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과 돈”:

여성 작가, 아니, 인간에게 필요한 것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에 모더니즘만큼 자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페미니즘이다. 아마 그녀의 소설보다 더 즐겨 읽힐 법한 <자기만의 방>은 애당초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룬 강연문이다. 그 때문인지 도입부부터 제법 선언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10)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날카롭게 지적된다. 가령 여성은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만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재산권의 부재와 가난, 출산, 육아, 가사 때문에 지적 활동의 기회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대체로 남성은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으며 여성은 그 희생양이었다. 이쯤 되면 이 책이 오랫동안 페미니즘 비평의 필독서였던 것도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맥락에서 읽힌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의 문학론이 피력된, 무엇보다도 문학-작가와 현실(환경)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다. 작가는 작가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따라서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숙모에게서 유산을(1년에 500파운드) 상속 받은 뒤 두려움과 쓰라림에서 해방됐다며 울프는 이렇게 쓴다.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59-60)

 

요컨대 은 자유로운 사유와 집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물론 이 맥락에서 여성은 확실히 고달픈 처지에 있었다. 울프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는 누이동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해본다. 그렇다 한들 그녀는 오빠와 같은 대작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광기에 사로잡혀 파멸했으리라는 것이 울프의 결론이다. 왜인가? 강조하건대, 천재는 일정 부분, 어쩌면 상당 부분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이 방에서 나올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사를 시작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모들에게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의해 억눌렸던 것입니다.(75-76)

 

그뿐인가.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81)이었다. 공동 거실에서 소설을 써야 했던 제인 오스틴을 생각해 보라. 그에 비하면 울프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우호적인 시대를 살았던 셈이다. 개인적인 여건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무학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성장 환경은 상당히 지적이었다.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결혼 생활도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녀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주장하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 작가로서 바람직한 자세를 갖출 것을 촉구한다. 저 유명한 양성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책상으로 가로질러 가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쓰인 종이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습니다만, 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157)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울프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과 건전한 생활 감각이 낳은 현실주의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를 권할 때, 나는 여러분이 리얼리티에 직면하여 활기 넘치는 삶을 영위하라고 조언하는 겁니다.”(166) 단지 여성, 단지 작가만을 겨냥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만의 방과 돈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기 위해 요청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20세기 초, 울프가 여성 작가로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서 두루 형상화한 고뇌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남존여비와 같은 말이 우스갯소리로 전락한 현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문제이다.

 

-- 네이버캐스트

 

 

 

울프의 생애와 그녀의 작품(특히 <댈러웨이 부인>)을 갖고 만든 영화. 니콜 키드만이 울프 역을 맡았는데, 그 참혹한 분장이란...-_-;;

 

 

개인적으로 소설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좋았던 영화 <댈러웨이 부인>. 나이든(즉, 현재의) 미세스 댈러웨이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입니다. 아주 옛날 <욕망>(블로우업)에 나왔던 배우인데, 정말 곱게 늙었죠!

 

버지니아 울프의 부르주아적인, 귀족적인 문학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등대로/세월> 뭐, 이런 작품을 읽으며 정신이 혼미해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작가가 있습니다. 우아한 이미지 탓일까요? ^^;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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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앤업 2015-01-28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지않을 때도 편안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럭셔리장소들... 책장, 식탁 , 소파, 책상, 목욕탕 중에서
자기만의 방은 항.....상 침대옆에 두는 친구죠.^^
그냥... 펼치는 페이지를 읽을 때 마다 ...감사하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인생과 사랑과 고독에 대한 감미로운 스케치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된 프랑수와즈 사강이 한 말이다. 윤기가 흐르는 짧은 금발, 길고 가느다란 목, 약간은 소년 같으면서도 청순가련형의 곱상한 얼굴로 유명했던 사강도 이 무렵에는 이미 환갑이었다. 열아홉 살에 슬픔을 향해 발랄한 인사말을 건넴으로써(<슬픔이여 안녕>)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소녀 작가. 이후 청장년, 중년을 거치며 제법 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는 영원토록 나를 파괴할 권리를 마음껏 향유하는 청춘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약물과 마약 중독, 지나친 음주와 흡연, 도박, 목숨까지 앗아갈 뻔한 과속 운전,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등 일련의 스캔들도 소위 사강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녀의 소설이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신 컷도 예쁩니다!^^;)

