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의 입을 빌어 복음서의 이른바 그리스도의 유혹부분을 그 나름대로 해석한다. 실상 기적’, ‘신비’, ‘권위에의 유혹은 모두 에서 출발하여 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대심문관의 도발적인 물음이다.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пред кем прекло- ниться)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все вмес-те)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общность)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천상의 가치)의 대립항(지상의 가치)으로서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읽힌다. 대심문관의 해석에서도 빵은 물론, 일차적으론 지상적 욕구와 필요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문제는 보다 복잡하고 심오하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 더욱이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라는 요구 조건은 이미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서 관념론적인 차원을 건드린다. , 인간의 삶이 제대로 영위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물리적 욕구와 더불어 심리적, 정신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후자의 영역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명명하지만,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항아들은 그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천상이 아닌 지상의 세계에서 찾고자 한다. 이 욕망이 현실에서는 두 형식, 즉 종교(신화)와 정치(혁명)로 표현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요 소설들이 신과 인간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더불어 일관되게 정치와 혁명을 다루는 것, 적어도 그것을 배면에 깔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듯 빵 속에서 단순히 빵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찾으려는 욕망, 나아가 그 와중에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손에 넣고자 하는 인간의 대범하면서도 비굴한, 또한 오만하면서도 겸허한 욕망의 기저에는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이 문제를 소설적 틀에서 담아낸 작품이 곧 <악령>(1871-1872)이다.

 

 

 

 

 

 

 

 

 

 

 

 

 

 

<악령>은 그 자체로 신화(희랍신화)와 태생적으로 연결된 고대비극의 유비로 읽혀왔으며 뱌체슬라프 이바노프에 의해 소설-비극’(роман-траге-дия)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이 고전적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장편, 특히 <악령>비범한 인간’(신의 유비로서의 영웅)과 운명(стихия) 간의 비극적 투쟁 및 파국이라는 도식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바노프는 신화-비극의 부활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이 지닌 근대적 의미도 간과하지 않았다. , 근대의 장르로서 소설은 개인주의의 반영이 됨으로써 개인과 세계의 결별 내지는 분열을 전제로 하며 이 경우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것으로 바뀌고 파토스는 유머로 와해된다.”라는 것이다. <악령>의 이념적, 시학적 복잡성에 대한 이바노프의 예리한 통찰에서 출발하여 V. 테라스는 이 작품을 파토스와 바토스(bathos), 숭고와 그로테스크, 미와 추가 혼재하는 희화된 비극’(tragedy in travesty)으로 정의하고 주요 인물들의 범속하고 희극적인 요소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 두 독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일견 서로 상반될 수 있지만 동일한 발생학적 근원을 갖는 소설-비극희화된 비극사이의 긴장이다.(중략)

 

 

 

 

 

 

 

 

 

 

 

 

 

 

 

 

 

 

 

2. 혁명의 신화에 대한 탈신화화 전략 - ‘웃음

 

2-1. 니힐리즘 vs. ()니힐리즘

 

