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사족을 달자면, 이 글은 ‘10’의 나이와 학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딱히 등단 년도가 같아서도 아니고) 스승이나 선배가 아니라 문우 비스름한 존재로 여겨온 한 소설가에 대해 또 다른 한 소설가가 쓴 글이다. 언젠가는 비슷한 지점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이상한 오기와 끈기로 무장한(혹은 해제한?) 그의 뒤태를 보며 시새움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 심지어 문학에 대한 예의이다.

 

90년대를 포함하여 그를 만난 건 다섯 번도 안 되지 싶은데, 가장 최근의 만남은 2010년에서 20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어느 날, 모 전철역에서였다.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 우연에, 정영문은 정영문의 소설(그때 <작위>를 연재 중이었다) 속에서 막, 또 마지못해 기어 나온 것 같은 표정과 몰골을 한 채 허공으로 퍼지는 맛깔스러운 담배 연기 같은, 한층 더 길쭉해지고 느슨해진 것 같은 몸뚱어리를 곤혹스러워하며 엉거주춤, 어영부영 전화번호를 물었다. 아니, 말을 한 건 아니고 실어증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런 뜻을 전하는 어슴푸레하고 희끄무레한 손짓과 몸짓을 보였다. 만남이랄 수도 없는 짧은 스침이었지만,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이 너무도 여전하여 신명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병”(<작위>, 95)을 계속 앓길, 그리하여 우리 문학에 건강한 전범과 더불어 불온한 전위가 두루 넘쳐나길 바란다.

 

4. 다시, 소수적인 문학

 

서슬 퍼런 비평(비평은 일정 부분 그래야 한다)과 근엄한 학문(이 역시 황혼녘에야 날갯짓을 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속성이다)의 눈으로 보면, 각종 엄친아와 비교하면 현재 우리의 문학은 모조리 다 시원찮을 수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실상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과거바깥에서 전범을 찾고 ()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불쌍한 일, 심지어 좀 촌스러운 일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카프카처럼’, ‘이상처럼은 작가 개인의 인생을 놓고 봐도 하룻강아지 시절에나 낯붉힘 없이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처럼이란 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 완전한 닮음(같음)은 불가능하다.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됨이 마땅하다. 물론 당대의 평가가 훗날 뒤집어진다는 식의 복수(復讎)’의 문학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학사는 오히려 당대의 베스트셀러(적어도 순위권)가 미래의 스테디셀러가 됨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예외적인 경우지, 현재의 무명이 미래의 불멸을 담보하지는 절대 않는다. 작가로서 자신의 그릇이 큰 대접은커녕 간장종지밖에 안 된다면 그것도 운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협할 때 그 간장종지나마 잘 채울 수 있다. 요컨대 작가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거니와 이는 일국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리의 문학사도 제법 묵직해져서 전범-다수전위-소수의 계보를 따로 작성해볼 수도 있겠다. 한데 이광수나 염상섭, 이상이나 김동인을 놓고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가가 아니라고 투덜대는 건 역시나 좀 촌스럽고, 덧붙여 배은망덕한 패륜이다. 그런 아비-어미 밑에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직 우리의 문학이란 이유만으로도 소중히 여길 의무가 있다. 그것이 문학사와 마주한 우리의 최소한의 덕목, 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쏟아지는 문학에 대해서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문학이야말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우리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진정 소수적인 문학, 너무나 고독한문학이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제각기 소수적인 문학의 주체이다. 굳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만 소수의 다수 독자를 갖는 것보다 다수의 소수 독자를 갖는 것이 작가로서는 더 큰 행복일 수 있다. 최근에 우리 문학의 번역과 수출 관련 얘기가 많아졌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문학 바깥의 얘기이다. 문학 안에서의 논의는 훨씬 더 간단할 법하다. 어쨌거나 심판은 문학사의 몫이다. 무조건 열심히 쓰고 열심히 읽을 일이다. 그것이 장르 불문, 글쟁이의 실존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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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정영문과 이론적 서사

 

정영문의 서사를 편의상 이론적 서사라고 부르자. 그것은 인간이든 동식물이든 물건이든 특정 현상이든 아무튼 어떤 대상에 관한 이론 정립을 지향하며 방법론에 있어 정치한 논증이 아니라 자유 연상, 즉 철저히 은유적인 사유의 흐름을 따른다. 가령, 첫 번째 이야기에서 나체주의자 행세를 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옛 여자 친구의 현 남자 친구가 어제 마신 데킬라가 남아 있는 오줌을 용설란 묘목을 향해 내뿜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 그의 생식기, 나아가 인간 남자(수컷)의 생식기 일반에 관한 이론이 펼쳐진다.

