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이 숙제와 도시락 반찬 




 




십육절지 빡빡이 숙제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지방 여고 전교 일등이었지

친구들 숙제도 다 해 주고 도시락 반찬을 얻어 먹었다

왜냐하면 결식 청소년이었으니까 


전지를 네 번 접어 십육절지를 만들듯

24시간을, 365일을 곱게 접어 쓰고 또 쓰고 

앞만 보고 달렸다, 어차피 나는 앞날이 창창한 꿈나무


인생이란 분모를 알 수 없는 시간 덩어리고 

죽음이란 연습이 불가능한 사건, 아니,

세상에 연습 가능한 사건도 있던가요?


갱지에 빡빡하게 들어찬 알파벳 조합과 

루트와 시그마와 로그와 탄젠트와 과연,

무한대로 이어지는 루틴, 그리고 친구들의

소시지와 불고기 반찬과 따뜻한 국과 찌개 


판에 박힌 빡빡한 일상과 도시락은

악무한이 아니라 선무한이었고

구속이 아니라 자유, 시스템 속 자유였으며

그곳에도 엄연히 여백의 미는 존재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잖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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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서정






온다던 태풍 대신 가을이 성큼 내려온 날

나는 미꾸라지 빠진 고등어 추어탕을 끓이고 

긴급 휴교를 선사받은 아이는 올림과 버림과 반올림을 복습한다


지금껏 내가 봐 온 세상은 얼마나 맑고 깨끗했던가!

지금껏 내가 읽어온 글자들은 얼마나 반듯했던가! 

청승맞도록 흐려지는 시야를 달래던 손가락이 

지적인 척 싸늘한 꿀밤을 날린다, 이는 너만 먹니?


교정의 산사나무는 수줍은 흰 꽃 자리에 야무진 빨간 열매를 맺었나니

가을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겨울은 숫제 의기소침을 선사할 테니

수의 범위를 아는 만큼이나 어림짐작이 중요하다 


참고로, 추어와 가을은 아무 상관이 없고

나는 라벤더 닮은 꽃을 피울 방아풀의 잎사귀가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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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의 쓸모 






8월말, 첫 가을비를 맞으며

네덜란드산 관목 더미 위에 앉아 있는

빨간 눈의 노랗고 예쁘장한 똥파리를 본다  


어제는 뜨거운 자줏빛 에키놉스,

오늘은 촉촉한 연초록 목수국, 

내일은 연보랏빛 샐비어 깨꽃, 

나는 똥파리의 역사적 궤적을 안다


갑자기 말라깽이 꺽다리 아주머니가 

뽀얀 분가루와 기도를 뿌려주신다


"예수님 믿으세요!"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길바닥에서 식사 중이던 비둘기 떼가 후루룩, 

전봇대 전신줄에 앉아 있던 참새 떼도 후루룩,

똥파리도 총천연색 뿌리며 웽, 히치콕의 한장면이

관악구 땅에서 재현되고 성수가 흩뿌려진다


"예수님 믿으세요!"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습니다!" 


똥파리, 아니, 연두 금파리는 애플망고 농장으로 

갔을 것이고, 오늘의 식사도 역사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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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타연, 알고리즘: 초록 찬미 







오늘의 초록은 어제의 초록이 아니다, 그보다 더 초록이다 

어제의 풀이 오늘은 부쩍 자라 어제의 나무를 덮다

오늘의 나무도 가지 끝에 연초록 잎을 틔워 내일의 나무가 되리라


고독은 접속으로부터의 자유다 

은둔은 나와의, 세계와의 접속이다 

자유와 은둔, 상상과 파상, 

희망과 절망, 중력과 은총, 

자연과 타연, 그리고 

알고리즘의 태연스러움이여!  


'남루함'과 '비루함'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며 

봄의 신록에 노안을 비비고 여름의 녹음에 노안을 적신다

이제는 검색은 그만, 탐색과 사색에, 아니,

정신 줄과 넋 놓기에, 멍 때리기에 전념할 때


거미와 돼지는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초록 풀밭에서 영영 만나다, 엉성한 거미줄에 

영영 얽히는 돼지발과 거미다리, 운명이어라  


풀의 저 갸륵한 초록이여, 아모르 파티,

인생은 아름답고, 자연과 타연, 그리고

알고리즘은 사심 가득 의뭉스럽기 짝이 없노라! 




//


김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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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룩한 식사 시간  








1. 애벌레, 먹다 죽다 



달콤한 꽃잎 만찬을 끝내고  

먹이 사냥을 가던 중 공중으로 

붕 뜨더니 찍! 한편,그리하여 

문자 그대로 벌레 먹은 꽃은, 



2. 리시안셔스, 관통당하다 


농장에서 허리째 잘려와 꽃시장에 전시되었다가

꽃집 양동이에 꽂혀 있다가 아픈 아이의 집 꽃병에서  

살기를, 죽기를 기다리는 나, 언제 알을 깠을까? 

내 몸 깊숙한 곳을 갉아먹은 저 짐승은

내 몸을 뚫고 우리 언니 몸 속으로 들어간다



3. 인간, 내 손에 코 묻히긴 싫어  


신나게 식사 중인 애벌레를 발견하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너는 개가 아니니, 베란다 밖으로 휙!



4. 양구의 추억 


배춧잎 갉아 먹는 큼직한 송충이를 

농부 아빠가 붙잡아 고속도로 한복판으로 휙,

이런 해충은 차에 깔려 죽어야 해!

아빠는 잔인하고 애벌레는 징그럽고 

어린 나의 마음은 꿈틀꿈틀, 심란했노라!



5. 똥파리의 쓸모 


꿀벌이 꽃가루 디저트를 뿌려주는 여름 

오늘 샐비어 깨꽃 위에 앉은 건 똥파리, 아니 

노르스름한 윤기 나는 예쁘장한 연두 금파리, 

애플망고 수정은 저밖에 못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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