 

가령 그녀가 스물네 살 때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경쾌한 분량의 연애소설이다.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은 꾸준히 다른 여자와의 연애를 일삼는 로제와 6년째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스물다섯 살의 청년 시몽이 나타나 열정적인 사랑을 토로한다. 스승인 슈만의 부인이자 14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에게서 은근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탓일까. 그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 그녀를 콘서트에 초대한다. 이 물음, 더 정확히 물음표가 말줄임표로 바뀌면서 폴은 상념에 젖는다.

 

그녀는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음악 중간에는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생각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중략)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57)

 

콘서트홀 안에서 폴은 말한다.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시몽의 답은 이렇다.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59) 둘 모두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도, 삶도 비슷하다.

 

 

 

 

 

 

 

 

 

 

 

 

 

 

 

 

 

폴은 얼마간 시몽과 함께 살기도 하지만 로제가 화해의 손길을 건네자 결국 시몽을 떠나보낸다. 예전처럼 로제를 마냥 그리워하고 기다려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관성 때문에, 어쩌면 정말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다. 한편, 시몽은 폴의 삶 속에 로제가 깊숙이 뿌리박혀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에 슬픔과 고통을 더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폴의 집을 나갈 때 그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만큼이나 그의 사랑은 진실하다. “삶은 여성지 같은 것도 아니고 낡은 경험 더미도 아니야.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나는 당신이 자신을 천박한 수준, 이를테면 그 심술쟁이 할망구들의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 우리의 문제는 로제뿐이야.”(133) 하지만 시몽의 치기 어린 열정은 폴의 삶에 알싸한 자극만 줄 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마느냐의 물음과 비슷한 셈이다.

 

로제는 어떠한가. 메지(마르셀)와의 관계에 싫증을 느끼고 다시 폴에게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불성실하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폴은 그의 용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아니나 다를까 일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사과 전화이다. 아무래도 문제는 로제를 상대로 계속 사랑의 최면을 걸면서 자발적인 청승에 탐닉하는 폴에게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변호사 시몽이 그녀에게 고독 형을 선고한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43-44)

 

그러자 폴은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 웃음이 제법 오랜 여운을 남긴다.

 

폴은 작가가 15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창조해낸 인물이다. 청춘의 절정을 구가하던 사강에게 고독 형이 과연 진정으로 무시무시한 선고였을까. 오히려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고독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것을 즐겼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고독마저 감미로운청춘 시절에만 쓸 수 있는 소설이다. “나를 파괴할 권리를 멋지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멋지게 파괴될 만한 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 청춘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네이버캐스트

 

-- 사강은 외모에서 풍기는 청신한 이미지가 워낙에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소설이 얄팍해 보이는(실제로도 좀 그렇죠?^^;) 감도 있습니다. 뭐, 그녀 자신도 자기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는 알고 있었을 테고요 ^^;

-- 맨 앞에 인용한 사강의 말, 우리 모두 좋아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데뷔작에 제목을 제공했죠? 새 판본이 나왔음에도 저는 역시 처음 표지가 좋네요 ㅎㅎ 영원히 젊을 것 같던 김영하(그에게서는 왠지 하루키 냄새가 납니다만^^;)도 마흔을 넘긴 지 오래...ㅠ.ㅠ 

 

 

 

 

 

 

 

 

 

 

 

 

 

 

 

 

사강의 소설이 계속 언급되는 이런 일본 영화도 있지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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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9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는 존재!

