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인생과 사랑과 고독에 대한 감미로운 스케치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된 프랑수와즈 사강이 한 말이다. 윤기가 흐르는 짧은 금발, 길고 가느다란 목, 약간은 소년 같으면서도 청순가련형의 곱상한 얼굴로 유명했던 사강도 이 무렵에는 이미 환갑이었다. 열아홉 살에 슬픔을 향해 발랄한 인사말을 건넴으로써(<슬픔이여 안녕>)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소녀 작가. 이후 청장년, 중년을 거치며 제법 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는 영원토록 나를 파괴할 권리를 마음껏 향유하는 청춘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약물과 마약 중독, 지나친 음주와 흡연, 도박, 목숨까지 앗아갈 뻔한 과속 운전,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등 일련의 스캔들도 소위 사강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녀의 소설이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신 컷도 예쁩니다!^^;)

 

가령 그녀가 스물네 살 때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경쾌한 분량의 연애소설이다.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은 꾸준히 다른 여자와의 연애를 일삼는 로제와 6년째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스물다섯 살의 청년 시몽이 나타나 열정적인 사랑을 토로한다. 스승인 슈만의 부인이자 14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에게서 은근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탓일까. 그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 그녀를 콘서트에 초대한다. 이 물음, 더 정확히 물음표가 말줄임표로 바뀌면서 폴은 상념에 젖는다.

 

그녀는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음악 중간에는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생각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중략)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57)

 

콘서트홀 안에서 폴은 말한다.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시몽의 답은 이렇다.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59) 둘 모두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도, 삶도 비슷하다.

 

 

 

 

 

 

 

 

 

 

 

 

 

 

 

 

 

폴은 얼마간 시몽과 함께 살기도 하지만 로제가 화해의 손길을 건네자 결국 시몽을 떠나보낸다. 예전처럼 로제를 마냥 그리워하고 기다려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관성 때문에, 어쩌면 정말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다. 한편, 시몽은 폴의 삶 속에 로제가 깊숙이 뿌리박혀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에 슬픔과 고통을 더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폴의 집을 나갈 때 그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만큼이나 그의 사랑은 진실하다. “삶은 여성지 같은 것도 아니고 낡은 경험 더미도 아니야.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나는 당신이 자신을 천박한 수준, 이를테면 그 심술쟁이 할망구들의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 우리의 문제는 로제뿐이야.”(133) 하지만 시몽의 치기 어린 열정은 폴의 삶에 알싸한 자극만 줄 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마느냐의 물음과 비슷한 셈이다.

 

로제는 어떠한가. 메지(마르셀)와의 관계에 싫증을 느끼고 다시 폴에게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불성실하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폴은 그의 용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아니나 다를까 일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사과 전화이다. 아무래도 문제는 로제를 상대로 계속 사랑의 최면을 걸면서 자발적인 청승에 탐닉하는 폴에게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변호사 시몽이 그녀에게 고독 형을 선고한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43-44)

 

그러자 폴은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 웃음이 제법 오랜 여운을 남긴다.

 

폴은 작가가 15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창조해낸 인물이다. 청춘의 절정을 구가하던 사강에게 고독 형이 과연 진정으로 무시무시한 선고였을까. 오히려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고독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것을 즐겼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고독마저 감미로운청춘 시절에만 쓸 수 있는 소설이다. “나를 파괴할 권리를 멋지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멋지게 파괴될 만한 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 청춘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네이버캐스트

 

-- 사강은 외모에서 풍기는 청신한 이미지가 워낙에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소설이 얄팍해 보이는(실제로도 좀 그렇죠?^^;) 감도 있습니다. 뭐, 그녀 자신도 자기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는 알고 있었을 테고요 ^^;

-- 맨 앞에 인용한 사강의 말, 우리 모두 좋아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데뷔작에 제목을 제공했죠? 새 판본이 나왔음에도 저는 역시 처음 표지가 좋네요 ㅎㅎ 영원히 젊을 것 같던 김영하(그에게서는 왠지 하루키 냄새가 납니다만^^;)도 마흔을 넘긴 지 오래...ㅠ.ㅠ 

 

 

 

 

 

 

 

 

 

 

 

 

 

 

 

 

사강의 소설이 계속 언급되는 이런 일본 영화도 있지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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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2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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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16: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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