주지하다시피 <악령>은 발표 당시 급진적 정치세력을 겨냥한 정치팸플릿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집필 당시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이 작품은 명백히 네차예프 사건을 모델로 한 정치소설(선동소설, 참여소설, 경향소설)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악령>의 신화적 위상 때문에 작품 이해에 있어 모종의 전제 같은 것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강조하건대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 층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과 종교학의 층위로 이월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차원을 소설적 세계 속에서 동시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본질적으로 실패하거나 적어도 기형적인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M. 홀퀴스트의 분석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부분-개인과 전체의 관계(‘정치’)는 엄정한 체제(statecraft)를 요구하지만 현실적 균형감각을 상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체제를 빗겨나가며 무질서한 몽상(wild utopianism), 즉 엔트로피의 법칙에 종속된다. 정치(현실)와 신화(이상)의 척력적인 길항 관계에 기반한 만큼 <악령>은 총체적인 혼돈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극우-보수의 중년 작가가 일차적으로 탈신화화하고자 했던 대상의 이론적 진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략)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니힐리즘은 단순히 젊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의 과도한 불안과 혐오는 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경고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 심지어 참회의 산물이다. 임종을 앞둔 스체판 베르호벤스키의 장황한 신앙 고백은 작가적 차원의 발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생각이, une comparaison(한 가지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이건 꼭 우리 러시아와 같아요. 환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그 악령들, 이건 모두 독이고 전부 전염병이고 하나같이 불결한 것이고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환자, 즉 우리 러시아 속에서 수세기 동안, 수세기 동안 우글거렸던 온갖 마귀들과 마귀의 새끼들입니다! Oui, cette Russe, que j'amais toujours(그래요, 내가 언제나 사랑해왔던 그 러시아라고요). 그러나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는 그렇게 더 높은 곳에서부터, 이 광기 어린 마귀 같은 것 위로, 바로 러시아 위로 그늘을 드리울 테고, 그러면 이 모든 마귀들이, 온갖 불결함이, 표층에서 곪기 시작한 온갖 이 추잡한 것이 밖으로 나올 테고그놈들이 직접 나서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할 겁니다. 어쩌면 벌써 들어갔는지도 몰라요! 이건 우리들이고, 우리들은 바로 그들, 즉 페트루샤와et les autres avec lui(그 녀석과 함께 한 자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우두머리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완전히 무엇에 홀린 듯 광포하게 날뛰면서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할 겁니다, 모두 빠져 죽을 거예요. 바로 거기가 우리의 길이거든요. 사실 우리는 그래도 싸니까요. 그러면 환자는 완치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는겁니다.”(하권, 1011)

 

게라사(가다라)의 악령들’(마태복음, 8: 28-34/마르코복음, 5: 1-20/루카복음, 8: 26-39)의 알레고리는 노골적이다. 심지어 작품의 제목 및 제사마저도 이 부분에서 취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일단의 보수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허무주의 소설’(антинигилистические романы)의 흐름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거니와 󰡔악령󰡕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악령’(бесы)에 들린 돼지 떼이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의 명민한 분석이 보여주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가적 직관은 악령을 니힐리즘의 메타포로 취하면서 그 복잡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악령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기에 살아있는 육체에 빙의(憑依)되어야만 하는 유령이다. 나아가, 이 단어에 붙은 복수의 표식과 군대(ле-гион)라는 말에 포함된 다수의 단일성을 통해 체계’(전체)를 상정하되 개성’(부분)을 부정함으로써 악령과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의 내밀한 근친관계를, 또한 그 기저에 도사린 모방 욕망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악령-니힐리즘과 반()니힐리즘의 대립 관계는 의미가 없어진다. 작가의 노골적인 선언과는 다소 별개로 문제는 저 대립구도의 기저에 도사린 메커니즘이 무엇이며 그것이 실제 인간사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 이다. 달리 말해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의 운용 양상, 구체적인 인간(личность)과 특정한 관념(идея) 사이의 역동적인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전혀 특이할 것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특히 󰡔악령󰡕의 미학적 성취는 바흐친의 용어로 말해 관념인’(герой-идеолог)의 내적, 외적 운동성, ‘인간관념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결렬에 있다. 그것은 크게 두 층위(현실 층위, 즉 정치 및 혁명과 관념 층위)에 걸쳐 나타난다.

 

 

 

 

 

 

 

 

 

 

 

 

 

 

 

 

 

 

--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과 '소설-비극' {악령}>(2009)

 

 

-- 오랜만에 <악령>을 수업시간에 다루게 됐습니다.(아마 '마지막 수업'일 수도 있겠는데요...)

수업 준비 차 오래 전에 쓴 논문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통상 논문이란(특히 돈 받는 논문-_-;;) 의무감에서 쓰기 쉽지만 [악령]에 대해 여기저기 뿌려놓았던 말들을 긁어모아, 나름대로 신열(!)에 들떠 열심히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름 잘 쓴 것 같아요 ^^;;

그때, 이십대 중반, 석사과정 마치며 번역했던 <악령>을 다시 꼼꼼히 봤는데, 언제 기회가 되는 대로 대폭 손보려 합니다. 밀린 일들이 많네요..ㅠ.ㅠ

참조한 레퍼런스 중 아마 가장 강력(?)했던 건 지라르의 저작들이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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