  (....)

 

이어, 좀 봐달라는 듯 문을 열어놓은 채 벌이는 그들의 정사 얘기 이후 그녀와의 연애 시절이 회상되고 그 끝에 그녀의 젖꼭지 얘기, 나아가 젖꼭지 일반에 관한 이론이 나오고(<작위>, 20-21) 겸사겸사 과음을 한 그녀가 누구 집 대문 앞에서 설사를 한 일이 회상된다. 정영문식 연애와 사랑, 윤리와 도덕에 관한 의식이 은근한 따사로움과 유머러스함을 뽐내며 표현되는 대목이다. “그녀가 설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녀에게 치하를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로 나는 두고두고, 길에서 설사를 하는 누군가에게 포도나무 잎을 몇 장 따다 준 것이 내가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베푼 가장 큰 선행 중 하나처럼 생각되었다.”(<작위>, 27) 이렇게 말의 세계로 진입한 포도나무 잎, 즉 포도에서 또 다른 사물이 말의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그 사물은 보다시피 일상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흥미로운 일화의 형식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런 경우일지라도 이내 특정 대상에 관한 쫀쫀한 이론으로 바뀐다. “방귀도 볼품 있는 엉덩이라야 어엿하게 뀔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것이 이치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얼마나 어엿하지 않은 방귀가 나오나 보려고 정색을 하고 방귀를 뀌려고 했지만 방귀는 나올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작위>, 62) 이렇게 운을 뗀 방귀-론에서 엉덩이-론이, 엉덩이-론에서 궁상-론이 나오는데, 어지간한 시나 아포리즘보다 더 리듬감이 있어 읽기에 무척 신명나는 대목이다.

 

나는 궁상을 떨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궁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어떤 이론 같은 것을 펼쳤다. / 가끔은 떨어줘야 하고, 가끔 떠는 것은 나쁘지 않은 궁상은 잘 떨면 재미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잘못 떨면 스스로도 면목 없게 될 위험이 있고, 곧잘 그 정도가 지나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에도 좋지 않을 수 있어 궁상을 떨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궁상의 문제 중 하나는 알맞은 정도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떨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궁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형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카프카와 이상 같은 작가들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상이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해 회충약을 복용했다고 했을 때 그는 궁상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궁상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한데 내 생각에는 궁상이 궁상으로서 돋보이려면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떨어야 했다.(<작위>, 65)

 

물론 이런 부분이 많지는 않다. 그는 지금까지 소설을 써온 것도 [돌멩이를 굴러가게 하고 숫자를 셀 때와 같은] 그 이상한 오기와 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단히 보기 싫은 것들이었다.”(<작위>, 131)라고 썼거니와 이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가 항상 신명나는 미학적 성취로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 그 역시 너무나 따분하고 무료하여 권태와 분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위>는 그동안 그가 쓴 소설 중 신명나는 부분이 가장 많을뿐더러 (<바셀린 붓다>심술궂은심사를 반영한 못된책이듯!) 자신의 신명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갸륵한심사마저 표현된 착한책이다. 무대 의상 같은 재킷에 붉은색 계통의 체크무늬 바지(정말 난해한 패션이다!)를 입고 실직한 광대처럼 길을 걷는 의 모습에서는 그런 신명의 정수가 보인다. “그러자 나 자신이, 평생을 광대로 살아왔기에 앞으로도 광대로밖에는 살 수 없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광대 짓을 하지는 않고, 혼자 가끔 광대의 흉내의 내며 광대의 미소를 짓기도 할 광대 같이 느껴졌다.”(<작위>, 232-233)

 

아무래도 정영문의 소설은 영원토록 낯선 문체에도 불구하고 말보다는 사물의 세계에 더 가까이 가 있던, 그러려는 투지를 보인 카프카보다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말의 지랄을 보여주는 베케트를 더 닮았다. 나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었다.”(<작위>, 242) 정영문의 이 말에 졸렬한 악의는 물론 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보기 싫은 이상한 오기와 끈기는 아주 잘 보인다. 자의식 과잉이나 과잉된 자의식은 소설을 저질의 서사(일기)로 퇴화시키지만 그것에 대한 미학적인 유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나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보여주듯 고품격의 서사를 낳는다. <작위>가 그 증거인데, 난해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특이해서 그의 소설은 진정 소수적인 문학, 그래서 소중한 문학이다.

