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원고의 자리는 좁은데 메모가 넘쳐나서 여기다 다시 좀 갖다 놓는다. 메모가 넘치는 건 시간이 넘치기 때문인데, 시간이 넘치는 건 또, 다른 일(그러니까 번역-_-;;)을 너무 하기 싫기 때문이다. 대체로 요즘 나는 글을 실을 지면과 책을 내줄 출판사를 필요로 하는데, 그쪽에서는 내 글과 원고가 필요없다는 것이 문제이다...ㅠ.ㅠ 그뿐이냐. 나는 어디든 '자리'가 필요한데, 그쪽에서는 나한테 줄 '자리'가 또 없는 것이다..ㅠ.ㅠ 이건 되게 웃긴 정황인데, 가만 생각하면 울쩍해지고, 생각을 멈추면 다시 좀 웃을 수 있다. 암튼.

 

 

 

 

 

 

 

 

 

 

 

 

 

 

 

우선 책 얘기다. 아무래도 보르헤스는 '책'의 작가이고, '바벨의 도서관'은 그 상징이다. 소설로는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재미도 없지만(재미는 <피에르 메나르...>, <두 갈래... 정원> 쪽) 워낙에 교과서라. 도서관 사서(나중에는 관장)로 살았던 이력이 이런 글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97)

당연한 소리이지만, 그런 억제할 수 없는 희망 후에는 엄청난 절망이 뒤따랐다. 어떤 육각형 진열실의 어떤 책장에는 틀림없이 귀중한 책들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에 접근할 수 없다는 확신감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104)

만일 제가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 볼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그런 기회를 허락해 주소서.”(106)

 

좀 더 잘 쓴 건 사실 <모래의 책>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수록.) 제목 자체가 이미 많은 얘기를 해주지 않는가.  첫 문장은 이렇다.

 

선은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면은 무한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피는 무한한 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4차원적 부피는 무한한 부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방식은 <보다 기하학적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다. 요즘의 모든 허구적 이야기들은 유행처럼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사실이다.”(132)

 

그리고, 성경을 파는 낯선 남자가 나를 방문한다.  근데 왜 음울한 얼굴이냐. 그가 내놓은 책은 인도,  어느 평원에 있는 마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사람한테서 구한 책이다. 이른바 <모래의 책>.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책도 모래도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이라나요.”(135)

 “... 마치 책 속에서 페이지들이 점점 불어나는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135)

만일 공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공간의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136)

 

일종의 물물교환처럼((위클리프 성경 vs. 모래의 책>) 손에  넣은 책이 결국 처치 곤란이 된다. 나는 마침내 그것이 악몽의 물체,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는 느낌에 이르게 되었다.”(139) 어쩔까 하다가 도서관에 갖다둔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139)

 

 

 

 

 

 

 

 

 

 

 

 

 

 

 

 

 

'책의 작가'도 물론, 자기 인생에 대해, 개인사에 대해 대놓고 얘기할 때가 있다. 치명적인 사건을 겪었을 때는. 우선 일종의 '급성'은 마흔 즈음,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한 사고와 그로 인한 패혈증이다. 그것에 대해 그는 <남부>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마치 여덟 세기와도 같은 여드레가 지나갔다. (...) 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 그의 옷은 벗겨졌고 그의 머리는 죄다 깎였으며, 간이침대에 눕혀져 쇠사슬로 묶였다. 그러더니 그들은 눈이 부시고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빛을 쪼이더니, 청진기로 진찰을 했고, 마스크를 한 누군가가 그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붕대에 감긴 채 구역질을 느끼며, 그는 우물 바닥 같은 병실에서 깨어났다. 수술 이후 몇 번이나 밤과 낮을 보낸 뒤,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지옥 언저리를 헤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에 얼음을 넣어도 조금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달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자기의 정체성을 증오했고, 얼굴에 바늘처럼 서 있는 수염도 증오했다. 그는 몹시 괴로운 치료를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러나 의사가 패혈증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말을 하자, (...)”(219)

 

 

급성보다 더 무서운 건 물론, 만성이다. 바로, 실명. 보르헤스와 실명은 유명한 테마이지만, 최근에 내가 안질환으로 약간의(-_-;;) 고생을 하다 보니, 정녕 이것도 농담이 아니다 싶다. 암튼. 그에 대해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점차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걷히지 않는 안개가 그의 손금들을 지워버렸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그의 발 아래에서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이 점차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울었다.”(10)(<작가>. <<칼잡이들의 이야기>>)

