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키릴로프의 혁명: 신인-그리스도? 인신?

 

키릴로프에 관한 한 작가는 관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필수적인 속성, 즉 생물학적, 사회적 속성을 최소화한다. 가령, 샤토프와 같은 스물예닐곱이라는 나이는 깡그리 잊힐 만큼 무의미하고 건축기사라는 직업은 스체판의 유쾌한 농담대로(상권, 151) 그의 사상에 대한 아이러니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자살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지만 쉬갈료프의 노트만도 못한, 그저 소문일 따름이다. 섭생도 엉망이어서,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동틀 녘에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작가 특유의 유물론에 기대자면 이런 무위 상태, 황폐한 생활 방식이야말로 가히 관념인의 탄생을 위한 질 좋은 토양인 셈인데, 간질병도 유전적 요인과 이런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간단히, 키릴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백수들 중 단연코 으뜸일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나아가 관념을 위해 창조된 종이 인간’(샤토프의 말: 상권, 216, 219),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온 인간’(<지하로부터의 수기>, 5: 104)으로 창조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그는 <악령>이라는 극히 속된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심문관만큼이나 환상적인 층위에서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환상은 흔히 통용되는 장르가 아니라 인물의 내적 운동성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장르로서 삼차원적인 시공간을 초월한 간질발작의 찰나적 황홀경, 혹은 정지됨으로써 영원히 확장되는 시간(237분에 고정된 키릴로프의 시계바늘: 상권, 370)처럼 관념의 영역에 속한다. 키릴로프는 바위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공포(=죽음=), 즉 각종 관념의 극복을 꿈꾸지만 그것도 결국엔 또 다른 관념(인신)을 현실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키릴로프의 인신사상은 니힐리즘(특히 богоборчество’)의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표트르의 정치론과 유사할 수 있다. 하지만 표트르가 외부 세계를 향한 공격성을 과시하는 반면(정치), 키릴로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한다(신화). 샤토프는 이를 광기로 치부하며 동정하지만, 키릴로프라는 인물만 놓고 보면 그는 오히려 관념인간의 변증법이 가장 조화롭게 발현된 예이며 심지어 그것의 육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신 되기프로젝트는 그리스도 되기프로젝트의 변형이며 이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심지어 과거의 샤토프보다도 더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자, 이른바 가짜 메시아이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양가적인 이 콤플렉스가 설득력을, 또 미학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조건이 바로 인물의 도덕적인 완성도, 그리고 믿음의 깊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스타브로긴이 미남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것처럼, 또 샤토프가 추남에 불쌍한 농노여야 하는 것처럼, 또 표트르가 영리하되 치사한 행동분자여야 하는 것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어야 한다. 작가가 키릴로프를 거의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상이자 조용한 돈 키호테, 우스꽝스러운 백치-광인의 모습에 가깝게 창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잎사귀에 대한 사랑, ‘좋음에 대한 믿음은 그가 신인(богочеловек)이든 인신(человекобог)이든 그냥 광인이든 하여간 비루한 인간들이 난무하는 <악령>의 텍스트에서 신의 유비로서의 인간의 원형에 가장 근접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최근에 푸른빛이 약간 남아 있는 노란 잎을 보았습니다. 잎사귀 끝이 좀 시들었더군요. 바람에 날려 온 것이었지요. 열 살이 되던 해 겨울,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잎사귀를 그려보곤 했지요, 잎맥이 반짝거리는 푸른 잎사귀를. 그리고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요.”

그건 무슨 알레고리인가요?”

-아니오. 아니, 왜요? 나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그저 잎사귀를, 잎사귀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잎사귀는 좋아요. 모든 것이 좋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오직 그 때문이지요.()”(상권, 369)

모든 사람들이 좋다는 걸 가르치는 사람, 바로 그가 세상을 끝낼 겁니다.”

그렇게 가르쳤던 사람, 바로 그를 못 박았죠.”

그가 올 겁니다, 그의 이름은 인신(人神)입니다.“

신인(神人)이라고요?”

인신지요, 바로 그게 다른 점입니다.”(상권, 371)

 

키릴로프의 실제 삶도 그의 원칙과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는 좋음을 시시각각 느끼기에, 자살(죽음)에 탐닉하는 만큼이나 삶을 사랑하고 즐긴다. 가령, 죽을 날을 세는 낙으로 살면서 동시에 등뼈를 튼튼하게 하려고 매일 공놀이와 맨손체조를 하고 옆집의 갓난아이도 무척 귀여워한다. 정상적인 언어 구사 능력도 결여되어 있을 만큼 고립되어 있지만, 누가 오든 좀처럼 동요하지 않으며 상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준다.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는 것도 구태여 자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 관념은 절대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가 관념을 먹어치웠든 관념이 그를 먹어치웠든, 어쨌거나 진정한 니힐리스트는 니힐-를 꿈꾸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매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키릴로프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미묘한 역설이야말로 훗날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를 매혹시킨 핵심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은, 비루한 현실과 각종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악령> 원고 중.)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키릴로프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욕망을 잔혹하게 단죄한다. 최후의 순간을 충실한 사도가 아니라 원숭이표트르와 함께 하게 한 것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장치일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표트르와의 장황한 대화, 심지어 고골 풍의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육체적인 드잡이에서 키릴로프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작태이다. 대체로 그의 자살은 그가 평온한 오만함을 자랑하며 꿈꾼 것과는 달리, 또한 독자들이 속편하게 환상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절대로 원칙의 실현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다변을 과시하며 자꾸만 자살의 실행을 연기하는데, 이는 그저 목숨에 대한 집착의 표현일 따름이다. 표트르는 그의 독실함(“신부보다 더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요”: 하권, 955)은 물론이거니와 이 생존 본능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옳았다.