-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1952)

 

 

 

열아홉 살에 전쟁을 경험했고 스물두 살에 결혼했으며 스물네 살에 아버지가 되었고 바로 그 나이에 직업 작가가 된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로 스물일곱의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내놓으면서 문학적인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한 손에 거머쥔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전쟁 로맨스들은 수차례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사실 헤밍웨이는 그의 분신들을 연기했던 웬만한 할리우드 배우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스스로 기꺼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으며 적어도 그것에 길들여졌다. 네 번에 걸친 결혼과 화려한여성 편력, 역동적이고 남성적인 취미들(권투, 낚시, 사냥, 투우 관람 등), 잦은 전쟁 체험(그는 주로 종군 기자였다), 모험을 향한 추구와 역마살.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졌고 그 출처는 많은 경우 그 자신이었다. 오죽하면 헤밍웨이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들고 있는 사진까지 있을까. 이런 영웅과 같은 인기 작가가 십여 년간 침체기를 겪고서 1952년 쉰 살을 넘긴 노인이 돼서 돌아왔다. 헤밍웨이 특유의 압축적이고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들고서 말이다.

 

 

 

 

 

 

 

 

 

 

 

 

 

멕시코 만류에서 낚시를 하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벌써 팔십사일 째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그를 잘 따르는 소년 마놀린도 부모의 강권 때문에 노인의 배에 타지 못하게 됐다. 노인은 혼자 낚시를 떠난다. 스스로도 운이 다 됐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가 걸려든다. 이 녀석을 쟁취하기 위한, 혹은 지키기 위한 노인의 사투가 시작된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난 너를 죽이고 말 테다.”(55) 이렇게 다짐하는 늙은 어부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요기를 할 때는 녀석이 굶주릴 것이라는 생각에 연민을 느끼고, 캄캄한 밤, 잠이 들 때는 녀석 역시 휴식하길 바란다. 그러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100)하고 자문하기에 이른다.

 

 

 

정녕 어느 새인가 청새치와의 투쟁은 둘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항해로 바뀌어 있다. 그 때, 진즉부터 주변을 맴돌던 상어 떼의 습격으로 인해 이 유일한 동반자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노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얘기하고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스린다.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107)

 

천생 어부이고자 하는 그의 노획물은 그러나, 앙상한 등뼈와 뾰족한 주둥이와 시커먼 머리통만 남겼을 뿐이다. 노인은 사람들의 조롱을 뒤로 하고 소년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는 바다로 나가기 전, 또 낚시를 하는 동안 계속 그리워하던 사자를 본다. 소년 시절에 가보았던 황혼녘의 아프리카 해변을 뛰노는, 새끼 고양이 같은 사자들. 이것이야말로 낙원의 상징일진대, 노인의 삶은 잇따른 실패와 불운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극이 아니다. 소설의 바깥, 작가의 삶은 어떠한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이후 헤밍웨이는 노벨상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은 각종 사고와 후유증, 각종 질병과 그 치료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 때문에 극도로 피폐해졌다가 1961년 엽총 자살로 마감된다. 과연 사냥꾼의 마지막 먹이는 자기 자신”(제프리 메이어스, <헤밍웨이>, 2, 899)이던가. 사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을 문학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고행자-순교자 유형이라기보다는 삶과 문학을 동시적으로 소비하고 향유하는 유형에 속했으며 그의 작품 역시 동시대의 몇몇 걸작에 필적할 만한 깊이와 무게를 갖추지 못했다.(제프리 마이어스, 916) 그러나 그에게는 대학과 도서관에서 쌓은 지식과 교양 대신 자연과 역사의 현장에서 얻은 산 체험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문학은 그가 자살로써 완성한 인생과 어우러지면서 진정성을 획득한다. 흐루쇼프 집권 시절, 이른바 해빙기의 소련에서는 그를 모방한 텁수룩한 턱수염과 점퍼 차림이 유행했다.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정신과 삶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에, 바다 위에서 물고기와 바다 새를 향해 미친 듯 혼자 주절대는 늙은 어부에게 열광한다. ‘노인이 주인공임에도 소년이 더 많이 읽는 <노인과 바다>. ‘소년이길 멈추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 소설을 우리는 언젠가 기필코 노인이 되기 위해 또다시 읽게 될 것이다. 한 시절에는 그 역시 소년이었던 산티아고 노인의 말은 그때 더 소중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104)