 

 

곁다리. 유다에 관한 보르헤스의 얘기도 재밌다. 학기 말에 반쯤은 수업 준비차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을 봤다. 예수보다(혹은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이 유다였는데,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다는 비밀스러운 신성과 예수의 가공할 만한 목적을 깨달았다.”(199) / “닐스 루네베리는 과장되고 심지어는 무한한 금욕주의 때문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동기를 제안한다.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위해 금욕주의자는 육체를 비하하고 고행한다. 유다는 영혼을 비하하며 고행했다.”(200)(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마지막.

보르헤스는 전형적인 엘리트 작가이다. 그가 라틴아메리카(아르헨티나) 작가라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 있는데(실은 스페인 정복자 가문의 후예니까 또 얘기가 다르다), 암튼, 지식인의 현실 망각에 대해 내놓은 답이 멋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니가 작가다...! 모두가 다 참여작가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상아탑 속에 갇혀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상아탑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시 한 편을 떠올리고 있고, 어떤 책 한 권을 구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현실적인 겁니다.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141)

  

비슷한 맥락인데, 저번에 잠깐 소개한 단편  1983825」은 일종의 자살 예언서(?)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자살할 거다, 라고 해놓고서 죽지 않았다는 것...-_-;; 왜 자살을 안 했냐고 묻자, 보르헤스의 답인즉:: 겁이 나서”.(156)  이 역시 지식인의 (대놓고! 당당히! 떳떳히!) 나약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13)

(<불한당들의 세계사> 1판의 서문」)

 

 

7월,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내가 그를 많이 좋아했음(-좋아함)을 깨닫는다. 아무리 다른 일이 하기 싫어도, 읽기 싫은 책을 이렇게 오래 들고 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사진은 꽤 미남이던데, 우리가 사랑하는 보르헤스의 얼굴은 아무래도 이런 얼굴. 나이가 좀 들어야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어서-_-;;) 책도 더 많이, 더 잘 읽을 수 있는 것 같으니...-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7년, 첫 소설집이 나왔을 때 어느 일간지의 기자가 보르헤스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그를 읽었지만, 심지어 그의 전집을 대략 다 봤지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무지, 보르헤스는 너무 어려웠다!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학생들의 기말고사 답안을 읽다가,,  한 학생이 나보코프의 <절망>과 분신테마 관련 얘기를 써나가던 중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를 언급한다. 아뿔사! 이런 소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방학이 되자마자, 부산의 부모님 집의 창고에서 썩기 직전에(너무 많은 책이 습기와 벌레의 희생양이 됐다ㅠ.ㅠ) 구원(!)한, 손때 묻은 보르헤스 전집을 다시 꺼냈다. 자, 그렇게 미뤄 두었던 작가를 다시 한 번 본다.

 

 

 

 

 

 

 

 

 

 

 

 

 

 

무척 날렵하고 세련된 표지의 이미지가 여전히 좋다.(시인 박상순이 디자인한 걸로 안다.) 암튼. 얘기하기 편한, 즉 읽기 편한 작품들은 <픽션들>에 실린 대표 단편들([피에르 메나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원형의 폐허] 등)이지만, 그에 관한 얘기는 지금 쓰는 원고에서 하게 될 테고,  한데 덩달아 같이 읽은 작품들이 그냥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게다가 메모 해놓은 것도 너무 많아서, 좀 긁어오려고 한다.

 

 

 

 

 

 

 

 

 

 

 

 

 

 

 

 

대체로 보르헤스는 '반복'(그러니까 '차이와 반복')에 예민했던 듯한데, '쓰기보다 읽기'라는 말에 포함된 것이 결국 그런 얘기일 듯하다. 그게 소설적 형식의 빌자면, 결국 분신 테마이다. <원형의 폐허>가 그 중 제일 잘 쓴, 거의 충격적인 소설인 것 같고. 소설적인 형상성은 좀 떨어지지만, 이런 것들도 있다.