 

3-3. 소설 바깥의 소설가 정영문

 

잇따른 문학상 수상을 전후하여 공개된, 그의 소설 못지않게 소설적인 인터뷰 글을 토대로 대략 한 줄 전기를 구성해보자. 1965년 경남 함양군에서 쉰다섯의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난 그는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들어가고 간신히졸업을 한 다음에는 미술사를 공부하러 프랑스에 가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기꺼이포기하고 쉰 살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번역으로 생계를 꾸리며 노예처럼소설을 써왔다. 대학에 입학한 해, 김천에서 통일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청년 정영문에 관한 묘사도 재미있다. ‘상경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고전적인 근대소설에서 최근 우리문학의 루저 문학이나 정크 문학(그 이전의 칙릿 문학도 포함)에 이르기까지 각종 소설의 기저에 깔린 상승이 아니라 하강’, 말하자면 패배’(카프카)전락’(카뮈)의 동선을 보여준다. 물론 이 역시 <작위>의 의 광대 복장처럼 가면이자 포즈일 수 있다. 그러나 살 속까지 파고든 가면은 이미 그 사람의 얼굴이고 몸뚱어리에 붙어버린 포즈는 이미 그의 실존이다. 그리고 소설가의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그의 소설의 일부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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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1. 소수적인 문학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론에서 사용한 소수적인(mineure) 문학이라는 개념은 물론 카프카가 처한 언어적 정황과 관련된 것이다.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으로서 고도로 탈영토화된 언어, 정치성과 집합성을 특징으로 한다(들뢰즈/가타리, 44-46). 카프카의 경우 체코어, 독일어, 유대어 등 세 개의 언어-문화가 만나고 어긋나면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는 지점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K’()의 실존적 고독과 소외, 그리고 카프카 특유의 분석적이고 건조한 문체(‘문서체’)의 진앙도 여기이다. 그럼에도 소수적인 문학의 핵심은 생래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에 있지 않다. “소수적이지 않은 위대한 문학이나 혁명적 문학은 없다. 모든 거장적인 문학을 증오하는 것.”(들뢰즈/가타리, 67)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 그것이 단일하며 다수적이거나 다수적이었다고 해도 를 소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같은 곳)이다.

 

 

 

 

 

 

 

 

 

 

 

 

 

 

단일 민족에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적 지향점을 타진할 때 소수적인 문학은 제법 유용한 개념으로 보인다. ‘세계문학지역문학’(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이 요청될 만큼 여러 언어권 간의 경계가 흐려졌으며 문단의 구조는 기존의 작가/비평/출판(시장) 권력에 덧붙여 대학(문예창작학과) 권력까지 가세해 무척 복잡해졌다. 이와는 별개로 여전히 좋은 문학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장이 기술 논리와 경제 논리에 따라 급속도로 재편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이 새삼 강조되면서 소수적인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가 정영문의 문학적인 성취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이 역시 문학 권력들의 흐름의 산물이지만!) 반가운 건 이 때문이다. 다수적인-소수적인 문학은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처럼 극히 상대적인, 고로 정치적인 개념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둘의 생산적인 공생 관계의 예를 19세기 러시아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다수-규범의 문학과 소수-전위의 문학: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정녕 톨스토이의 소설이 소설-서사시인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설-비극이다. 전자의 소설에서는 세기의 영웅인 나폴레옹조차 한 명의 등장인물로, 더욱이 꼰질꼰질하고 촌스러운 출세주의자로 전락하는(<전쟁과 평화>) 반면, 후자의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의 누추한 하숙방에 틀어박힌 채 나폴레옹을 꿈꾸다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괴상한 법학도마저 오이디푸스 못지않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죄와 벌>). 요컨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었음에도 그들이 살았던 러시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다름과 다름의 공존이 두 작가를 공히 불멸케 하고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루카치의 소설론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혁신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루카치, 205-206) 끝나는데, 톨스토이가 전범의 계보를 완성한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위의 계보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사의 심판이 사실상 종료된 문학, 더군다나 의 문학 얘기이다. 지금 생성 중인 문학, 더군다나 /우리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다시금 톨스토이를 겨냥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자면, 본질상 혼돈과 무질서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다(<미성년>).

