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죽음과 불멸 - 의사와 시인

 

죽음은 어린 시절부터 지바고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소설은 어린 지바고인 유라의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지바고(부인)의 장례식을 치루는 겁니다라는 문장은 그 중의적인 의미 산 자를 매장한다’(‘지바고Zhivago’산 자의 목적격이기도 하다)로 인해 삶과 죽음의 복합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곧이어, 조만간 유라의 벗이 될 미샤 고르돈과 그의 아버지가 동승한 기차에서 지바고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부모의 때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지바고는 삶과 죽음에 대해 남달리 초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의 외숙이자 대학자인 니콜라이의 영향도 일정 부분 작용하는 바, 비단 종교적인 차원의 논의를 떠나서 죽음의 대극에 서 있는 것은 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연일 죽음과 대면하는 의사라는 정체성 외에, 부활과 불멸을 향한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공간인 문학과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마저도 혁명과 정치에 봉사하도록 강요되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지바고와 그의 시 및 산문(일기)는 가히, 작가 파스테르나크에게 붙여졌던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유리 지바고도 다분히 기회주의적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물로 읽힐 수 있겠다. 1차 세계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나 그에게 어떤 거국적 이념이나 명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혁명 이후 내란 중 파르티잔들 틈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이미 그의 애인이 된 라라를 만나러 가던 도중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여인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는 능동적인 행동의 주체로서의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지바고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활동한 유일한 영역은 그러니까, 문학-시였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인 17장에 수록된 유리 지바고의 시들은 혁명의 가두리에 머물고 있다가 불가피하게 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귀족 태생 지식인의 역사와 문학, 자신의 소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가령 첫 번째 시 햄릿을 보자. 러시아문학사에서 물론 양가적인 의미를 띠긴 하지만 대체로 행동하기보다는 사유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햄릿은 파괴를 통한 재건을 슬로건을 내세운 혁명기의 러시아-소비에트에서는 결단코 긍정적인 인물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바고는 여러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햄릿의 형상을 결합시키되, 이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형상을 궁극적으로는 혁명과 마주한 시인의 이상적인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혁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의사와 시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며, 그에게는 어떤 순간적인 충격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없으며 요동치는 역사 위에 존재하는 뭔가 더 높고 더 숭고한 원칙이 있었다. 최소한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만일 할 수만 있으시다면, /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소서 () 그러나 연극의 순서는 이미 짜여져 있고, / 길 끝은 피할 수가 없다라는 시구는 역사의 테러를 무조건 회피하거나 무기력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햄릿-그리스도의 처절한 고백은 차라리,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 수 없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작가 지바고-파스테르나크의 심오한 통찰과 고뇌의 산물이며 그의 일견 우유부단해 보이는 삶 역시도 이 법칙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던 것이다.

 

3. 붉은 마가목 열매 - 사랑과 혁명

 

유리 지바고가 성장기를 보낸 그로메코 집안의 파티에서는 빨간 마가목 열매로 담근 보드카를 선보이곤 했다. 마가목 열매는 아직은 대러시아제국이 존재했던 그 시절, 유년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뭔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이와 맞물려 역사의 흐름이 거세질수록 마가목 열매의 의미역은 혁명 전반으로까지 확대된다. 특히 12눈 속의 마가목의 첫 장면에서 파르티잔 부대의 주둔지 근처 눈 밭 위에 홀로 우뚝 솟은 산마가목 나무에 달려 있는 빨간 열매들은 혁명으로 인해 희생된 피들, 그들의 선혈의 직접적인 상징으로 기능한다. 러시아의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한 붉은 산마가목 열매는, 또한 그 눈부신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있어서 라라와 합치되기도 한다.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광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결심하고 방황하던 중 지바고의 눈에 들어온 눈밭의 또 다른 산마가목 나무는 나의 마가목 아가씨라라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계속...)

 

-- 왜 우리는 계속 이 소설을 읽는가. 영화화되는 것 포함.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썰매.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는 어린 시절 러시아문학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는데, 실제 영화 속 배경은 러시아가 아니었다는..-_-;; 최근 BBC에서 만든 <닥터 지바고>. 키이라 나이틀리가 라라 역을 맡았는데, 어떨지 궁금하다. 이미지만 봐서는 너무 안 어울리는 캐스팅..ㅠ.ㅠ

 

 

 

물론 더 잘 만든 건 (끝까지는 못 봤지만)  러시아 판 <지바고>이다. 단, 올렉 멘쉬코프가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중년의 나이로 이십대 유리 지바고(유라)를 감당하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 특히, 라라 역을 맡은 젊고(어리고!) 예쁜 여배우와 너무 대조되어 몰입이 잘 안 될 정도였다..ㅠ.ㅠ 

 

 

 

-- 마가목(Рябин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지. 러시아 가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떠날 즈음에 알았다, 기숙사 건물 옆에 줄창(!) 서 있던 바로 그 나무가 마가목이었음을...-_-;; 

<지바고>의 이미지대로 하얀 눈을 묻히고(^^;;) 있는 사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눈과 함께 있으면 진짜 '선혈'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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