 

물론, 표트르의 짜증스러운 체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키릴로프는 기필코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유예 끝에 행해진 자살은 강조하건대, ‘관념의 거국적이고 비장한 실행이 아니라 마지못해, 차마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거의 면피용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자살만을 외쳐왔고 이미 증인한테 유서까지 넘겨놓은 상태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유서에 그려 넣고 싶어 한 혀를 쑥 빼고 낯짝을 높이 쳐든 그림”(하권, 958)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인신을 꿈꾸었던 자로서 이만한 창피와 낭패도 없을 것이다. 표트르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자살을 전후한 장면을 보자.

 

창문 맞은편 벽 쪽, 즉 문의 오른쪽에 장롱이 있었다. 이 장롱의 오른쪽으로, 벽과 장롱에 의해 형성된 틈새에 키릴로프가 서 있었는데, 그것도 끔찍할 정도로 이상하게, 즉 두 팔을 바지솔기를 따라 늘어뜨리고 온 몸을 쫙 편 채, 머리를 치켜 올려 목덜미를 틈새 바로 안쪽 벽에 바싹 붙이고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는데, 마치 기가 팍 죽어서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 [표트르]가 키릴로프를 건드리기가 무섭게, 상대편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고 그 바람에 머리로 그의 손에서 양초를 떨어뜨려 버렸다. 촛대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졌고 촛불은 꺼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손가락을 빼낸 뒤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으며 쏜살같이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는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열 번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렸고, 이미 현관까지 달려 나왔을 때 갑자기 커다란 총성이 들렸다. 그 순간, 그는 현관의 어둠 속에서 정지한 채로 5분 정도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통풍구가 활짝 열린 창문 곁에, 두 발을 방의 오른쪽 구석으로 향한 채 키릴로프의 시체가 뻗어 있었다. 우측 관자놀이를 맞은 것이었고 총알은 두개골을 박살내고 좌측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피와 뇌수가 거품처럼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권총은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자살자의 손 안에 남겨져 있었다.(하권, 963-966)

 

자살이 완료되는 순간, ‘살아 있는 삶’(живая жизнь)관념을 결정적으로 배반한다. 이 배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관념인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 선량한 관념인을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키릴로프는 자살을 통해 최초의 인신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됐으며, 이로써 그의 관념이 생명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존재케 했던 삶-생명이 뇌수와 피로, 유물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잔해로 환원돼 버렸다. 말하자면 얻은 것은 관념의 육화는커녕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은 삶 자체였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야밤의 홍차와 몽상을 즐기지 못하며 그가 그토록 아꼈던 햇볕 아래 푸른 잎사귀를, 또한 갓난아이가 자라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이런 희생을 대가로, 비록 기만적일지언정, 성스러움을 얻지도 못하고 표트르의 야비한 음모에 일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관념이 삼차원적 시공간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이 불협화음과 균열이야말로 낭만적 거짓위에 우뚝 선 소설적 진실의 진면목일 것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 ‘신인-그리스도인신-가짜 메시아도 아닌, 그저 그것을 향한 몽상을 먹고 살았던 한 인간키릴로프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키릴로프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에서도 [악령]을, 특히 키릴로프를 유달리 좋아했던, 그에게 그야말로 푹 빠졌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 샤토프와 키릴로프에 관해서는 <홀림에 관하여>(현대문학, 2007, 6월호)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 한 편을 쓴 적도 있습니다. 소설 텍스트에서 언급만 되고 묘사는 안 되는, 둘의 아메리카 동거 시절을 소설로 써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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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 2021-07-2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번역본으로 악령을 재밌게 읽고 이 글도 재미있게 본 독자입니다. 혹시 마지막 부분에 올리신 키릴로프와 표트르의 사진은 어디에서 가져오신건지, 그리고 영상을 혹시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갑작스럽게 댓글로 부탁을 드려 결례를 끼친 점 죄송합니다!
 

3. 탈신화화와 새로운 신화의 창조

 

3-1. 샤토프의 혁명: 과연 토끼는 어디에?