 

 “그의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얼굴(그 당시의 형편없는 그림들을 보아도 그 어떤 사람과도 닮지 않은), 방대하고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말들 뒤에도 단지 약간의 냉기,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꾸어지지 않은 꿈만이 있었을 뿐이었다.”(56)

죽은(혹은 죽기 직전) 셰익스피어와 신의 대화: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회오리 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그에게 대답했다.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59) (전체와 무()」, <칼잡이들의 이야기>)

.

손쉽게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지만 그건 비교적 장치(=기교)에 가까운 것 같고,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아무래도, '역사와 악몽은 반복된다'라는 암울한 세계관인 것 같다. 요컨대, 피에르 메나르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똑같은(!!!) 소설을 쓰려는, '완전한 일치'의 이념을 실현하는, 그런 무익하고 암담한 글쓰기와 같은 시도. 그는 이걸 '지적인 행위'라 부른다. 원래, 지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 쓸모없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게 결국은 자기복제, 를 낳는다. 이런 작품도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르헤스는 자산의 문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고, 바로 그 문학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몇 페이지의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글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이미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의 것도 아니고, 단지 언어 또는 전통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명백하게 소멸할 운명을 가지고 있고, 단지 내 자신의 어떤 순간들만이 남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잖는가.”(66)

나는 우리 둘 중에서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66)(보르헤스와 나. )

 

 

늙은 보르헤스가 아침 10, 영국, 템스 강(?) 거리의 한 벤치에서 젊은 보르헤스를 만나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또 어떠냐.

 

불가능한 것에 대한 본질적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경악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지만 내 살과 피로 만들어진 자식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그 가련한 청년에게 물밀듯 밀려오는 사랑을 느꼈다.”(15).([타자])

 

겸사겸사, 그가 갖고 있는 책은 도... 키의 <악령>이다. 그 러시아의 대가는 슬라브 민족 정신의 미로를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갔던 사람이에요.”(15) 라는 찬사도 곁들여진다.

 

비슷한 주제로 역시나 충격을 주는 단편은 1983825. '보르헤스'가 자살을 하려고 여관방을 찾아갔는데, 숙박계를 보니 이미 내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미 씌어 있고, 잉크는 아직 말라 있지도 않은 채가 아닌가.”(147)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눈 다음 그가 묵고 있는 319호실로 간다. 그리하여, 나보다 좀 늙은 그와 대면. “기이한 일이군 - 그가 말했다 -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로군. 그렇다 해도 이게 꿈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148)

 

 그것은 자네 기억의 저 깊은 곳, 꿈들의 조수 아래에 머물게 될 걸세. 자네가 그것을 글로 쓰게 된다면 자네는 자신이 환상적인 단편 하나를 쓰려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것도 내일이 아니라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가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죽은 것이었다. 나는 맥이 풀린 채로 베개 위로 몸을 구부렸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 

밖에서는 또 다른 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55) ( 1983825일)

 

 

보르헤스는 아마 세계문학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 따라서 가장 염세적인 작가가 아닌가 싶다. 도무지 그의 소설에는 사람 얘기가, 세상 얘기가 전혀 없다!  책에서 시작해 책으로 끝나는 소설. 그나마도 너무 짧아, 잠시 졸거나 딴 생각하면 그냥 끝이다..-_-;; 달리 말하면, 그런 식으로 읽어도 번득이는 문장이나 장면에 눈이 따끔, 해진다. 이런 것. 

 

 

돈키호테는 결코 자신이 환상적인 이야기들의 광적인 독자였던 알론소 끼하노의 반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39) (어떤 수수께끼」)

 

-- 몇 세기 동안의 망명 끝에 돌아온 신들(cf. 니체.)과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모든 것은 그 신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의구심(아마 과장되었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몰락과 망명의 삶은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요소들을 거의 탈취시켜 버렸던 것이다. (...) 불현듯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패를 돌리고 있고, 그들은 교활하고, 무지하고, 그리고 마치 갇혀 있는 늙은 짐승들처럼 잔인하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두려움이나 동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들은 급기야 우리들을 파멸시켜 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육중한 권총들을 끄집어냈고(우리들은 그 꿈 속에서 돌연 권총을 가지고 있었고) 즐겁게 신들을 쏘아죽였다.”(61-62) ([꿈]

 

