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과 돈”:

여성 작가, 아니, 인간에게 필요한 것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에 모더니즘만큼 자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페미니즘이다. 아마 그녀의 소설보다 더 즐겨 읽힐 법한 <자기만의 방>은 애당초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룬 강연문이다. 그 때문인지 도입부부터 제법 선언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10)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날카롭게 지적된다. 가령 여성은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만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재산권의 부재와 가난, 출산, 육아, 가사 때문에 지적 활동의 기회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대체로 남성은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으며 여성은 그 희생양이었다. 이쯤 되면 이 책이 오랫동안 페미니즘 비평의 필독서였던 것도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맥락에서 읽힌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의 문학론이 피력된, 무엇보다도 문학-작가와 현실(환경)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다. 작가는 작가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따라서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숙모에게서 유산을(1년에 500파운드) 상속 받은 뒤 두려움과 쓰라림에서 해방됐다며 울프는 이렇게 쓴다.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59-60)

 

요컨대 은 자유로운 사유와 집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물론 이 맥락에서 여성은 확실히 고달픈 처지에 있었다. 울프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는 누이동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해본다. 그렇다 한들 그녀는 오빠와 같은 대작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광기에 사로잡혀 파멸했으리라는 것이 울프의 결론이다. 왜인가? 강조하건대, 천재는 일정 부분, 어쩌면 상당 부분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이 방에서 나올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사를 시작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모들에게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의해 억눌렸던 것입니다.(75-76)

 

그뿐인가.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81)이었다. 공동 거실에서 소설을 써야 했던 제인 오스틴을 생각해 보라. 그에 비하면 울프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우호적인 시대를 살았던 셈이다. 개인적인 여건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무학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성장 환경은 상당히 지적이었다.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결혼 생활도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녀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주장하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 작가로서 바람직한 자세를 갖출 것을 촉구한다. 저 유명한 양성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책상으로 가로질러 가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쓰인 종이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습니다만, 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157)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울프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과 건전한 생활 감각이 낳은 현실주의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를 권할 때, 나는 여러분이 리얼리티에 직면하여 활기 넘치는 삶을 영위하라고 조언하는 겁니다.”(166) 단지 여성, 단지 작가만을 겨냥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만의 방과 돈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기 위해 요청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20세기 초, 울프가 여성 작가로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서 두루 형상화한 고뇌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남존여비와 같은 말이 우스갯소리로 전락한 현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문제이다.

 

-- 네이버캐스트

 

 

 

울프의 생애와 그녀의 작품(특히 <댈러웨이 부인>)을 갖고 만든 영화. 니콜 키드만이 울프 역을 맡았는데, 그 참혹한 분장이란...-_-;;

 

 

개인적으로 소설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좋았던 영화 <댈러웨이 부인>. 나이든(즉, 현재의) 미세스 댈러웨이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입니다. 아주 옛날 <욕망>(블로우업)에 나왔던 배우인데, 정말 곱게 늙었죠!

 

버지니아 울프의 부르주아적인, 귀족적인 문학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등대로/세월> 뭐, 이런 작품을 읽으며 정신이 혼미해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작가가 있습니다. 우아한 이미지 탓일까요? ^^;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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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앤업 2015-01-28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지않을 때도 편안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럭셔리장소들... 책장, 식탁 , 소파, 책상, 목욕탕 중에서
자기만의 방은 항.....상 침대옆에 두는 친구죠.^^
그냥... 펼치는 페이지를 읽을 때 마다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