 

샤토프의 사상적 편력은 그 나름의 자족성을 가지며 게르첸이 그를 위해 써주었다는 빛나는 인물(Светлая личность)의 신빙성 여부와는 별개로 젊은 혁명가로서의 그의 위상 역시 명백하다. 그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라나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박애, 평등,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민중은 바로 이 대학생을 기다려왔던 것이다(상권, 542-543). 여러 인물의 말도 증언해주듯 과거의샤토프는 민중을 등에 업고 경배할 누구를 찾아 헤맸던, 심지어 그 스스로 그 누구가 되고자 했던 메시아-혁명가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메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광인으로 탈바꿈한다.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정체성은, 그러나,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표트르처럼 샤토프도 스타브로긴을 누구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 다만, 끊임없이 현실 정치의 맥락을 강조하는 표트르와는 달리, 그는 시공간적 초월성에 사로잡힌다. 더불어 이미 그 누구의 지위에 서길 포기하고 스타브로긴을 매개로 끊임없이 그 누구를 갈망하는데, 이 경우 믿음은 정녕 실재가 아니라 의지와 욕망의 대상, 토끼이다.

 

샤토프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표독스럽게 웃었다. “‘토끼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가 필요하다.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말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뒷발을 잡아서 토끼를 손에 넣으려 했던 노즈드료프처럼 말하곤 했다더군요.”

아니죠, 노즈드료프는 벌써 토끼를 잡았다며 우쭐거렸었죠. 내친 김에 괜찮다면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해도 될지.() 당신의 그 토끼는 잡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달아나고 있습니까?”

감히 나한테 그런 말로 묻지 마시오, 다른 말로, 다른 말로 물어보란 말입니다!” 샤토프가 갑자기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하죠!”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그를 준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오직 이걸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닙니까?”

나는 러시아를 믿고 나는 러시아의 정교를 믿고나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믿고나는 새로운 재림이 러시아에서 일어날 것을 믿고나는 또샤토프는 거의 광적인 흥분에 들떠서 더듬거렸다.

그럼 신은? 신은 말입니다?”

나는나는 신을 믿게 될 겁니다.”(상권, 393)

 

샤토프의 슬라브주의 및 메시아주의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현, 더욱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 광증의 징후에 가깝다. 심지어 조차도 믿음의 확고한 대상이 아니라 그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애처로운 신기루’, 즉 관념일 따름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적, 전기적 편력을 상당 부분 샤토프에게 투사했지만 그를 영원히 거대한 회의의 도가니에서 헤매게 할 뿐 호산나를 선사하지는 못한 것이다. 실상 혁명의 관념신의 관념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질의 변화는 전혀 다른 차원, 관념의 대립 쌍으로서의 속에서, 관념인이 아닌 그저 한 인간샤토프에게서 일어난다.

 

메시아-혁명가 샤토프와 메시아주의자 샤토프 사이에는 어떻든 환멸과 그로 인한 전향의 운동성이 들어 있다. 과연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스체판이 암시하듯(상권, 149) 그의 아내 마리(Marie)와 스타브로긴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체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 집안의 농노로서 농노해방과 더불어 자유인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집안에 예속돼 있다. 이러한 물리적 주종 관계는 관념적 층위의 논의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다. 감히 주인나리의 뺨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통렬한 아이러니를 담아 노동을 통해 신을 얻어라”, “부를 버려라”(상권, 398)라고 촉구한들, 신분-계급의 장벽은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다. 마리의 임신 및 출산은 분신(하인)이 원상-영웅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희생제의의 메타포로까지 읽힌다. 그로 인해 샤토프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관념의 여러 가능성이 초래하는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 진정한 구원이란 그리스도가 러시아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의 품으로 돌아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일일 것이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대한 그의 경탄(“두 인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째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완전무결한 새로운 정신이 생겨난 겁니다.” 하권, 916-917)은 곧 작가의 차원의 발언으로 환원해도 무방할 것이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임종 시의 도...키: 은근한 미소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느닷없이 도래한 유토피아는 역시나 느닷없이 닥친 파국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된다. 샤토프의 죽음 자체가 비극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악령>의 구성상 그는 스타브로긴의 분신으로서 불가피하게 마이너스 가치를 지녀야 했다. 가령, 스타브로긴이 절세 미남’(неописаный красавец)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만큼이나 샤토프는 추남에 농노여야 한다. 소설 텍스트에서 유달리 강조되는바, 작은 키에 짜부라진 듯 땅딸막한 몸집, 지나치게 넓은 어깨와 못생긴 얼굴, 어설픈 행동거지 등 작가는 샤토프를 통해 자신의 외모를 희극적으로 과장해놓았다.

 

문제는 그의 용모가 환멸을 느낀 메시아-혁명가(주인공-영웅)의 정체성에 부합하지도 않거니와 동정이라면 모를까 어떤 카리스마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덧붙여 작가는 샤토프를 성스러움이 거세된 무의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애절한 휴먼드라마라면 모를까 숭고한 비극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말하자면 혁명’(‘관념’)도 죽고, ‘인간도 죽은 것이다.