 위에 적힌 쪽수는 모두 황병하 번역본이고, 이번 기회에 새 번역본으로 <픽션들>을 다시 읽었다. 송병선 번역도  좋다. 참조한 전기도 기대 이상이었다.(어지간한 논문들보다 낫더라는...-_-;;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스페인어권 문학 연구자들이 좀 분발했으면 한다..-_-;;)

 

 

 

 

 

 

 

 

 

  

 

 

 

 

 

 

 

 

공부를 아주 잘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고, 내게 공부는 책을 아주 많이 읽고 또 아주 좋은 책을 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소설(문학) 창작과 소설(문학) 연구가 딱히 다른 일이 아니었는데, 좀 더 뒤, 너무 다른 종류의 활동임을 알게 된다. 좀 더 뒤, 그럼에도 계속 두 가지 일을 어영부영, 엉거주춤 같이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대안도 없음을 또한 발견한다. 더 젊어질 수도 없고, 또 공부만이, 읽고 쓰는 것만이 살 길이다. 모선배의 자조섞인 농담대로 "이 나이에 내가 뭘 어쩌겠니?"...-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과 행동, 삶과 죽음 사이 -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1564-1616), <햄릿>(1601)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초연 년도는 1601년으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거뜬히 지났음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살아있는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작품의 골조를 이루는 중세 덴마크 왕정의 비극(물론 셰익스피어의 순수 창작물은 아니다) 속에는 각종 서사 장르의 단골 메뉴(유령, 복수, 정쟁, 연애, 광기, 살인, 자살, 결투 등)가 총동원되어 있다. 인물들도 주인공뿐만 부차적 인물과 단역에 이르기까지 또렷한 형상과 성격을 자랑하고 대사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시구나 철학적 아포리즘에 맞먹을 만큼 도발적이고도 함축적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미루는 햄릿의 우유부단함, 행동이 아닌 행동 없음이 희곡의 플롯을 이끌고 가는 것도 흥미롭다. 부왕-유령이 즉각적인 복수를 명령했음에도, 이어 그 스스로 올린 연극을 통해 숙부(클로어디스)의 죄를 확인했음에도 햄릿은 쉽사리 그를 죽이지 못한다. 유혈 복수가 장려, 심지어 요구되는(“살인에는 정말 성역이 있어선 안 되고, 복수에 한계는 없어야지.”(169) 시대였고 햄릿이야말로 용맹한 다혈질의 전사였음을(폴로니어스 살해 장면을 보라) 상기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대목이다. 5막 내내 복수-행동은 없고 그것에 대한 , , ”(70)뿐이다. 이는 짐승 같은 망각인가, 아니면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149)인가.

 

 

 

 

 

 

 

 

 

 

 

 

 

 

 

 

 

햄릿에 대해 괴테는 지극히 도덕적인 한 인물이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던져버릴 수도 없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한다고(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말했다. , 영웅이 되는 데 필요한 억센 감각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훗날 프로이트가 내놓은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무척 당돌하고 발칙하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햄릿이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남자”, 즉 억압돼 있던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실현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일만은 양심상(!) 할 수 없었다(프로이트, <꿈의 해석>)는 것이다. 햄릿을 근친상간과 친부살해의 틀로 읽어내려는 유혹은 여전하지만(어니스트 존스, <햄릿과 오이디푸스>) 그렇다고 수수께끼가 온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햄릿>(<맥베스>와는 달리) 인물의 내적 정황을 담아낼 수단, 객관적 상관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위 실패작이라고 보는 견해(T. S. 엘리엇, 햄릿과 그의 문제들)도 있다. 한편, 투르게네프를 비롯한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은 햄릿을 (행동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와 비교하여) 비대한 자의식과 사유에 얽매인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잉여 인간’)으로 이해했다.

