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첫 소설집이 나왔을 때 어느 일간지의 기자가 보르헤스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그를 읽었지만, 심지어 그의 전집을 대략 다 봤지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무지, 보르헤스는 너무 어려웠다!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학생들의 기말고사 답안을 읽다가,, 한 학생이 나보코프의 <절망>과 분신테마 관련 얘기를 써나가던 중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를 언급한다. 아뿔사! 이런 소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방학이 되자마자, 부산의 부모님 집의 창고에서 썩기 직전에(너무 많은 책이 습기와 벌레의 희생양이 됐다ㅠ.ㅠ) 구원(!)한, 손때 묻은 보르헤스 전집을 다시 꺼냈다. 자, 그렇게 미뤄 두었던 작가를 다시 한 번 본다.
무척 날렵하고 세련된 표지의 이미지가 여전히 좋다.(시인 박상순이 디자인한 걸로 안다.) 암튼. 얘기하기 편한, 즉 읽기 편한 작품들은 <픽션들>에 실린 대표 단편들([피에르 메나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원형의 폐허] 등)이지만, 그에 관한 얘기는 지금 쓰는 원고에서 하게 될 테고, 한데 덩달아 같이 읽은 작품들이 그냥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게다가 메모 해놓은 것도 너무 많아서, 좀 긁어오려고 한다.
대체로 보르헤스는 '반복'(그러니까 '차이와 반복')에 예민했던 듯한데, '쓰기보다 읽기'라는 말에 포함된 것이 결국 그런 얘기일 듯하다. 그게 소설적 형식의 빌자면, 결국 분신 테마이다. <원형의 폐허>가 그 중 제일 잘 쓴, 거의 충격적인 소설인 것 같고. 소설적인 형상성은 좀 떨어지지만, 이런 것들도 있다.
“그의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얼굴(그 당시의 형편없는 그림들을 보아도 그 어떤 사람과도 닮지 않은)과, 방대하고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말들 뒤에도 단지 약간의 냉기,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꾸어지지 않은 꿈만이 있었을 뿐이었다.”(56)
죽은(혹은 죽기 직전) 셰익스피어와 신의 대화: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회오리 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그에게 대답했다.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 걸. 나는 마치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59) (「전체와 무(無)」, <칼잡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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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쉽게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지만 그건 비교적 장치(=기교)에 가까운 것 같고,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아무래도, '역사와 악몽은 반복된다'라는 암울한 세계관인 것 같다. 요컨대, 피에르 메나르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똑같은(!!!) 소설을 쓰려는, '완전한 일치'의 이념을 실현하는, 그런 무익하고 암담한 글쓰기와 같은 시도. 그는 이걸 '지적인 행위'라 부른다. 원래, 지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 쓸모없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게 결국은 자기복제, 를 낳는다. 이런 작품도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르헤스는 자산의 문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고, 바로 그 문학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몇 페이지의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글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이미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의 것도 아니고, 단지 언어 또는 전통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명백하게 소멸할 운명을 가지고 있고, 단지 내 자신의 어떤 순간들만이 남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잖는가.”(66)
“나는 우리 둘 중에서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66)(「보르헤스와 나」. )
늙은 보르헤스가 아침 10시, 영국, 템스 강(?) 거리의 한 벤치에서 젊은 보르헤스를 만나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또 어떠냐.
“불가능한 것에 대한 본질적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경악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지만 내 살과 피로 만들어진 자식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그 가련한 청년에게 물밀듯 밀려오는 사랑을 느꼈다.”(15).([타자])
겸사겸사, 그가 갖고 있는 책은 도... 키의 <악령>이다. “그 러시아의 대가는 슬라브 민족 정신의 미로를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갔던 사람이에요.”(15) 라는 찬사도 곁들여진다.
비슷한 주제로 역시나 충격을 주는 단편은 「1983년 8월 25일」. '보르헤스'가 자살을 하려고 여관방을 찾아갔는데, 숙박계를 보니 이미 내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미 씌어 있고, 잉크는 아직 말라 있지도 않은 채가 아닌가.”(147)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눈 다음 그가 묵고 있는 3층 19호실로 간다. 그리하여, 나보다 좀 늙은 그와 대면. “기이한 일이군 - 그가 말했다 -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로군. 그렇다 해도 이게 꿈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148)
「그것은 자네 기억의 저 깊은 곳, 꿈들의 조수 아래에 머물게 될 걸세. 자네가 그것을 글로 쓰게 된다면 자네는 자신이 환상적인 단편 하나를 쓰려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것도 내일이 아니라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가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죽은 것이었다. 나는 맥이 풀린 채로 베개 위로 몸을 구부렸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
밖에서는 또 다른 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55) ( 「1983년 8월 25일)
보르헤스는 아마 세계문학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 따라서 가장 염세적인 작가가 아닌가 싶다. 도무지 그의 소설에는 사람 얘기가, 세상 얘기가 전혀 없다! 책에서 시작해 책으로 끝나는 소설. 그나마도 너무 짧아, 잠시 졸거나 딴 생각하면 그냥 끝이다..-_-;; 달리 말하면, 그런 식으로 읽어도 번득이는 문장이나 장면에 눈이 따끔, 해진다. 이런 것.
“돈키호테는 결코 자신이 환상적인 이야기들의 광적인 독자였던 알론소 끼하노의 반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39) (「어떤 수수께끼」)
-- 몇 세기 동안의 망명 끝에 돌아온 신들(cf. 니체.)과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모든 것은 그 신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의구심(아마 과장되었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몰락과 망명의 삶은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요소들을 거의 탈취시켜 버렸던 것이다. (...) 불현듯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패를 돌리고 있고, 그들은 교활하고, 무지하고, 그리고 마치 갇혀 있는 늙은 짐승들처럼 잔인하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두려움이나 동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들은 급기야 우리들을 파멸시켜 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육중한 권총들을 끄집어냈고(우리들은 그 꿈 속에서 돌연 권총을 가지고 있었고) 즐겁게 신들을 쏘아죽였다.”(61-62) ([꿈]
위에 적힌 쪽수는 모두 황병하 번역본이고, 이번 기회에 새 번역본으로 <픽션들>을 다시 읽었다. 송병선 번역도 좋다. 참조한 전기도 기대 이상이었다.(어지간한 논문들보다 낫더라는...-_-;;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스페인어권 문학 연구자들이 좀 분발했으면 한다..-_-;;)
공부를 아주 잘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고, 내게 공부는 책을 아주 많이 읽고 또 아주 좋은 책을 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소설(문학) 창작과 소설(문학) 연구가 딱히 다른 일이 아니었는데, 좀 더 뒤, 너무 다른 종류의 활동임을 알게 된다. 좀 더 뒤, 그럼에도 계속 두 가지 일을 어영부영, 엉거주춤 같이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대안도 없음을 또한 발견한다. 더 젊어질 수도 없고, 또 공부만이, 읽고 쓰는 것만이 살 길이다. 모선배의 자조섞인 농담대로 "이 나이에 내가 뭘 어쩌겠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