 

-- <책&>

 

-- 올해 헤밍웨이 저작권이 소멸돼서 그의 소설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는데요, 오랜만에 쭉 다시 보니 나름 새롭더라고요. 글쎄, 소설 자체가 걸작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으나, 인물이 참 좋지요? ㅎㅎ 어릴 때 봤던, <주말의 명화>(?)와 같은 이런 프로에서 소개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런 영화도 떠오르고요.  낡은 티브이 앞에 코를 박고서 봤던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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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11-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소니 퀸 주연의 노인과 바다 영화는 1990년 작품이니까 우리나라 텔리비전에서 방영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죠. 어린 시절 보신 노인과 바다는 스펜서 트레이시(1900~1968) 주연의 1958년 작품일 것입니다.

민음사 책 번역하신 분 맞죠?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푸른괭이 2012-11-19 16:38   좋아요 0 | URL
예, 차려놓은 건 별로 없지만 자주 오세요^^; 그런데 제가 밑에서 언급한 영화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랍니다.^^;
 

 

4-2. 치혼의 암자에서와 스타브로긴: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

 

 

치혼의 암자에서가 문제적인 것은 탈신화화된 주인공, 인간스타브로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고백-참회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심지어 저는 저 스스로 저 자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게 저의 주된 목적, 제 목적의 전부입니다!”(하권, 1093)라고 외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서류-문건’(документ)의 진정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든 이것은 명백히 고백-참회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각색한 <악령>의 희곡 버전

 

 

하지만 바로 여기에 스타브로긴의 원죄, 십자가의 숙명(그의 이름 자체가 십자가를 의미한다)이 들어 있기도 한바, 그는 신-악마의 지위를 누리며 스스로를 위대한[크나큰] 의 주체로 만들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책형 앞에서 속죄하려는(redemption)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저 악령들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용서 및 속죄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내적인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антиисповедь) 사이의 긴장이다. 이 고뇌를 치혼은 그 나름대로 간파한다.

 

이 기록은 죽도록 상처 입은 마음의 요구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치혼]는 집요하게, 비상한 열의를 보이며 계속했다. “그래요, 이것은 참회이고 당신을 압도해버린, 참회의 자연스러운 요구입니다.() 범죄를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뭣 때문에 참회를 부끄러워하십니까?() 당신은 자신의 심리 분석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집착하고, 그저 당신에겐 있지도 않은 그런 무감각함을 뽐내며 독자들을 놀래려는 듯. 죄인이 재판관을 향해 오만한 도전을 던지는 게 아니고 뭡니까?” (하권, 1086-1087)

제가 뭘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의 증오를 겸허하게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증오 하나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죠?”

그들의 웃음입니다.”()

됐어요, 어디 지적이나 해주시죠. 도대체 제 수기에서 정확히 저의 어떤 점이 우스꽝스럽다는 겁니까?()”

심지어 가장 위대한 참회의 형식 속에도 이미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부님께서는 오직 형식에서만, 문장에서만 우스꽝스러운 점을 발견하시는 겁니까?”()

그 본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 죽일 겁니다.”()

뭐라고요?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요? 뭐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겁니까?”