 

 

 

 

 

 

 

 

 

 

 

 

 

 

 

 

 

실상 햄릿의 가장 큰 매력은, 작품 자체가 그렇거니와, 그 성격상의 모호함과 흐릿함인 것 같다. 가령, 유령의 출현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햄릿과 그의 대화는 호레이쇼와 마셀러스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즉 단 둘만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내실에서도 그는 유령을 보고 심지어 말도 주고받는데, 거트루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부왕-유령은 곧 햄릿(‘-지식인’)의 내면에 깃든 또 다른 자아(‘행동-전사’)의 극대화된 표현이 아닐까. 다른 인물들도 애매한 측면이 있다. 시동생과 결혼한 거트루드는 아들의 날선 비난에 시달리지만, 당시 여성의 입지를 생각하면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클로어디스의 감정도 단순히 정치적 야욕과 육욕의 발로로 보이지는 않는다. “, 내 죄 썩은 내가 하늘까지 나는구나. 난 인류 최초의 형제를 죽인 저주를 받고 있다.”(123) 회한에 사로잡힌 이 카인의 후예에게는 분명 복잡한 전사(前事)가 있었을 것이다. 오필리어의 광기와 자살을 비롯, 모두 상서롭지 못한 결말을 맞는 폴로니어스 집안도 그 나름의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문제는 삶과 죽음 사이의 길항이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94-95)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문장은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김정환 번역, <햄릿>)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말과 관련하여 가장 주의를 끄는 인물은 묘지 인부이다. 그는 오랜 세월 시신을 다루어온 까닭에 생로병사에 무감각한데, 오필리어의 시신을 묻을 무덤을 파다가 나온 해골 중 하나가 선왕의 어릿광대 요릭의 것임을 금방 알아본다. 그것을 손에 든 채 햄릿이 호레이쇼 앞에서 늘어놓는 말이 새삼스럽다. “안됐다, 불쌍한 요릭. 그를 안다네, 호레이쇼. 재담은 끝이 없고, 상상력이 아주 탁월한 친구였지. 자기 등에 나를 수도 없이 업었는데, 지금은 () 알렉산더 대왕도 땅 속에선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나?”(183-184)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에 대해 어떤 표상을 갖기가 힘들다. 그는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잘 썼고, 과장하자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와 모든 인간형을 두루 섭렵한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엄연한 영국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민족(지역) 문학이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문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극작가였을 뿐더러 연출가이자 극장 소유주이기도 했던 그는 살아생전에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으며 여덟 살 연상의 부인과도 백년해로했다. 작품 창작에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을 테지만 이 역시 오늘 날의 영화 작업처럼 흠이 아니라 그의 인화력을 방증하는 것이다. “뒤틀린 세월. , 저주스런 낭패로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52) 15장에서 이렇게 한탄하는 햄릿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 치하 황금시대의 주역, 즉 시대와도 호응한 작가였다. 과연 천재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 <책앤>7월호.

 

-- <햄릿>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투르게네프의 <돈키호테와 햄릿>을 읽던 참에) 일종의 의무감에서 읽었고,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더라(나는 오히려 <맥베스>를 좋아한다). 반면, <햄릿>에 대해 쓰려고 이런저런 참고서를 뒤지던 중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정말 십수년만에(!) 다시 봤는데, 반가워서 가슴이 다 콩당거리더라. 취향이란 참, 이런 것이다!

 

 

 

 

 

 

 

 

 

 

 

 

 

 

 

 

 

 

-- 겸사겸사 <오셀로>와 <리어왕>을, 역시나 십수년만에(!), 슬쩍 다시 봤다. <오셀로>는 사랑(질투)보다는 오히려 (오셀로의)  계급의식이 더 돋보이고, 주인공들 보다는 이아고가 좀 수상쩍게, 즉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리어왕>은... 재산이 얼마가 되든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꼭 쥐고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노후 생활 지침서로 꼭 읽어야 하는 명작임을 새삼 확인했다..^^;;  글구, 딸도 소용없다는, 잘 키운 아들 하나, 세 딸 안 부러워...~~ -_-;;