 

 

 

 

 

 

 

 

 

 

 

 

 

 

 

 

3. 정영문의 이론적 서사와 <어떤 작위의 세계>

 

3-1. 말과 사물 사이 - 말의 말

 

이제 우리 문학의 전위의 계보도 두둑해졌는데 정영문은 그 끄트머리에 있을 법하다. 2000년대 이후 그가 써낸 책의 목차만 봐도 중성적인 낱말이 오히려 생경하게 여겨질 만큼 정영문스럽다.

  (...) 

현재로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최고작인 <작위>에서 정영문스러움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일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소설을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이미 전형적인 번역 투(더욱이 윤문을 거치지 않은!)의 문장, 각종 지시 형용사와 대명사에 대한 강박적인 거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인바, 사소한 변주를 동반한 동어반복, 불성실하고 무성의하고 심드렁한 문체 등이 눈에 익다. 다만, 말들의 틈새가 훨씬 더 촘촘, 아니, “쫀쫀”(<달에 홀린 광대>, 33)해졌으며 작가의 감각 기관에 포착된 객관적인 사물과 대상은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작위>, 7)려 있다. 이는 작가의 관심사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에 있기 때문, 말의 말, 소설의 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작위>, 270)임을, 굳이 괄호까지 사용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앞서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부제로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7)를 지적했는데,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뜬구름에 좀 더 재미를 느낀 듯하다. 그 이유인즉,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작위>, 270)이다.

 

이렇게 아무런 핵심이 없고 이 핵심 없음이 곧 핵심인 세계가 나타났는데, 정영문은 그것을 완벽한 작위의 세계’, 심지어 이상한 무위의 세계라고 부른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작위>, 190) 이런 허망한 세계에 관한 집요한 말장난이 한 편의 소설이 됐다. 그것에 대한 각종 해석이 초라하고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소설론인 까닭이다. 그것도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거나 기존의 소설론이나 서사학과의 대결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닌 심드렁하고 시건방진(!) 소설인 까닭이다. 그뿐인가. 소위 난해한 소설의 대명사인 정영문에게는 그 나름의 완벽한 알리바이도 있다. ,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에 허무와 불모의 세계관이 돋보임과 동시에 잘 짜인 서사 구조를 갖춘 중단편 소설이 적지 않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성묘를 떠났다가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혹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극적인 대화와 괴상한 작태가 인상적인 부자(父子) 이야기를 그린 달에 홀린 광대(<달에 홀린 광대>)라든가 남의 집에 침입해 기껏 마실 것과 치질약과 네 곡의 연주”(<목신의 어떤 오후>, 39)만 요구한 어린 강도 커플의 난감한얘기를 액자식으로 들려주는 브라운 부인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자기만의 검은 이야기 사슬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정영문은 보이지 않는 균열파괴적인 충동의 극단으로 치닫더니 급기야는 핏기 없는 독백(‘하품을 곁들인!) ‘중얼거림을 택한 형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무력한 상태의 궁극의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을 뿐인 것 같아. 앞으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겠지.”(<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156.) 사물과 말 사이의 간극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과 마땅히 그럴 필요도 없다는 체념 뒤에 나왔을 법한 글쓰기는 칸트 식으로 말해 지극히 무목적인, 따라서 지극히 미학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그 표현이 <바셀린 붓다>이다. 장은커녕 문단조차 잘 나누어놓지 않고 아무데나 되는대로 마구 읽으라는(혹은 굳이 그렇게도 읽지 말라는) 식의 이 소설은 베케트의 <몰로이>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나 그 작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실은 그것의 캐리커처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생각하다는 술어로 연결된 치명적인 문장 하나가 15쪽에 걸쳐 이어진다.

 

나는 일상의 다양한 모습과 차원들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신이 생선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지금까지 먹은 생선의 숫자는 얼마나 될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생선을 먹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이 언젠가 이후로 사실주의와의 길고도 험하며 지루하고도 즐거운, 전면적인 싸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제초제를 위스키로 착각해 커피로 넣으려 했던 화가에 대해 생각하며(이쯤에서 그만할까? - 이것은 화자가 내는 목소리이다. 그만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더 할 수도 있고, 더 하고 싶은 걸 이것은 좀더 장난스러운 작가의 목소리다) () 역시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하루들로 이루어진, 이런 식으로 그 목록을 끝없이 작성하고, 그 목록들에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일상들의 순간들 혹은 시간들이 있었다.(<바셀린 붓다>, 60-74.)

