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니까 2002년 봄, 건조한 문체로도 머리에 쥐 나게 웃길 수 있구나, 라는 것을 통감케 하던 P모씨께서 과감히(!) 추천하신 책이 바로 <서재 결혼 시키기>다. 내가 과감히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은 P모씨 왈, 2001년 연말 자신이 선정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새로 발견된 작가상, 최우수 유머와 위트상, 최우수 표지디자인상, 최우수 지적인 글쓰기상, 최우수 번역상을 몽땅 휩쓸어 6관왕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한 얇은 귀를 지닌 나로서는 그야말로 혹,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약간의 의심 속에서 진행된 책 읽기는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의심이 얼마나 부질없었는가 일깨워 주었다. 딱 2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보아도 마찬가지, 마냥 행복하고 즐겁다.

앤 패디먼과 그녀의 남편은 ‘안 지 10년,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된 사이’다. 둘은 티셔츠며 양말이며 레코드 등 일상다반사를 공유하지만 단 한 가지 책에 관한한 예외다. 침대나 미래를 공유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책을 공유하는 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들이 결혼 5년에, 아이까지 하나 낳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장서를 합병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야말로 ‘좀 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을 이루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두 사람의 서재를 결혼시키기 위해 벌이는 우여곡절은 조금이라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고개 끄덕이며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 그의 영국식 정원 운영 방법과 나의 프랑스식 정원 운영 방법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어쨌든 단기전에서는 내가 승리를 거두었다. 내 방식대로 책을 정리해도 그는 그의 책을 찾을 수 있지만, 그의 방식대로 정리하면 나는 내 책을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 덕분이었다. 우리는 주제에 따라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역사, 심리, 자연, 여행 등. 문학은 다시 국적에 따라 세분하기로 했다. (조지는 내가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우리 친구가 이야기해 준 정리 체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 친구의 친구가 몇 달 동안 실내 장식업자한테 집을 빌려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모든 책이 색깔과 크기를 기준으로 재정리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직후 실내 장식업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식탁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사고가 인과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

책 한번 잘못 옮겼다가, 교통사고 당한 일로 인과응보란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허허 정말 재미있지 뭔가. 두어 번 포장이사를 경험한 내 경우는 이렇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일단 책장이 자리를 잡기만 하면 내 귀여운 책들을 이곳저곳에 무자비하게 쑤셔넣는다. 난 그 꼴을 잠시라도 허용할 수 없다. 침대와 옷장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고 덩치 큰 소파와 장식장이 좌우로 행렬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난 그들이 쑤셔넣은 책들을 안전하게 꺼내 제 자리에 앉히느라 진땀을 뺀다. 어머니는 나중에 하라고 고함을 치시고 직원들은 책을 다듬느라 삐죽이 솟은 내 엉덩이를 노려 보며 기우뚱 기우뚱 짐을 나른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결벽증이라며 도리질을 해싸치만 이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 친구들을 향해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아! 속사포를 쏘아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서재 결혼 시키기> 덕분이다.

또한 앤 패디먼은 교열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誤字를 견디지 못한다. 그녀는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의 페이퍼백에서 오자 15개를 발견하고는 ‘내가 알아채고 아끼게 된 오류들을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내기도 하고 케이크를 주문했을 때 빵집 직원이 잘못 적어넣은(HAPPY BIRTHDAY'S) 아포스트로피에 기절을 하기도 한다. 이 또한 얼마나 흐뭇한지. 티비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급기야 채팅을 하면서도 오자를 보면 지적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함박만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누구든간에 이 책의 사랑스러운 마법에서 헤어나기란 어렵다. <서재 결혼 시키기>의 일독을 권하는 의미로 그녀의 유머스러움을 팁으로 하나 더.

- 우리는 하드백이 페이퍼백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단 책 여백에 써 놓은 글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미들마치>는 내 것을 남겨 놓기로 했는데, 이 책은 내가 열여덟에 읽은 것으로 여백에서 나의 미숙한 문학 비평 시도를 엿볼 수 있다(37쪽: “으그그”, 261쪽: “헛소리”, 294쪽: “우웩”). <마의 산>은 조지 것이 남고, <전쟁과 평화>는 내 것이 남았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여인들>에서 가장 괴로운 논란이 벌어졌다. 조지는 그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환각적인 표지에 전라와 반라의 두 여자가 등장하는, 그의 첫 밴텀판 페이퍼백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 책을 열여덟 살에 읽었다. 그 해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내가 그 해에 처녀를 잃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데는 굳이 일기를 들추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 사실은 내가 나의 바이킹판에 적어 놓은 촌평들에 빤히 드러나 있으니까(18쪽: “폭력이 섹스를 대신한다”, 154쪽: “성적인 고통”, 159쪽 : “성적인 힘”, 158쪽: “섹스”). 서로 항복하고 둘 다 보관하기로 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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