 

 

 

 

어떤 공연에서는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배우가 샤토프 역을 맡은 모양인데요, 샤토프의 핵심은 (이 역시 지라르도 대략 지적했던 듯한데) 그가 추남이라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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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1983, 미송 양은 여덟 살이었다. 미송 양의 아빠는 농산물공판장에서 일했다. 집과 공판장 사이에는 무척 넓은 시장과 무척 큰 공원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미송 양은 아빠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이 일이 미송 양은 참 좋았다. 동네 밖을 벗어날 수 있는,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송 양의 가족은 마당이 넓은 집에 혹처럼 붙어 있는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주인집은 방이 세 칸이나 되었는데, 주인아줌마와 영신이 언니 단 둘만 살았다. 주인아저씨는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다고 했다. 미송 양은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덩치가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과 목에 수염이 잔뜩 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집채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일에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먼 바다를 가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빠의 도시락을 들고 살가운 봄바람을 맞으면서 시장을 가로질러, 또 공원을 에둘러 공판장에 가는 것과 비슷할까.

 

언니, 아빠 따라 바다에 나가본 적 있어?”

언니는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미송 양은 실망했다. 바다라는 곳은 공판장과는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에이, 언니 따라 멀리, 멀리 나가보고 싶었는데.”

이 말에 영신이 언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교회에 가볼래? 거기도 무척 멀거든.”

정말? 얼마나 먼데?”

버스 타고 한참 가서 또 한참 걸어야 되지.”

우아!”

미송 양은 어서 빨리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일요일 아침, 미송 양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어깨 끈이 달린 주름치마를 입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말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도 신었다. 영신이 언니와 함께 289종점까지 가는 내내 미송 양은 달떠 있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낯선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미송 양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울긋불긋한 간판들의 행렬도 끝이 없었고, 거리를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무리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미송 양은 커다란 눈 안에 집어넣겠다는 듯, 작은 머릿속에 아로새기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뜯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미송 양은 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 위에 섰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 저도 모르게 영신이 언니의 손을 꼭 잡게 됐다. 모든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또 너무 많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은 미송 양의 집 마당의 서너 배는 족히 돼 보였다. 건물도 무척 높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미송 양을 교회 안, 2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초등반 예배실 앞에서 미송 양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네가 더 빨리 끝날 거야. 어디 가지 말고 등나무 밑에 얌전히 앉아 있어. 알겠지?”

미송 양은 영신이 언니를 올려다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언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의 말은 길고도 길었다. 설교와 기도와 찬송가 사이로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꾸지람을 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웃겨 더 많이 웃어댔다. 미송 양은 이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그랬기에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 떠들고 웃을 친구가 없는 미송 양은 심심하다 못해 외로워졌다. 미송 양에게 필요한 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3층에 있는 것이 확실한 영신이 언니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미송 양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등나무 아래, 벤치 주변은 낯선 사람들로 북적댔다. 당연히, 영신이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미송 양은 언니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집에 가고 싶어졌고, 그 바람이 커지자 오줌이 마려웠다. 미송 양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1층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어둡고 길었다. 간신히 화장실을 찾아낸 뒤에는 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미송 양은 3층으로 올라갔다. 중등반 예배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말꼬리처럼 묶어 올린 머리채가 통째로 위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미송 양은 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아줌마에게 물었다.

저어기요, 중학생 언니들 벌써 끝났어요?”

방금 끝났는데, ?”

미송 양은 황급히 고맙다는 말을 하고선 다시 등나무 벤치로 달려갔다.

 

등나무 주변의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이번에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가 자기를 버렸든, 길이 어긋났든 어쨌거나 이제는 혼자 힘으로 집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7년을 간신히 넘긴 미송 양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다.

 

*

 

홀로 걷는 낯선 길은 어딘가 서늘했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쌀쌀해지고 세상의 색깔이 약간 흐릿해진 까닭인지도 몰랐다. 미송 양은 앞만 보고 걸었다. 오직 ‘289’라는 숫자만이 미송 양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교차로가 나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도 가도 길은 낯설기만 했고, 또 동시에, 가도 가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바다 위를 헤매는 선원 아저씨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그만 미송 양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여동생과 실잣기 놀이를 할 때처럼 그 생각들을 순서대로 붙잡아 예쁜 모양으로 엮어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 실잣기 놀이처럼 도무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미송 양의 눈앞에는 초록색 버스들로 뒤덮인 새카만 아스팔트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미송 양이 감당해야 할 인생은 실로 길고 험난한 것이었다. 아스팔트길은 찾았지만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른쪽 왼쪽 모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난감했다.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사정없이 아려왔다. 미송 양은 계속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달려오는 버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미송 양이 몇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버스는 이내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미송 양은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절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미송 양의 맞은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무척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은 물론 목덜미까지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꼭 상상 속의 선원 아저씨 같았다.