 

거미의 항문에서 줄줄 나와 엮어지는 거미줄에 싱싱한 먹이가 걸려들듯(혹은 그러지 않듯) 말들이 사물들을 붙잡을 때가 있는데, 대략 그 순간에 정영문식 서사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다. 그것의 재미는 어쩌면 그가 배척하는 일련의 재미없는 서사(“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작위>, 94))을 향한 유쾌한 야유에서 시작된다. 이어, 자신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작위>, 95)을 써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소설의 숙명이기도 했던 의미와 논리의 과잉에 맞서 점점 더 비워지는 의미, 점점 더 무너지는 논리를 선보이는 소설이 태어난다.

 

(계속)

 

-- <세계의문학>, 2013년, 여름호

 

- 주요 계간지에 지면을 얻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지난 겨울, <창비>에 실은 촌평도 그렇거니와! - 그러니까 영도 다리 밑 점쟁이 말대로 사십부터는 인생이 피려나 보다! ^^;; ) 완죤 감격, 그쪽의 기획 의도에 맞추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좀 길었음에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간 쓰고 싶은 얘기를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_-;;) 최대한 요령껏(?) 풀어보려고 했다. 언제든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우리 소설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공.부.가 체질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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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 신의 존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악마, 정치권력에 맞서는 문학 권력: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930년대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의 수도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가 수행원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그의 앞에서 악마의 존재를,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베를리오즈는 이른바 참수형을 선고받고 전차에 목이 잘려 죽는다. 이어, 악마들은 바리에테[버라이어티] 극장 관계자들을 혼내줌과 동시에 한 판 마술쇼를 벌여 모스크바 시민들의 허영과 속악을 폭로한다. 대체로 이들의 활약상(폭로와 응징!)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탈린 공포 정치와 무자비한 숙청(아파트 주민들의 증발), 급속한 근대화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한 주택난(악마조차 집 주인을 쫓아내고 새로 서류를 작성하지 않으면 묵을 아파트가 없다), 뇌물 수수와 각종 뒷거래(주택 위원장 니카노르의 수난), 지나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그리보예도프집에 들어가려면 악마라도 출입증이 필요하다) . 보다시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소설이지만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천착했던 여러 형이상학적 문제를 파헤친 철학 소설이기도 하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볼란드는 베를리오즈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제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그것을 증명할 일곱 번째 증거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예언은 물론 실현되었다. 뿐더러 베를리오즈의 잘린 머리가 악마의 무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신봉한 무신론의 원칙에 따라 (불멸 대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는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베를리오즈], 모든 일이 예언대로 실현됐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볼란드가 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중략) 당신은 머리가 잘리면 사람의 삶은 그것으로 멈추고 그 사람은 재로 화하여 무()로 사라져버린다는 이론을 열띠게 전파해 왔지요. 저의 손님들 앞에서 - 하긴 이 손님들 자체가 반론의 증거가 되기는 합니다만 - 이분들 앞에서 당신의 이론은 확고하고 재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론이라는 건 다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사람은 각자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론도 있지요. 그 이론도 실현될 겁니다! 당신은 무로 사라질 것이고, 저는 당신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게 되어 기쁠 겁니다. 존재를 위해 건배합시다!”(462-463)

 

이렇게 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신에게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귀결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사로 쓰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입지요.”)은 여러 모로 선언적이다. 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에 도달하는 것, 악마의 존재를 눈앞에 직접 보여줌으로써 숨어 있는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절대선)과 악마(절대악)의 관계는 여기서,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을지라도, 영원한 공존과 동행의 운명을 타고난 원상과 그림자처럼 상보적이다. -예수의 사도 마태오(레비 마트베이)에게 볼란드가 하는 말을 보라.

 