-- 덧붙여, 가장 훌륭한 <리어왕> 중 하나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이 영화! <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바고의 기억 속에서 라라는 그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으며 토냐, 미샤와 함께 금욕과 순수를 논하던 시절 음란한 욕망과 타락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로서 신비스러움을 갖춘 존재였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은 군의관 지바고와 간호병 라라의 정신세계를, 소비에트 혁명은 두 사람의 삶 자체를 아름답고 절실한 사랑으로 묶어 놓게 된다. 그리고 지바고의 시 속에서 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가혹하기만 했던 운명에 맞서면서 그녀가 익혀온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때로는 자기희생적인 삶, 코마로프스키와의 관계에서 나타났던 탕녀의 이미지 등을 복합적으로 구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형상과 등치된다. 탈출에 성공하여 유라친, 이어 바르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를 간호하고 돌보는 라라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던, 타락과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혁명의 격동 속에서도 사랑과 삶을 창조하고자 했던 라라의 의지, 그리고 그녀의 비극적인 종말은 20세기 전반기에 어느 나라보다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러시아-소비에트 시대의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의 초상화의 일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붉은 마가목 열매가 혁명과 사랑의 상징이라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벨 안치포프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되겠다. 그는 1905년 혁명 당시 철도 파업을 주동하여 투옥되었다가 1917년 혁명 이후에는 가족도 내팽개친 무자비한 관료적 혁명가가 된 안치포프의 아들이다. 아버지와는 달리 섬세하고 여린 성정을 지녔던 그의 순수한 열정은 라라에 대한 사랑과 이것을 매개로 한 지식욕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사랑은 타협을 모를 만큼 철저하고 맹목적이었기 때문에 결혼 직후 밝혀진 라라의 때 이른 순결의 상실과 육체적 타락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라라의 표현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악-불행을 시대정신, 즉 보편적인 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 점에서 안치포프의 1차 세계 대전 참전은 결혼 생활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이기도 했지만 무수한 코마로프스키들, 즉 구시대 러시아의 악의 대변자들에 대한 복수극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파벨 안치포프의 복수극은, 그가 종전 후 자신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이용하여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뒤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극에 다다른다.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이 암시하듯(‘학살자’, ‘총살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라라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났던 그의 순수는 이제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와 혁명과 결합된다. 지바고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역사의 흐름을 한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의지의 화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리자,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떤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혁명이 완성되자마자 정식 당원이 아니면서도 수뇌부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최고형을 선고받게 되는 그의 운명은, 앞서 언급했듯, 낭만적인 혁명과 현실적인 정치가 서로 결합되었다가 분열되는 역사의 보편적인 현상을 잔혹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조차 미루었던 이 비운의 인물은 라라가 떠나버린 지바고의 은신처 바르이키노로 숨어들었다가 자신의 아내와 한 시절을 보냈던 지바고와의 대화로 지새운 밤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러니까 아침녘 지바고의 눈에 비친, 하얀 눈밭 위에 붉게 번져 있는 안치포프-스트렐리니코프의 피는 빨간 마가목 열매의 또 다른 구현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파스테르나크의 조금 어린 벗 마야코프스키처럼 너무도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 관료화되어가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들, 영원한 혁명가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바치는 파스테르나크의 애정과 경의의 표현일 수 있겠다.

 

 

 

 

 

 

0. : 영원한 혁명의 시대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진행시켜온 사회주의 실험을 실패로 인정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지 이미 10년이 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자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 따위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처럼 되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도 한 때는 우리의 모든 젊은 지성을 흥분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잊혀진 지 오래며, 러시아 본토에서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따위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고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변혁의 꿈틀거림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앞으로 수세기가 지난 이후, 현재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시대를 미래의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는 혁명의 시대로 기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맞물려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나 경제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나약한 문학 및 예술의 소명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최소한 <닥터 지바고>에만 한정시켜 말한다면, 그리고 혁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나아가 역사 자체와 동의어일 수 있다면, 문학과 예술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영원히 계속될 혁명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과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삶이 보여주듯, 작가-인간의 운명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특정 시대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을 같이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동년배여야 하는데 부녀, 심지어 할아버지와 손녀 같다..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 죽음과 불멸 - 의사와 시인

 