 

미송 양은 그에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289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289? 아니, 어린애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영신이 언니 아빠가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는데요, 나도 멀리 나가보고 싶어서 영신이 언니 손잡고 교회에 왔는데요, 우리 집은 289종점이구요

다 좋은데, 그 영신이 언니는 어디 있어?”

 

오랜 고독과 불안에서 해방된 미송 양은 울먹이며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미송 양의 손을 잡았다. 엄마와 아빠가 늘 조심하라고 했던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는 낯선 길은 뜻밖에도 어딘가 따사롭고 포근한 구석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저씨는 미송 양을 안아 올려 버스에 태워주었고 버스 운전수에게 동전 하나를 건넸다.

애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종점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그러곤 미송 양을 쳐다보았다.

종점까지만 가면 혼자서 찾아갈 수 있겠지?”

!”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미송 양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깼을 때 버스는 이미 종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미송 양은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남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동생과 함께 대문 밖을 초조하게 오가고 있었다. 영신이 언니는 그 옆에 힘없이 서 있었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 막 경찰서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그 먼 길을 혼자 어떻게 찾아왔을까!”

 

미송 양은 굶주린 배를 채운 뒤에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제야 중대한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어떡하지, 엄마?”

미송 양은 속이 상해,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옆에서 미송 양의 치마를 개고 있었는데, 호주머니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절묘한 화음을 내며 앞을 다투어 떨어졌다.

! 차비도 있었구나! 그 아저씨 만나면 꼭 고마웠다고 말하고 오십 원, 아니 백 원 다 줘야지!”

 

하지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05/ <서울대동창회보> 20106월 제 387

 

 

--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

고전적인 형식의 성장소설-가족소설의 초고를 잡아놓은 터에, 정확히 그 초고를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터에 콩트 청탁이 들어왔고, 그 버리기로 결심한 초고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건져냈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말들을 많이 버려야 했다. 그 당시에는 좀 아까웠지만 지금 보니 지금의 크기가 딱 제격인 것 같다. '미송'이란 이름은 2010년 2월에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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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혁명가의 신화 -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중략)

표트르의 바쿠닌식 무정부주의는 그 시작(파괴)과 끝(건설)에 있어서 쉬갈료프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인물 자체도 그 출발점에 있어서는 명실상부한 혁명가, 또 스타브로긴이 붙여준 별명대로 열광자’(эн- тузиаст: 상권, 379)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물리적 운동성과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수완을 부여받았으며 원칙과 이론도 갖추고 있다.

 

 

스타브로긴, 당신은 미남입니다!() 당신은 끔찍한 귀족이에요. 귀족이 민주주의에 투신한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당신은 선구자고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당신의 버러지에 불과하단 말입니다.”(하권, 646)

쉬갈료프 같은 작자는 정말 많기도 많죠! 그러나 한 사람, 러시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첫걸음을 얻어냈고, 첫걸음을 어떻게 내디딜지를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요.() 당신이 없으면 난 제로, 당신이 없으면 난 파리이고, 유리병 속에 든 이념이고, 아메리카 없는 콜럼버스입니다.”(하권, 647)

우리는 소리 높여 파괴를 외칠 겁니다.() 우리는 방화를 만연시킬 겁니다. 우리는 전설을 퍼뜨릴 겁니다.() 어쨌거나 혼돈이 시작될 겁니다! 이 세계에서 아직 본 적도 없는 그런 동요가 시작될 겁니다.”(하권, 650.)

당신은 신처럼 오만한 미남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희생양의 후광에 둘러싸인 <숨겨진> 존재입니다. 중요한 건 전설을 퍼뜨리는 것! 당신은 그들을 압도할 겁니다,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할 겁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 석조건물을 건설할 것인가를 생각할 겁니다. 처음으로! 건설하는 건 우리입니다, 우리, 오직 우리뿐이죠!”(하권, 652)

(중략)

표트르는 애당초 대심문관과 같은 환상 텍스트가 아니라 현실 텍스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천년왕국,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 내걸어야 할 역시 관념이 아니라 실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상의 신이 계속 뻗대며 말을 듣지 않는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욕망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공통의 피-죗값(샤토프 살해)으로 민중(5인조)을 올가미처럼 묶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신화적 희생제의의 현실적,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 ‘성스러움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하고 또한 역설적이고 순환적으로 그 폭력을 통해 성스러움의 가치를 획득하는데, 이 경우 희생양은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식의 실현 과정은, ‘속화혹은 이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밖에 없는바, 시종일관 웃음으로 점철돼 있다. 5인조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주저와 불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표트르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부도덕성, 아니 무도덕성 때문에 혁명과 혁명가의 신화는 야비한 정치협잡과 치졸한 복수극으로 변모된다. 특히, 원칙의 실현이 되어야 할 혁명에 개인적인감정, 표트르 자신의 원한을 개입시킴으로써 탈신화화 작업, 웃음은 극에 달한다.