넌 마치 그림자도 악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약간의 호의를 발휘해서 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 선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땅 위에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이 땅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림자는 사물과 사람들 때문에 지는 것이다. 저기 내 장검 때문에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나무나 살아 있는 동물 때문에도 생기지. 벌거벗은 세상을 즐기려는 네 환상 때문에 나무와 동물들을 모두 없애고 지구의 껍데기를 전부 벗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는 바보다.”(604)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거장은 대체 무엇일까. 그는 이름도 없을뿐더러(그저 거장-M’일 뿐이다!) 전기적인 사항도 최소화되어 있다. 좀 과장하면, 작가의 분신으로서 오직 문학과 작가의 소명을 얘기하기 위해 존재한달까. 특히 그가 우여곡절 끝에 불태워버린 원고(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부활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원고는 불타지 않아요.”(486) 볼란드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문학의 불멸을 위해서는, 실상 극히 소비에트적인 화법인바, 작가 권력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스탈린의 애매한 비호-폭력아래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불가코프에게 이것은 무척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랬기에 그는 거장을 통해 자신이 역사와 시대 앞에서 범한 죄(‘비겁함’)를 예슈아(예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처형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에게 투영한다. 나아가 거장이 빌라도를 만월의 고통, 즉 불면과 편두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듯, 불가코프는 거장에게 은 아닐지언정 최후의 안식처를 선사한다. 평안이야말로 병마에 시달리며 당시로서는 출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써나간 불가코프가 스스로에게 내민 위안의 손길이었을 터이다.

 

, 다른 이들보다 세 배는 더 낭만적인 거장이여, 낮에는 반려자와 함께 꽃이 피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를 산책하고 저녁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촛불 앞에서 거위 깃털로 글을 쓰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파우스트처럼 새로운 호문쿨루스를 빚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증류기 앞에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까? 저곳! 저기에 벌써 당신들의 집과 늙은 하인이 기다리고 있고, 촛불도 벌써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은 곧 꺼질 겁니다,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올 테니까요. 이 길로 가십시오, 거장, 이 길로!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떠날 때가 됐습니다.”(642-643)

 

 

-- <네이버캐스트>

 

 

--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작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처음 읽었을 때(당시는 번역도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진짜 깜.놀.했는데, 그 무렵엔 전체 형식에 일단 끌렸던 터라, 그런 식(즉, 두 텍스트가 시공을 초월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뒤섞이는, 어떤 의미에선 무척 유치하지만 또한 무척 에로틱하다!)의 장편을 써보고 싶었고, 심지어 내 나름으로 뭘 썼던 기억도 있다. (쓰다 보니, '루저'의 한탄이냐, 뭐냐, 죄다 기억, 즉 과거지사의 나열이냐...쩝.) 좀 철들고 나서 그런 형식 자체가 정녕 '영혼의 형식'이었음을 알겠다.  그러니 소설의 어떤 형식도 실은, 모방을 불.허.한.다!

--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빚진 작품들이 많은데, 우선은 이것.

 

 

 

 

 

 

 

 

 

 

 

 

 

 

 

 

 

 

-- 그리고 이 참에 한 번 더 올려본다. 이 작가,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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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越境)의 시학과 미():

-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설국>(184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한 남자(시마무라)와 한 여자(고마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연애소설이다. 세 번에 걸친 만남은 모두 그가 도쿄를 떠나 눈의 고장’(‘설국’)으로 오면서 이루어진다. 첫 만남은 회상처럼 짧게 삽입되고 나머지 두 만남에서는 무용 선생의 아들(유키오)을 사이에 두고 고마코와 미묘한 연적이 된 처녀(요코)가 등장하면서 두 겹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소설은 영화가 상영되는 고치 공장의 화재와 요코의 자살로 끝난다.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여러 단편을 용해해 만들었다는 창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설국>은 파편적인 장면들의 모자이크처럼 읽힌다. 무엇보다도 한량이나 다름없는 유부남과 게이샤의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사랑을 인간 존재의 한시성에 대한 인식을 담은 소설로 승화한 작가의 솜씨와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가령, 대개 눈[]과 함께 어우러져 포착되는 고마코에 관한 묘사를 보자.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44)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129) 은하수가 흐르는 가운데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 위를 달리는 고마코의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관능적이고 농염한 고마코, 청순하고 순결한 요코 등 남성의 눈으로 포착된 두 여성은 그 자체로 미()의 육화이다. ‘게이샤라는 단어를 세계어 사전에 등록한 일본 문화의 특수성과 탐미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마코는 단순히 미적 대상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동기(童伎)로 도쿄에 팔려 갔고 자신을 기방에서 빼준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는 16개월 만에 사망한다. 시마무라가 도쿄로 떠난 다음에는 자기가 도쿄로 팔려 갈 때 배웅해준 유일한 사람인, 장결핵으로 죽어가는 유키오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 사연이 많은 만큼이나 여백이 많은 탓인지 그녀의 사랑과 교태에는 어딘가 기법 같은, 즉 미학적인 구석이 있다. 덧붙여 그녀에게는 일기를 쓰는 흥미로운 습관이 있다. 유키오 얘기는 가장 오래된 일기 첫머리에 적혀 있고 시마무라와의 첫 만남도 날짜와 함께 기록돼 있는데, 이런 공책이 열권이나 된다. 자기가 읽은 소설의 제목과 저자,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도 간단히 적어둔다. 이를 두고 시마무라는 헛수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수고를 반복하는 눈[]의 게이샤를 찾아오는(혹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 남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고마코의 헛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가 허무이다. 대체로 <설국>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는 어려서 부모, 누나, 조부모를 연이어 잃은 작가의 개인사, 나아가 20세기 전반(前半) 일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설의 처음으로 가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7) 󰡔설국󰡕은 연애소설이자 미에 관한 소설임과 동시에 월경(越境)에 관한 소설이다. ‘눈의 고장이 아름다운 것은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77)) 생활의 공간(도쿄)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우리의 소설이 있다.