죽음은 어린 시절부터 지바고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소설은 어린 지바고인 유라의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지바고(부인)의 장례식을 치루는 겁니다라는 문장은 그 중의적인 의미 산 자를 매장한다’(‘지바고Zhivago’산 자의 목적격이기도 하다)로 인해 삶과 죽음의 복합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곧이어, 조만간 유라의 벗이 될 미샤 고르돈과 그의 아버지가 동승한 기차에서 지바고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부모의 때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지바고는 삶과 죽음에 대해 남달리 초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의 외숙이자 대학자인 니콜라이의 영향도 일정 부분 작용하는 바, 비단 종교적인 차원의 논의를 떠나서 죽음의 대극에 서 있는 것은 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연일 죽음과 대면하는 의사라는 정체성 외에, 부활과 불멸을 향한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공간인 문학과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마저도 혁명과 정치에 봉사하도록 강요되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지바고와 그의 시 및 산문(일기)는 가히, 작가 파스테르나크에게 붙여졌던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유리 지바고도 다분히 기회주의적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물로 읽힐 수 있겠다. 1차 세계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나 그에게 어떤 거국적 이념이나 명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혁명 이후 내란 중 파르티잔들 틈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이미 그의 애인이 된 라라를 만나러 가던 도중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여인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는 능동적인 행동의 주체로서의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지바고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활동한 유일한 영역은 그러니까, 문학-시였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인 17장에 수록된 유리 지바고의 시들은 혁명의 가두리에 머물고 있다가 불가피하게 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귀족 태생 지식인의 역사와 문학, 자신의 소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가령 첫 번째 시 햄릿을 보자. 러시아문학사에서 물론 양가적인 의미를 띠긴 하지만 대체로 행동하기보다는 사유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햄릿은 파괴를 통한 재건을 슬로건을 내세운 혁명기의 러시아-소비에트에서는 결단코 긍정적인 인물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바고는 여러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햄릿의 형상을 결합시키되, 이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형상을 궁극적으로는 혁명과 마주한 시인의 이상적인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혁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의사와 시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며, 그에게는 어떤 순간적인 충격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없으며 요동치는 역사 위에 존재하는 뭔가 더 높고 더 숭고한 원칙이 있었다. 최소한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만일 할 수만 있으시다면, /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소서 () 그러나 연극의 순서는 이미 짜여져 있고, / 길 끝은 피할 수가 없다라는 시구는 역사의 테러를 무조건 회피하거나 무기력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햄릿-그리스도의 처절한 고백은 차라리,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 수 없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작가 지바고-파스테르나크의 심오한 통찰과 고뇌의 산물이며 그의 일견 우유부단해 보이는 삶 역시도 이 법칙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던 것이다.

 

3. 붉은 마가목 열매 - 사랑과 혁명

 

유리 지바고가 성장기를 보낸 그로메코 집안의 파티에서는 빨간 마가목 열매로 담근 보드카를 선보이곤 했다. 마가목 열매는 아직은 대러시아제국이 존재했던 그 시절, 유년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뭔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이와 맞물려 역사의 흐름이 거세질수록 마가목 열매의 의미역은 혁명 전반으로까지 확대된다. 특히 12눈 속의 마가목의 첫 장면에서 파르티잔 부대의 주둔지 근처 눈 밭 위에 홀로 우뚝 솟은 산마가목 나무에 달려 있는 빨간 열매들은 혁명으로 인해 희생된 피들, 그들의 선혈의 직접적인 상징으로 기능한다. 러시아의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한 붉은 산마가목 열매는, 또한 그 눈부신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있어서 라라와 합치되기도 한다.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광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결심하고 방황하던 중 지바고의 눈에 들어온 눈밭의 또 다른 산마가목 나무는 나의 마가목 아가씨라라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계속...)

 

-- 왜 우리는 계속 이 소설을 읽는가. 영화화되는 것 포함.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썰매.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는 어린 시절 러시아문학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는데, 실제 영화 속 배경은 러시아가 아니었다는..-_-;; 최근 BBC에서 만든 <닥터 지바고>. 키이라 나이틀리가 라라 역을 맡았는데, 어떨지 궁금하다. 이미지만 봐서는 너무 안 어울리는 캐스팅..ㅠ.ㅠ

 

 

 

물론 더 잘 만든 건 (끝까지는 못 봤지만)  러시아 판 <지바고>이다. 단, 올렉 멘쉬코프가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중년의 나이로 이십대 유리 지바고(유라)를 감당하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 특히, 라라 역을 맡은 젊고(어리고!) 예쁜 여배우와 너무 대조되어 몰입이 잘 안 될 정도였다..ㅠ.ㅠ 

 

 

 

-- 마가목(Рябин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지. 러시아 가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떠날 즈음에 알았다, 기숙사 건물 옆에 줄창(!) 서 있던 바로 그 나무가 마가목이었음을...-_-;; 

<지바고>의 이미지대로 하얀 눈을 묻히고(^^;;) 있는 사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눈과 함께 있으면 진짜 '선혈'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