 

 

실상 표트르가 하필이면 샤토프를 지목한 것에는 신화적 제의의 정치적 실현과는 무관한, 보다 치명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키릴로프의 폭로대로(하권, 946) 샤토프가 제네바에서 자기 뺨에 침을 뱉었던 일을, 그 모욕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표트르가 자신의 원형인 네차예프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제 손으로 샤토프에게 총을 쏘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수장하는 일도 직접 한다. 이 장면 속의 표트르는 이반 왕자-을 찾아 헤매던 혁명가도, 열광자도 아닌 치사하고 못된 살인자,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광대일 뿐이다. 광대의 손에 맡겨진 혁명 역시 카니발적 소동, 키릴로프의 말을 빌자면 악마의 보드빌’(дьяволов во- девиль: 하권, 956)일 뿐이다. 이로써 표트르는 그 자신의 고백대로 사회주의가 아닌 협잡꾼”(하권, 649)으로 판명되고, 그가 스타브로긴 앞에서 토로한 관념도 진정성이 결여된 광적인 요설로 전락한다.

 

물론 그는 어딜 가든 배신과 밀고를 일삼고 유령’ 5인조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출혈의 정도가 어느 소설보다도 더 심한 <악령>이기에, 그의 생존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키릴로프에게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를 동여맨 게 전부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텍스트에서는 가장 참혹한 죽음인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이는 각종 미명 하에 혼돈과 파괴를 일삼았던 어설픈 니힐리스트들에게 내린 작가 나름의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체적인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권력, 그리고 등에 업고자 한 민중의 실체는 어떠한가.

 

2-3. 권력의 횡포? 대중의 반역 

 

지방 권력의 대표 격인 신임 현지사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폰 렘브케는 좀처럼 유형화화기 힘든,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독일인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권력자에게는 걸맞지 않은, 다분히 자폐적이고 유아적인, 심지어 환상적인그의 성격(종이 접기, 소설 창작, 꽃 꺾기 등)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가 대체로 맥락을 결여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가령, 스체판을 좌익용공분자로 몰아 그의 집을 수색하고 물품을 차압한 것은 블룸의 개인적인 착오가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쉬피굴린 공장 사태 역시 오해로 점철돼 있다.

 

 

모자를 벗어라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 그는 예기치 못하게, 그 자신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째지는 소리를 질렀는데, 그 예기치 못함 속에 어쩌면 뒤이어 나타난 사건의 결말 자체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 “해적들!” 그는 훨씬 더 째지는 듯한, 훨씬 더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그의 목소리는 탁 끊기고 말았다.() / “맙소사!”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청년은 성호를 긋기 시작했고 서너 명은 정말로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 걸음 정도 앞으로 움직이더니, 갑자기 모두들 한꺼번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각하, 사십을 주기로 했는데관리인이네 놈은 찍소리도 하지 말라고 해서어쩌고저쩌고, 하여간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안드레이 안토노비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꽃다발은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질을 해라!”(하권, 684-685)

 

 

화자의 진술대로 그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장군 나리”(하권, 671)에게 직접 얘기를 해보려고 몰려든 선량한 시민이 경찰 당국 및 이미 정신 이상의 조짐까지 보이는 현지사의 의식 속에서 졸지에 해적혹은 폭도로 등극한다.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로맨스에서나 가능할 법한 역할 혼동’(qui pro quo) 내지는 자가당착이 실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뜻밖에도, 발랄하고 경쾌한 해피엔드가 아니라 처참한 유혈사태일 수 있음은 역사가 증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쉬피굴린 사태는 혁명에 대한 어떤 표상도 없는 질박한 개개인의 집합으로서의 민중과 얼빠진 권력의 우스꽝스러운 충돌에서 끝난다. 실상 희극이든 비극이든 플롯 생성의 원동력은 오해인바, 율리야 렘브케의 파국도 그녀의 허영심과 공명심,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는바, 오랜 세월 동안 미혼의 굴욕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의 산물이다. 어떤 경우든 렘브케 부처는 타도해야 할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동정해야줘야 할 중년부부일 따름이다.

 

 

표트르의 혁명에 동참한 5인조(럄신, 리푸친, 비르긴스키, 쉬갈료프, 톨카첸코), 레뱌드킨, 에르켈 역시도, 쉬갈료프를 예외로, 혁명의 신화를 통째로 뒤집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비르긴스키가 거사를 전후하여 수시로 내뱉은 말대로 이건 아니다!”(Не то!) 어쨌거나 표트르가 단시간에 결성한 어중이떠중이와 애송이 집단, 밀린 품삯을 받는 것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민중이 혁명의 주역이 된다. 여기에, 시대착오적인 자긍심과 옹졸한 불안 사이를 오가는, ‘진보 진영감상적 퇴물스체판 베르호벤스키와 허영에 들뜬, ‘온건파내지는 중도성향의 속물 작가 카르마지노프가 얼떨결에 합세한다. 저속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순간 스캔들을 갈망하는 익명의 군중들의 존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략)

 

 

