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바고의 기억 속에서 라라는 그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으며 토냐, 미샤와 함께 금욕과 순수를 논하던 시절 음란한 욕망과 타락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로서 신비스러움을 갖춘 존재였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은 군의관 지바고와 간호병 라라의 정신세계를, 소비에트 혁명은 두 사람의 삶 자체를 아름답고 절실한 사랑으로 묶어 놓게 된다. 그리고 지바고의 시 속에서 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가혹하기만 했던 운명에 맞서면서 그녀가 익혀온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때로는 자기희생적인 삶, 코마로프스키와의 관계에서 나타났던 탕녀의 이미지 등을 복합적으로 구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형상과 등치된다. 탈출에 성공하여 유라친, 이어 바르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를 간호하고 돌보는 라라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던, 타락과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혁명의 격동 속에서도 사랑과 삶을 창조하고자 했던 라라의 의지, 그리고 그녀의 비극적인 종말은 20세기 전반기에 어느 나라보다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러시아-소비에트 시대의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의 초상화의 일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붉은 마가목 열매가 혁명과 사랑의 상징이라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벨 안치포프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되겠다. 그는 1905년 혁명 당시 철도 파업을 주동하여 투옥되었다가 1917년 혁명 이후에는 가족도 내팽개친 무자비한 관료적 혁명가가 된 안치포프의 아들이다. 아버지와는 달리 섬세하고 여린 성정을 지녔던 그의 순수한 열정은 라라에 대한 사랑과 이것을 매개로 한 지식욕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사랑은 타협을 모를 만큼 철저하고 맹목적이었기 때문에 결혼 직후 밝혀진 라라의 때 이른 순결의 상실과 육체적 타락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라라의 표현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악-불행을 시대정신, 즉 보편적인 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 점에서 안치포프의 1차 세계 대전 참전은 결혼 생활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이기도 했지만 무수한 코마로프스키들, 즉 구시대 러시아의 악의 대변자들에 대한 복수극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파벨 안치포프의 복수극은, 그가 종전 후 자신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이용하여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뒤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극에 다다른다.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이 암시하듯(‘학살자’, ‘총살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라라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났던 그의 순수는 이제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와 혁명과 결합된다. 지바고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역사의 흐름을 한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의지의 화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리자,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떤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혁명이 완성되자마자 정식 당원이 아니면서도 수뇌부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최고형을 선고받게 되는 그의 운명은, 앞서 언급했듯, 낭만적인 혁명과 현실적인 정치가 서로 결합되었다가 분열되는 역사의 보편적인 현상을 잔혹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조차 미루었던 이 비운의 인물은 라라가 떠나버린 지바고의 은신처 바르이키노로 숨어들었다가 자신의 아내와 한 시절을 보냈던 지바고와의 대화로 지새운 밤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러니까 아침녘 지바고의 눈에 비친, 하얀 눈밭 위에 붉게 번져 있는 안치포프-스트렐리니코프의 피는 빨간 마가목 열매의 또 다른 구현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파스테르나크의 조금 어린 벗 마야코프스키처럼 너무도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 관료화되어가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들, 영원한 혁명가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바치는 파스테르나크의 애정과 경의의 표현일 수 있겠다.

 

 

 

 

 

 

0. : 영원한 혁명의 시대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진행시켜온 사회주의 실험을 실패로 인정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지 이미 10년이 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자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 따위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처럼 되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도 한 때는 우리의 모든 젊은 지성을 흥분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잊혀진 지 오래며, 러시아 본토에서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따위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고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변혁의 꿈틀거림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앞으로 수세기가 지난 이후, 현재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시대를 미래의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는 혁명의 시대로 기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맞물려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나 경제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나약한 문학 및 예술의 소명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최소한 <닥터 지바고>에만 한정시켜 말한다면, 그리고 혁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나아가 역사 자체와 동의어일 수 있다면, 문학과 예술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영원히 계속될 혁명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과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삶이 보여주듯, 작가-인간의 운명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특정 시대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을 같이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동년배여야 하는데 부녀, 심지어 할아버지와 손녀 같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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