범죄입니다.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범죄가 있는 겁니다.()”(하권, 1090-1092)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뻔뻔함, 그러고서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집 등의 충돌 과정에서 수치’(стыд)의 감각이 생겨난다. 치혼이 암시하듯, 참회와 용서가 진정으로 아름다우려면 이 수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소위 대죄인’(ве- ликий грешник)이 수치심 없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한(бесстыжный) 행위임을 스타브로긴은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감히 신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선민의식과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동시에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죄가 낳은 추의 감각, 그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개입돼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빚어내는, 자기 분열을 야기할 만큼 치열한 내적 투쟁은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자연스레 웃음’(우스꽝스러움)의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치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이고 초조한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서류-문건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루소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하지만(하권, 1066)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자기 해부 내지는 자기 과시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치혼의 암자에서의 스타브로긴은 18세기 계몽의 인간으로서 비교적 행복한 기만에 사로잡혀 있던 루소(실제 <고백> 속의 문학적 자아인 루소의 형상과는 상당히 구분되지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신의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는 한낱 하는 일 없이 빌빌대고 돌아다니는 귀족 도련님”(샤토프의 말: 상권, 396),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유희의 욕망에 탐닉하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이다. 이제 다시 <악령>의 플롯으로 돌아가자.

 

치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오로지 종잇장의 공표를 피하기위해 흡사 출구라도 찾듯 새로운 범죄 속으로 몸을 내던”(하권, 1099)진다. 모든 죄악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점잖게, 즉 몹시 야비하게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종결된 후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살이 무한히 늘어선 기만의 대열 중 마지막 기만”(하권, 1043)이기에 자신은 결코 자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치혼의 암자에서를 곁들인다면, 자살은 수치웃음을 극복하지 못한 대가이며 신의 심판을 끝까지 거부하고 오롯이 그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기만성에 관해서라면 스타브로긴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실상 그의 -악마로서의 아우라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1045)라는 유서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으로 몫으로 남겨진 스타브로긴의 최후, 즉 자기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을 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은 가히 키릴로프의 최후만큼이나 희극적이다. 자살 이후에 남는 것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리 붙여도 무의미한, 그저 목매단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로서 스타브로긴은 우스꽝스러움을 비롯한 온갖 파토스를 체화한 상태로 신화의 영역에 붙박인다. 탈신화화의 공격 끝에 한 마리의 추악하고 유치한 거미로 치환될지라도 어떻든 그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적어도 끝까지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유일한 자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마땅한 리얼리즘의 문법을 생각한다면 스타브로긴은 정녕 베르쟈예프의 말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맹점이자 매혹이자 원죄였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십자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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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쓸 때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책입니다. 바쿠닌은 물론 그와 네차예프의 관계, 네차예프의 성격 등에 관한 얘기도 나옵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시절 숙제 목록 일순위였던 것 같은데요(^^;;) ,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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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타브로긴과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 영웅-주인공, 분신, 가면

 

4-1. <악령> 속의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을 쓴 -악마

 

 

<악령>의 구성상 모든 논의는 스타브로긴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그에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그와 여타 인물 간의 관계는 주인공-영웅(원상)과 분신 관계의 신화적 도식을 근대적 틀에서 재현해낸다. 본원적 의미에서의 분신은 웃음과 패러디의 기능을 수행하면서(смеховой двойник, пародирующий двойник) 원상의 생존(부활)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공-영웅과 분신은 엄격한 가치론적 위계질서에 종속되며 주종관계 역시 명확히 규정된다.

 

이 도식에 따를 때 스타브로긴의 분신들의 희생은 표트르의 미학적 죽음까지 포함하여 궁극적으론 주인공-영웅의 부활을 예고함과 동시에 오직 이를 통해서만 성스러움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자살로 인해 재구축된 분신 신화의 도식은 상당히 왜곡되고 <악령>성스러운[신의] 희극’(Divine Comedy)이 아니라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비극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성적 층위가 아니라 미학적 층위인바, 스타브로긴의 형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아닌 소설 속에서 을 창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 그 본질상 ’(육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신성을 상실하는 반면 을 갖지 않으면 소설적 인물(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손쉬운 작업은 그 자체로 신성의 육화인 그리스도를 재현해내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랫동안 이 작업에 공을 들였고 그 성과인 므이시킨, 알료샤 등은 실패한 만큼이나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가 스타브로긴을 통해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소설, 더욱이 정치와 혁명의 탈신화화를 다룬 극히 범속한 소설 속에서 의 형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스타브로긴 인생의 몇 장면>(?) 공연 포스터.)