전반적으로 <악령>이 문제 삼는 것은 니힐리즘이나 당시 러시아의 현실 정치가 아니라 정치-혁명의 논리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오류이다. ‘관념인간의 변증법은 너무도 복잡다단하여, 좀처럼 특정 이데올로기의 특정 실현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정공법을 택하여 정치-혁명의 과정을 그려냈지만, 동시에 그것과 맞닿은 또 다른 차원을 선보인다. ‘지상낙원, 참으로 역설인데,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면, 지상의 존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지상낙원은 결국 몽상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지만 또 진정으로 기만적인, 그렇기에 애처로운 혁명은 이제 <악령>의 두 광인의 정신 속에서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최근에 만든 티브이 시리즈 <악령>의 몇 장면들입니다. 저도 아직 다 못 봤는데요, 중간, 계단 옆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가 스타브로긴입니다. 완죤 마음에 안 들어요...ㅠ.ㅠ

 

 

 

 

 

 

 

좀 멋쩍지만, <악령>에서 나왔다고 할 수도 있는 제 소설도 떠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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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12-0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티브이 시리즈 <악령> 어디서 보신거죠?ㅠㅠ

푸른괭이 2013-12-02 10:29   좋아요 0 | URL
유투브 검색하면 어지간한 건 다 뜹니다. <악령> 옛날 버전과 최신 버전, <죄와 벌> 두 버전, <백치> 두 버전, <카라마조프> 최신 버전,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그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몽땅 다 보실 수 있습니다...^^;; 단, 자막이 없다는...ㅠ.ㅠ

; 2013-12-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검색제목을 뭐라고 쳐야되나요???
 

 

1.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의 입을 빌어 복음서의 이른바 그리스도의 유혹부분을 그 나름대로 해석한다. 실상 기적’, ‘신비’, ‘권위에의 유혹은 모두 에서 출발하여 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대심문관의 도발적인 물음이다.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пред кем прекло- ниться)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все вмес-те)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общность)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천상의 가치)의 대립항(지상의 가치)으로서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읽힌다. 대심문관의 해석에서도 빵은 물론, 일차적으론 지상적 욕구와 필요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문제는 보다 복잡하고 심오하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 더욱이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라는 요구 조건은 이미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서 관념론적인 차원을 건드린다. , 인간의 삶이 제대로 영위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물리적 욕구와 더불어 심리적, 정신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후자의 영역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명명하지만,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항아들은 그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천상이 아닌 지상의 세계에서 찾고자 한다. 이 욕망이 현실에서는 두 형식, 즉 종교(신화)와 정치(혁명)로 표현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요 소설들이 신과 인간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더불어 일관되게 정치와 혁명을 다루는 것, 적어도 그것을 배면에 깔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듯 빵 속에서 단순히 빵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찾으려는 욕망, 나아가 그 와중에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손에 넣고자 하는 인간의 대범하면서도 비굴한, 또한 오만하면서도 겸허한 욕망의 기저에는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이 문제를 소설적 틀에서 담아낸 작품이 곧 <악령>(1871-1872)이다.

 

 

 

 

 

 

 

 

 

 

 

 

 

 

<악령>은 그 자체로 신화(희랍신화)와 태생적으로 연결된 고대비극의 유비로 읽혀왔으며 뱌체슬라프 이바노프에 의해 소설-비극’(роман-траге-дия)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이 고전적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장편, 특히 <악령>비범한 인간’(신의 유비로서의 영웅)과 운명(стихия) 간의 비극적 투쟁 및 파국이라는 도식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바노프는 신화-비극의 부활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이 지닌 근대적 의미도 간과하지 않았다. , 근대의 장르로서 소설은 개인주의의 반영이 됨으로써 개인과 세계의 결별 내지는 분열을 전제로 하며 이 경우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것으로 바뀌고 파토스는 유머로 와해된다.”라는 것이다. <악령>의 이념적, 시학적 복잡성에 대한 이바노프의 예리한 통찰에서 출발하여 V. 테라스는 이 작품을 파토스와 바토스(bathos), 숭고와 그로테스크, 미와 추가 혼재하는 희화된 비극’(tragedy in travesty)으로 정의하고 주요 인물들의 범속하고 희극적인 요소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 두 독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일견 서로 상반될 수 있지만 동일한 발생학적 근원을 갖는 소설-비극희화된 비극사이의 긴장이다.(중략)

 

 

 

 

 

 

 

 

 

 

 

 

 

 

 

 

 

 

 

2. 혁명의 신화에 대한 탈신화화 전략 - ‘웃음

 

2-1. 니힐리즘 vs. ()니힐리즘

 

