싶어졌다. 세상에나, 그 여학생이 건네준 그르니에의 <섬>이 이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가 되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 되어서 다시 듣기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놈의 잠 때문에 시험도 망치고 그놈의 잠 때문에 주소 한 줄 제대로 얻어듣지 못하다니. 내 생에 다시는 없을, 극적인 순간을 허무로 마감한 잠은, 그러나, 여전히, 내 곁에서 위풍당당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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