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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ㅣ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열림원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의 : 김운하의 <언더그라운더>가 검색이 안 되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하루끼의 비슷한 이름을 빌렸습니다. 상품명이 등록되지 않으면 리뷰 등록이 아예 안 되도록 되어 있군요. 하루끼 리뷰를 검색하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언더그라운드는 오버그라운드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오버그라운드가 빛, 지상, 양지, 전통, 규범, 긍정, 속박으로 표현된다면 언더그라운드는 어둠, 지하, 음지, 급진, 반체제, 부정, 자유로 표현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문화적 양식의 한 갈래이지만 전통적인 문화 형식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비상업적, 실험적, 전위적 방법을 표방한다.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탓에 음지로, 지하로 숨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아방가르드 영화인 장 콕도의 <시인의 피>가 영화관에서 상영된 것을 시발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재조명의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1940년대 미국에서는 아방가르드 영화 전문관이 설립되었고 최근에는 비디오아트와 결합하는 실험적인 영화 제작이 비교적 활발해졌다.
또한 기존의 작곡 양식을 완전히 뒤엎는 우연의 음악(우연의 음악이 차용한 탈개념의 음악적 방법에 대해서는 폴오스터의 ‘우연의 음악’ 감상문을 참조하시라)과 케이지 음악, 전자 음악 등이 탄생하고, 인간의 내적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재구성하는 실험적 양식의 퍼포먼스 등이 미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주받은 시인이자 악마주의로 치부되었던 랭보, 로트레아몽, 위스망스, 말라르메 등 20세기 문학의 ‘전위의 원류’였던 작가들이 최근에는 상징주의 작가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들이 예술로 인정받는 것은 예술사에 있어 극히 미미한 위치를 점유하는 것으로 그들이 오버그라운드로 나오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과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운하는 이러한 외면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예술의 아방가르드 현상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킨다. 인간과 신, 문학, 예술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사회적으로 언더그라운드에 속한 인물(전위적 예술가, 창녀, 동성애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부각시킨다. 일전에 김운하의 <137개의 미로카드>를 꽤 참신하게 읽은 기억도 있고, 책벌레 친구가 <언더그라운더>에 대해 슬쩍 운을 띄운 적도 있고 해서 꽤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대체로 좋았지만 가뜩이나 무거운 소재를 무거운 문체와 상황을 통해 이해하려니 버겁기도 했다. 또 <137개의 미로카드>에서도 그랬지만 이 소설에서도 김운하의 어깨에 들어간 힘 때문에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인문적 지식의 넓이와 깊이를 말하는 것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지적 유희와 현학의 힘을 소설 속에서 잘 버무려낸 최근의 작가는 스위스산 알랭 드 보통이다. 그는 깔끔한 단문과 치고 빠지기식의 민첩함과 경쾌함으로 진지함의 무게를 던다. 독자로 하여금 요람 속의 아이처럼 달콤하게 흔들리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다. 하지만 김운하는 진지함과 무게를 너무도 정직하게 그린다. 잠시 침묵하며 그의 고뇌에 동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지속시키는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설은 ‘언더그라운드’라는 잡지에 속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창녀와 카페 주인인 이혼녀를 등장시킨다.
나 - 언더그라운드의 편집자이자 소설가이다. 전통적 양식에 반하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집필 중이나 별 진척이 없다. 나도 사는데 네가 왜 죽어? 라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자신을 무기력증에 빠진 음울한 인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불분명함으로해서 읽는 이(나)로 하여금 약간의 조롱을 어쩔 수 없도록 만든다.
민재 - ‘나’의 애인이자 진화라는 여성의 애인이기도 한 철학도. 둘 사이를 오가며 육체를 즐기지만 사랑은 주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법처럼 그녀의 삶도 어느 한곳에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형민 - 나이를 먹고도 동정을 버리지 못한 사내. 어릴 때 목격한 고모부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허무함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그가 찍는 사진은 이 사회가 수용할 범위를 넘어선 전위적 형태의 것들이다. 창녀에게 동정을 바치고 순애보에 빠진다.
진화 - 민재의 애인, 동성애자이고 페미니스트다. ‘언더그라운더’에 동성애자의 삶을 다룬 특집 기사를 싣는데 앞장선다. 잡지가 나간 후 ‘포르노 잡지’라는 험악한 질타의 수렁에 빠진 언더그라운더를 구할 요량으로 인터뷰를 자청, 커밍아웃한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나약한 여자로 페미니스트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범수 - ‘언더그라운더’의 편집자이자 창업주.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만 아버지의 지병으로 인해 결혼과 가계 계승의 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별다른 고통 없이 사회적 관습과 주류에 편승한다.
강현 - ‘언더그라운더’의 편집장. 언더그라운더에 속한 인물 중 가장 열정적이며 언더그라운더의 미래를 가장 많이 걱정한다. 언더그라운더의 사활이 그의 사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슬픈 인물. 대학 때의 재기발랄함이 사회에 속박된 후부터 빛을 잃는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화이트 칼러를 대변하는 듯.
블루 마담 - 이혼녀이자 카페 블루의 사장. 언더그라운더의 비공식 자문 역할을 담당하며 그곳의 남자들 모두와 성관계를 갖는다. 육체적 쾌락으로 자신의 불행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루카치는 아방가르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견지한다. 고독은 인간이 처한 사회적 환경이나 개인적 특성에 기인하므로 개인의 고독은 특수한 사회 현상일 뿐인데, 아방가르드 존재론은 인간의 고독과 그것에서 파생된 불안의식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규정짓고 고독을 보편화 시킴으로 해서 고독이 인간의 관계 맺음에 부정적 역할을 담당하고 인간 고립을 생산하여 탈사회화를 가속시키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아도르노의 이론은 이와 상치한다. 고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물질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에 극명하게 항거하는 하나의 양식이며 그것이 내재한 힘이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는 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라 반박한다.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공방을 김운하의 <언더그라운더>에 대입시켜 보는 것은 재미있다. ‘언더그라운더’ 인물들은 아도르노의 편에 서서 썩어빠진 사회, 정통성을 고수하는 예술이 지닌 기득권과 나태에 도전한다. 그들은 고독의 항문까지 핥다 온 인물들이고 서로에게 위안을 구하지 않으며 반성없이 돌아가는 사회에 진력이 나 있다. 이들이 예술과 철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흐르지 않아 악취나는 사회에 항거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반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들은 악마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진보적, 반체제적 성향과 자유로운 행동양식은 꾸준히 누려온 자신들(극소수인)의 평화를 겁탈하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은 결국 탄압의 욕망을 자극한다. 결국 ‘언더그라운더’는 보수세력의 금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운 해체의 양식은 결국 ‘언더그라운더’들을 해체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만 것이다.
앗, 이 감상문으로 인해 <언더그라운더>가 딱딱하고 하품나고 잘난 척만 하는 소설이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요즘 활개치는 허랑방탕한 몇몇 소설들과는 비교할 바 아니다. 재미있고 진지하고 야!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왜 감상문을 이 따위로 썼느냐고? 내 맘! 헥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