 

 

 

 

 

 

 

 

 

 

 

 

 

 

 

 

 

 

김승옥이 스물세 살 때 쓴 무진기행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가 제약회사의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잠시 고향, 즉 안개의 고장인 무진’(霧津)에 와서 겪는 얘기를 담은 소설이다. 너무 날 것이어서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야생의 문장, 속되고도 어딘가 날이 선 관계(후배 박, 동기 조, 음악 선생 하인숙, 서울의 아내 과 장인, 옛 애인 ’) 등 비슷한 연배의 작가 이청준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소설 문법이 여전히 충격적이다. 과거의 처럼 서울을 꿈꾸는(“서울로 가고 싶어죽겠어요.”) 음악 선생 하인숙과 동침한 다음날, 빨리 상경하라는 내용이 담긴 아내의 전보를 앞에 두고 가 내놓는 타협안 역시 모방을 불허하는 명문장이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무진기행) 끝으로, 하인숙에게 쓴 사과의 편지를 그냥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는 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 이 수치의 감각은 무엇인가.

 

순천에서 서울로 월경한 어느 불문학도가 단편 하나(생명연습)를 들고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가 이룩한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의 동력은 아무래도 각종 속(), 속됨과 속물스러움에 대한 혐오, 궁극적으론 자기혐오였던 것 같다. 아무튼 풋풋한 미남 청년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 그리고 천재 작가라는 지당한 수식어와 함께 흑백 사진 속에 붙박인 박제가 되었고, 펜을 놓고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중년, 심지어 말을 놓고 슬어져가는 노년만 남았다. 미가 미인 것은 역시나 그것이 시간 앞에서 무력하기 때문, 찰나적이기 때문인가. 이 비극 앞에서 문학만이 우리의 위안이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는 무진기행이 고맙다.

 

-- <책앤> 6월호 게재 예정.

 

-- 간만에 여유를 부려본다. 혹은, <무진기행>을 다시 읽은 충격을 아직 다 소화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감기도 일주일, 이주일 째 지속되고, 다 겸사겸사, 이다.    

-- <설국>에 대해 쓰기로 했지만(지면상 그래야 했지만) 쓰다 보니 <무진기행> 얘기가 더 많아졌고, 마음으론 앞의 것 다 지우고 뒷 얘기만 더 쓰고 싶어졌다. (잘 쓴 줄 알겠으나, 일본식 탐미주의는 역시 체질이 아니더라는...-_-;;)  

-- 전집을 갖다 놓고(혹은 그렇게 모아가면서) 읽은 여러 작가 중 하나가 김승옥. 뒤로 갈수록(길어질 수록) 힘이 빠지는 그의 소설에 절망했던 기억. 아니, 그보다는 그의 초기작을 읽고 감탄하면서 그 때문에 또한 절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물론 그때 나의 절망이 뭐, 얼마나 컸겠나, 그때는 나 역시 작가의 나이였으니, 시건방에 쩔었을 거다, 분명히. 지금 읽으니, 정녕 절망이더라. 천재란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인가 보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내 머릿속에 항상 김승옥과 함께 떠오르는 작가는 이청준. 뭐, 이유는 둘의 소설 세계와 문학 인생이 어떤 평행선을 그린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 (천재형 vs. 장인형, 뭐 등등.) 덧붙여, 역시 오래 전 일인데,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의 빈소를 나오는 길에, 그 빈소를 찾아가는 <무진기행>의 작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역시 모종의 평행선.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운은 무척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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