주지하다시피 <악령>은 발표 당시 급진적 정치세력을 겨냥한 정치팸플릿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집필 당시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이 작품은 명백히 네차예프 사건을 모델로 한 정치소설(선동소설, 참여소설, 경향소설)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악령>의 신화적 위상 때문에 작품 이해에 있어 모종의 전제 같은 것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강조하건대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 층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과 종교학의 층위로 이월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차원을 소설적 세계 속에서 동시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본질적으로 실패하거나 적어도 기형적인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M. 홀퀴스트의 분석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부분-개인과 전체의 관계(‘정치’)는 엄정한 체제(statecraft)를 요구하지만 현실적 균형감각을 상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체제를 빗겨나가며 무질서한 몽상(wild utopianism), 즉 엔트로피의 법칙에 종속된다. 정치(현실)와 신화(이상)의 척력적인 길항 관계에 기반한 만큼 <악령>은 총체적인 혼돈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극우-보수의 중년 작가가 일차적으로 탈신화화하고자 했던 대상의 이론적 진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략)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니힐리즘은 단순히 젊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의 과도한 불안과 혐오는 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경고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 심지어 참회의 산물이다. 임종을 앞둔 스체판 베르호벤스키의 장황한 신앙 고백은 작가적 차원의 발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생각이, une comparaison(한 가지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이건 꼭 우리 러시아와 같아요. 환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그 악령들, 이건 모두 독이고 전부 전염병이고 하나같이 불결한 것이고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환자, 즉 우리 러시아 속에서 수세기 동안, 수세기 동안 우글거렸던 온갖 마귀들과 마귀의 새끼들입니다! Oui, cette Russe, que j'amais toujours(그래요, 내가 언제나 사랑해왔던 그 러시아라고요). 그러나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는 그렇게 더 높은 곳에서부터, 이 광기 어린 마귀 같은 것 위로, 바로 러시아 위로 그늘을 드리울 테고, 그러면 이 모든 마귀들이, 온갖 불결함이, 표층에서 곪기 시작한 온갖 이 추잡한 것이 밖으로 나올 테고그놈들이 직접 나서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할 겁니다. 어쩌면 벌써 들어갔는지도 몰라요! 이건 우리들이고, 우리들은 바로 그들, 즉 페트루샤와et les autres avec lui(그 녀석과 함께 한 자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우두머리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완전히 무엇에 홀린 듯 광포하게 날뛰면서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할 겁니다, 모두 빠져 죽을 거예요. 바로 거기가 우리의 길이거든요. 사실 우리는 그래도 싸니까요. 그러면 환자는 완치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는겁니다.”(하권, 1011)

 

게라사(가다라)의 악령들’(마태복음, 8: 28-34/마르코복음, 5: 1-20/루카복음, 8: 26-39)의 알레고리는 노골적이다. 심지어 작품의 제목 및 제사마저도 이 부분에서 취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일단의 보수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허무주의 소설’(антинигилистические романы)의 흐름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거니와 󰡔악령󰡕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악령’(бесы)에 들린 돼지 떼이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의 명민한 분석이 보여주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가적 직관은 악령을 니힐리즘의 메타포로 취하면서 그 복잡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악령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기에 살아있는 육체에 빙의(憑依)되어야만 하는 유령이다. 나아가, 이 단어에 붙은 복수의 표식과 군대(ле-гион)라는 말에 포함된 다수의 단일성을 통해 체계’(전체)를 상정하되 개성’(부분)을 부정함으로써 악령과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의 내밀한 근친관계를, 또한 그 기저에 도사린 모방 욕망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악령-니힐리즘과 반()니힐리즘의 대립 관계는 의미가 없어진다. 작가의 노골적인 선언과는 다소 별개로 문제는 저 대립구도의 기저에 도사린 메커니즘이 무엇이며 그것이 실제 인간사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 이다. 달리 말해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의 운용 양상, 구체적인 인간(личность)과 특정한 관념(идея) 사이의 역동적인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전혀 특이할 것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특히 󰡔악령󰡕의 미학적 성취는 바흐친의 용어로 말해 관념인’(герой-идеолог)의 내적, 외적 운동성, ‘인간관념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결렬에 있다. 그것은 크게 두 층위(현실 층위, 즉 정치 및 혁명과 관념 층위)에 걸쳐 나타난다.

 

 

 

 

 

 

 

 

 

 

 

 

 

 

 

 

 

 

--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과 '소설-비극' {악령}>(2009)

 

 

-- 오랜만에 <악령>을 수업시간에 다루게 됐습니다.(아마 '마지막 수업'일 수도 있겠는데요...)

수업 준비 차 오래 전에 쓴 논문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통상 논문이란(특히 돈 받는 논문-_-;;) 의무감에서 쓰기 쉽지만 [악령]에 대해 여기저기 뿌려놓았던 말들을 긁어모아, 나름대로 신열(!)에 들떠 열심히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름 잘 쓴 것 같아요 ^^;;

그때, 이십대 중반, 석사과정 마치며 번역했던 <악령>을 다시 꼼꼼히 봤는데, 언제 기회가 되는 대로 대폭 손보려 합니다. 밀린 일들이 많네요..ㅠ.ㅠ

참조한 레퍼런스 중 아마 가장 강력(?)했던 건 지라르의 저작들이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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