 

더욱이 그 은 목소리 따위가 아닌,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이며 악마성의 현시를 통해 신성을 획득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이다. 작가가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내지는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키릴로프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은 반면, 스타브로긴에겐 젊음과 아름다움, 건강함과 육체적 완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무한히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부여한다. 이렇게 그를 1860년대 러시아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로 만듦으로써 사회학적 동기화를 획득함은 물론 물질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시험에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에게 연역적으로 접근한다면 명실상부한 고백록인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짚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곳곳에서 내 힘을 시험해 봤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면서 내게 그 일을 권했지요. 나 자신을 위한, 또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 시험에서, 그 힘은 예나 지금이나 내 평생 동안 무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나는 당신 오빠의 따귀를 참아 냈습니다. 결혼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 바로 이것만은 결코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스위스에서 그렇게 격려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걸 믿었건만.() / 당신의 오빠는 내게, 대지와의 관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신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목적을 상실한다고 말하더군요. 이 모든 것을 두고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선 오직 한 푼의 관대함도 없이, 한 푼의 힘도 없이, 부정(否定) 하나만이 흘러나왔을 뿐입니다. 아니, 부정조차도 흘러나오지 못했지요. 모든 것이 언제나 미미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하권, 1041-1042)

 

각종 시험의 결과로 나타난 부정은 상태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따라서 비존재와 무가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다. 시험-부정의 일환으로서 다수의 분신을 동시적으로 창조한 것도 천지창조의 메타포를 소설 텍스트에서 실현한 것으로 읽힌다. , 태초에 신이 자신의 모습에 근거하여(образ и подобие) 인간을 만든 것에 반해, 스타브로긴은 대상의 본질에 천착하여 자신의 관념을 그 틀 속에 집어넣고 형상-이름을 고착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름이 없는, 고로 추한 존재(безобразный-безобразный)이다.

 

여기서 끊임없는 움직임이 시작되는바, 이러한 내적 방황에는 분명히 레르몬토프적인 유산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레르몬토프-페초린이 극히 유아론적이며 또한 유아적으로 강력한 자아의 팽창으로 인해 괴로워했다면, 스타브로긴의 고뇌는 정반대로, 블랙홀과 같은 자아를 하나의 형상-이름으로 고착시킬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에겐 무수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통째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대상은 스타브로긴의 거대한 심연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그는 또 다시 이름을 상실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거나 형상-이름을 빌려야 한다. 현실에서 그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 상권, 432)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리자베타 투쉬나),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마리야 레뱌드키나), 영원한 안정의 시험(다리야 샤토바) 등은 결과적으로 심연의 넓이와 깊이를 각인시킬 따름이다. 니체의 저 유명한 아포리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속의 괴물 및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공히 스타브로긴의 은유로 읽힌다. 심연이 남은 집어삼킬 수 있어도 자신은 집어삼킬 수 없듯 은 타살은 해도, 또한 살해의 객체가 될 수는 있어도 자살은 하지 못한다.

 

물론, 스타브로긴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문제의 장면에서 작가는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달리 짧은 진술만 던져줌으로써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그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카트코프의 강압적 권유도 없었건만 그토록 공들여 쓴 치혼의 암자에서를 단행본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달리 말해 1922년까지 방치되었던 이 거친 원고에 스타브로긴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의 요한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싱크로율 99프로입니다ㅋㅋ  스타브로긴의 만화 버전이랄까요 ^^; (나오키의 <플루토>에서는 엡실론이 대략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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